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을님에게 드리는 로마서 7장에 대한 글

by fallbaram posted Sep 18, 2014 Likes 0 Replies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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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을님께-진정 사도바울이 토한것

나에게 하신 질문에 나름의 사견을 드리는것 보다 성경적으로 대답해 보려고 합니다.

얼마나 성경적으로 님에게 전달이 될지는 모르지만요.

나는 성경의 깊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이 아닌 다른 책으로 먼저 달려감이 적합하지 않다는 생각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질문자체가 철학적 또는 윤리적 그리고 이상의 어떤 다른 방향을 배제하고 오직 성경적인 내용만을 알고 싶다는 의지가 있다면 말입니다.

님의 나에게 보낸 질문속에는 질문이기 보다는 님의 사견을 가르치고자 하는 내용이 찐하고 우세해 보입니다.

 

아마도 그런 님의 글에 답하는 나의 대답이 상당히 길어질지도 모르지만 끝까지 통독하신 다음에 님의 의견을 개진해 주기를 바랍니다. 같은 문제로 고민하고 속상해 하는 누리꾼들도 그리하면 고맙겠습니다.

 

성경의 중요한 주제의 하나가

율법과 복음의 상관관계입니다.

시작점에서 주어진 두가지 방향이 에덴 동산의 중앙에 있었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와 생명나무 입니다.

하나님이 주신것이지요. 사단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배경에 서고 하나님의 명령은 나무에 접근하거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 최초의 계명이었습니다.

 

주제는 에덴 동산에서 추방된 이후에도 줄곧 어디선가 줄거리를 이어가는 선악간의 대쟁투로 이어져 내려가고 사단은 지금은 다른 형태로 변화된 선악과 뒤에서 그리고 하나님은 생명과 뒤에서 하나님의 형상에 이르는 길과 진리를 두고 서로 옳다고 싸워가는 전쟁이 선악간의 대쟁투라고 하는것입니다.

 

전쟁은 로마서 7장에서 말하듯이 우리 몸과 영혼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집단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교회안에서 일어나는 일인것은 당연한 사실이고요. 로마서는 대체적으로 우리 (개인의 역사)속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말하지만 요한 계시록은 세상의 역사속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말하는 차이

뿌리는 같은것입니다.

 

어떤 교회는 지구의 역사적인 장에서 벌어지는 전쟁에만 시선을 소비하다가 자신들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싸움을 놓지는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어느 쪽이든지 개인적이던 역사적이던 이기는 쪽은 결국 어린양 (생명과) 붙드는 자들이지만 몸속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세상의 역사속에서 일어나는 전쟁중에서 소위 심판이라는 내용이  처리되는 과정이 다르다는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첫째 아담에서 둘째 아담으로

모세에서 예수로

썩어질 것에서 썩지 아니할 것으로의 발전입니다.

비약하자면 (이것 잘못 알아들으면 돌멩이가 와장창 날아 )

선악과에서 생명나무로의

발전입니다.

 

침례라는 과정에도 과정이 분명하게 들어 납니다.

먼저 (말씀)속에 장사 (죽고 망하는 경험) 되는 내려감이 있고 다음에

성령으로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과정이 영적인 침례가 아닙니까.

 

선택된 이스라엘이 뜬금없이 거쳐가는 과정이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도 반복이 되었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캄캄한 애급으로 들어가서 광야를 거쳐 가나안 (빛의 -약속의 ) 으로 들어가는

과정이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하나님의 구속의 청사진입니다.

야곱도 하나님이 불러내지 않은 삼촌 라반의 땅으로 되돌아 가서 문화의 분신인 여자를 만나고

약속의 땅으로 함께 가는 여정을 통과했고   과정인 얍복강 (요단강의 줄기)에서 악한 지체 (속이는 ) 벗고 다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거듭남으로 이땅의 원수인 에서를 만나 무사히 약속의 땅에 이르는  이야기 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의 여섯날들이 저녁 (어둠으로 시작하는) 아침 () 리듬으로 가다가 이룬날 안식일에는 저녁에 관한 언급이 사라지는 것도 이런 리듬과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비움이 있은 후에 채움이 있는것이 우리가 믿는 신앙의 도리입니다.

 

그러하나 세상의 역사속에서 일어나는 선악간의 쟁투 사이에는 이런 과정이 포함되지 않고 오직 심판 ( 세상 임금의 종말) 으로 치닫고 있음이 다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세기 3장의 선고 공판에서 회복의 약속이 주어진 사람과는 달리 옛뱀 사단에겐 머리를 상하는 결말 (오직 심판만)이 선고된것 처럼 말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후에 다시 보냄을 받은 보혜사 성령의 역할 (요한 복음에 나타나는) 사람에게는 죄를 묻고 사단에게는 심판만을 묻는 내용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율법은 죄인에게 죄를 묻는 과정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출애급기의 명령은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엔


안식일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입니다.

 

그것을 신약의 저자인 사도 바울은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또는 정죄의 직분

이라고 일컫습니다.

 

이런 과정을 석국인님이나 계명을님이 부분적으로는 이해하고 있는듯 해 보이지만 그 과정을

전체적으로 그리고 기능적으로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다소 익지 않은 햇과일 같아 보이는 부분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하나씩 하나씩 첫째 아담으로 하나님께 서야 하는것이고 그 과정에서 아담에게

물었던 시험과 선고를 똑같이 경험하여야 예수가 우리의 개인의 구주가 되실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죽게하는 의문의 율법이 그 자체로는 영광이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죄를 묻는 그 과정이 또 다른 더 나은 과정으로 가는 영광이라는 의미를 말합니다.

 

아래와 같이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는 길!!!
율법에서 복음에 이르는 길!!!
그 길을 죄인에게는 허락하시고 사단에게는 차단을 하신 것입니다.

필경은 죽으리라는 선악과의 결말.
반드시 죽일지니라의 십계명의 결말.
그것을 뒤집고 닥아오는 다른 영광.
더 나은 영광.
온전한 영광.
이 영광의 빛을 받은자는,
이 영광의 두루마리에 옷 (행실)을 빠는 자는,
이 영광에 그 전 영광으로 죽은 내 몸을 맡긴다면,

우리는 필경 그리고 반드시 살것이라는 선언이 복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출애급후에 광야에서 맞는 오순절날에 옛 이스라엘은 이 죽음의 직분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아 온) 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숫자가 삼천이라고 써 놓았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오순절에 성령이 오셔서 그 삼천을 살리는 역사가 벌어집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죗된 육신으로는 그리고 말씀으로는 지킬 수 없는 율법의 저주에서 죽은 우리를
오히려 죗된 육신이기 때문에
오히려 죽었기 때문에
살려 주시는 은혜
그것되에  다시 무슨 계명이 주어졌는지는 아직 성경에서 명확하게
찾아내지 못해서 나는 지금도 계명계명 하는 님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금할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 (율법)를 통해서 죄인들에게 죄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십자가 (생명나무)를 통해서 죄인들에게 의를 물었습니다.
이 과정과 기능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우리는  문자적인 해석에 갇히게 되고 뒤죽박죽이 되는 저주의 율법을 마치 하나님을 사랑하는표로서 끌어안게 된것이고요.

비록 계명과 율법이라는 단어가 님들의 눈에 그렇게만 보이더라도 문맥을 찾아 들어가서 그것이 그런가 진정 살펴보는 베뢰아의 신사들이 되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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