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llbaram 님,
신학을 공부하셨다고 하시니,
사실 저보다 많이 읽으시고
많이 공부 하셨을 줄 믿습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말하지 않겠다"고
기함을 토한 바울이
왜? 이다지도 율법에 대해서 자기의 창자를 토해 내는 것 같은
말씀을 길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십자가로 가는 길이
바로 이 율법을 통해서 가는 길이기 때문이라 생각 합니다.
아니 유일한 길 일 것입니다.
왜냐?
인간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지 않으면,
무릎 꿇지 않으면,
도저히 하나님이 보이 질 않기 때문입니다.
탕자같은 입장이 되지 않으면,
아버지 생각이 나질 않은 이치와 똑 같단 말입니다.
우리를 탕자같이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보시십시요
탕자가 되어 울부짖는 저 율법학자
바울의 고백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곧 연이어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인간이 가장 낮아 지는 장소와 은혜받는 장소는 같은 곳 입니다.
24절과 25절을 같이 나열된 이유일 것입니다.
바로 이 접점이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요 순간입니다.
이 점까지 누가 끌고 왔습니까?
바로 율법 아닙니까?
돼지우리까지 누가 탕자를 끌고 왔습니까?
엄격한,
에누리 없는,
매정한,
경제 원칙,
Rule 이 아니였습니까?
21세기가 아무리 지성이 발달하고 깨였다 하더라도
21세기의 인문이 1세기의 지성을 따라 갈 수 없는 것은
그들은 철학을 논할 때 수학과 물리를 같이 논했기 때문이라 생각 합니다.
철학자들이 바로 수학자들이였고, 물리학자들이며 또 예술가 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거장들이 득실 거리던 아테네 거리를 활보 하고 다니던,
바울의 고백을 아직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축복입니다.
그 바울이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할 때는
이러한 거장들 앞에서 도 말이되는
그야말로 법의 원리로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21세기의 편향적으로 기울어진 단순한 휴머니즘 혹은 포퓰리즘 아니면
단순한 윤리관만 가지고 보기는 그 근본이 만만치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막치시고 두 돌비 앞에 놓으시고 쭈구리고 앉아서
인간을 기다리는 모습 상상해 보셨습니까?
"I will dwell among them" 라고 웨치시면서...
참, 초라해 보이죠?
좀도 자세히 한발자국 앞으로 가 보면,
한 손에는 자기아들 죽인 피 묻은 십자가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좀 으시으시해 보인다구요?
좀 도 자세히 한 발자국 앞으로 가보면,
그 하나님이 그 초라한 두 돌비 앞으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오질 못하고 계시더라구요.
인간이 두 돌비를 넘어 못가는 것 이상,
하나님도 그 두 둘비를 넘어 인간앞으로 나오질 못하셔서
두 돌비 앞에 쭈구리고 앉아 계신 다 이 말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모습 아닙니까?
더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인간이 두 돌비를 넘어 가서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죽을 것 같드라구요.
또 다른 편으로는 하나님이 이 두 돌비를 넘어 와서는 인간들이 죽을 것 같드라구요.
이 두 돌비를 치워버렸다가는 결국 인간만 박살 나게 되어 있더라구요.
이 두 돌비 그렇게 우습게 졸업 시킬 것이 아닙니다.!
한 때는 모세가 이 두 둘비를 확실하게 졸업시키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면서 날 뛰는 이스라엘을 보고 집어 던져 깨버렸지요.
"너희놈들은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줄 필요가 없는 놈들이라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야! 모세야 그러지 마라!
내가 그들을 못 만나면, 내가 죽는다.
제발 나를 위해 다시 만들어 다오!
네가 내 허락 없이 불경을 저지른 것은
내가 눈감아 주마!
이렇게 해서 다시 살린 십계명을
님들이 졸업시키겟다며.
이렇게 방방 뛰고들 있으니!
다시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율법의 physics
그렇게 만만하게 볼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초라하게 보이는 모세의 두 돌비
인간들이 그렇게 쉽게 졸업시킬 물건이 아닙니다.
소생이 해석한 로마서 7장 별것 아니지만,
편견을 버리시고,
찬찬히 다시 읽어보시고,
도움이 되기를 다시 한번 부탁 드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