사복음서에는 성전에서 제사에 드릴 예물을 사고 팔고하는 사건을 두고 처음엔 장사하는곳으로 만들지 말라 하지만 곧 바로 강도의 굴혈이라는 단어로 발전한다. 계명과 율법에 빠져있는 이들이 이 말을 알것 같지 않아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하고 지나갸야 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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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46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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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13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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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1: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번역비교] [유사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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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님들은 이 말의 내용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일이 강도의 일이구나 라고 단정하고 지나갈 것이다. 장사하는 일이 왜 갑자기 강도의 일로 돌변하는것인가를 생각할려면 그냥 율법 율법 계명 계명 해서는 이해할 수가 없을것이다. 또 님들은 내가 하는 이말을 이해할 수도 없고 결국 허접한 비난 한마디 던지거나 돌멩이질을 할것이다. 장사란 어떤 목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그 값에 상당한 노력이나 값을 치루고 교환하는 과정을 이야기 한다. 예를 들면 넒은 의미에서 김 주영님은 어려운 공부의 시간과 비싼 등록금을 바치고 의사라는 직업으로 교환한 사람이다. 이 세상의 제도들은 다 그렇다는 말이다. 율법을 주신분도 하나님이시고 모세를 택한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모른다고 할 사람이 이 동네에는 한명도 없을 것이다. 그런대로 오실분의 표상이라는 의미로 허락하신 제도들이 그 제도에 인이 박히는 전통으로만 전락하는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셨다. 히브리 11장은 그런 제도에서 믿음이라는 절대적인 동앗줄을 잡고 살아난 이들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올려놓은 믿음장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적어도 장사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사도바울은 율법과 계명도 선하지만 그것을 잘못 이해함이 악하다는 말을 하고싶은 것이다. 나도 그러하다. 그 기능을 잘 이해하고 그것이 어떻게 온전하여 지는지를 잘 살펴서 그 온전함에 들어가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이다. 제사에 쓰일 짐승들을 며칠이 걸리는 먼길을 오는이들에게 적당한 값에 파는것 그 자체를 장사를 한다고 생각하고 채찍을 드신 예수님은 아니시다. 굳이 채찍을 들었는지 아니면 교훈적인 의미로 쓰여졌는지는 독자의 선택에 둘 일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장사의 본질은 예수의 십자가를 표상하는 그 짐승들이 십자가를 기다리는 표상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사고 파는 의미로 쓰여져선 안된다는 "길을 평탄케하는 선지자적인 기능" 의 측면에서 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의 기별속에 포함되는 의미심장한 깨우침이다 . 그런데 또 강도의 굴혈이란 무슨 말인가? 강도는 장사치보다 더 사악한 존재들이다. 노력하지 않은것을 그냥 얻거나 받아내는 행위가 아니고 빼았는 행위를 강도라 한다. 금을 얻기위해 금을 사용하는것은 장사의 행위이지만 금을 얻기 위해서 칼과 총을 사용하는것이 강도의 행위이다. 율법과 계명을그런 의미로 사용하는것을 한편으로는 장사치라 하고 또 한편으로는 강도라고 하는것이다. 계명을님과 또 석국인님의 생각은 바로 이 장사치와 강도들의 의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좀 더 설명하려 한다.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율법도 선하다고 하고 고린도 후서 3장에서 비록 죽음의 직분인 율법도 그 영광이 있다고 천명한다. 적어도 믿음과 복음이 오기전에는 말이다. 그 율법의 선함을 십자가 (복음)의 선함으로 바꾸려 하거나 대체하려는 행위는 장사치의 행위이고 그 율법의 영광을 십자가의 영광과 동일선상에 올려놓고 똑 같다고 소리지르는 그 행위는 강도의 행위이다. 요한복음 10장에는 예수님이 직접하신 강도에 대한 경고가 있다.
나보다 먼저 온자들이 누군가? 비록 하나님께로 온것이라도 먼저 온 것들 (장사치와 강도들)이 무엇인가?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우리눈에 밝히 보이거늘 그앞에서 하나님을 도와드린답시고 또 그분의 편에 선답시고 장사치의 근성을 드러내고 또 강도의 이빨을 드러내는 나중에 온 그대들은 과연 누구인고? 나중 온 자란 의미를 나는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처음도 나중도 모든것이 다 주께로 온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이제 십자가로 구원을 받앗으니 그 다음은 내가 해야지 또는 그 은혜를 갚아야지 또는 그은혜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지 라고 하는 신종 도둑질을 말함이다. 누가 그리스도인 답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가? 한번도 그런적이 없다. 장사로도 아니고 강도로서도 아니고 오직 은혜로 그리된다고 하지 않는가? 날강도들아! 장사치들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