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때 안식일교인 지금의 아프리카 안식일교인
6.25의 잔상과 함께 시작한 내 어릴 때 추억들
전쟁터에서
파괴된 도시에서
부산에서 여수로 가는 여객선 안에서
상이군인은 넘쳐 나고
쇠갈고리 손목에 걸린 껌 조각을 안 사면
눈을 찌를 듯이 손을 치켜들던 그 시절
돌이켜보면 참으로 민망하게 짝이 없는 시대였다
하루 세끼 먹는 게 자랑이던 시절
그렇게 산천을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사람들로 뒤범벅이 되던 시절
정치는 자유당 말기에 이르러
부패는 하늘을 찌르고
못 살겠다 갈아보자 라는 단어가 대선의 구호였던 시절
이 땅에 구호품 교인들이 엄청 많이도 생겼다
지금은 살맛난다고 떠들지만
지금은 교단이 부자가 됐다고 야단하지만
사실로 말하자면 신발주머니 가지고 다녔던 그 시대가
사람들 참 정겨웠고 풀빵 한 조각을 나눠 먹어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다들 좋은 아파트에 살면서
여름 겨울이 바뀌는 계절을 거실에서 보내면서
우리는 그런 생각들을 까마득한 옛날 일로 치부한다
그 시대 재림을 기다리며 얼마나 흐뭇했는지 아는가?
지금 그게 깨어지면서 얼마나 절망하는지 그대들 목회자들은 아는가?
481구호품인가 하는 것은 천주교회 안식일교회가 독차지 했다면서
깨끗한 교회라서 준 것이라 했다면서
그것 팔아서 교회 짓고 수리하고 재주 좋은 이들은 땅 사고 치부하면서
재림은 그 당시에도 물 건너 간 것 같았다
그러면서 단에 서면 이 시대 안으로-이 시대가 누구시댄 줄은 잘 모르지만-
재림이 이루어진다고 떠들었었다
물론 그 때 우리는 무식했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가르치면 그대로 답습하던 시대였다
설교하다가 말문 막하면 예언의 신이란 글자로 땜방해도 아무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정치적 암흑기와 종교적 암울기가 같이 가는데도 우리는
정치적 암울기만 생각하고 살았다
그까짓 것 재림 하면 다 해결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것은 하늘이 해결해 주고
구원 받는 것도 하늘이 해결해 주고
우리는 그저 그의 백성으로 존재가치만 잔뜩 쌓아가고 있었다
세월 지나 교단에는 아프리카에 교인들이 벅적인다
6.25 참상으로 폐허된 나라에서 구호품으로 벅적이던 것과 대동소이하게 말이다
그 때의 한국이나 오늘의 아프리카 교인이 다른 것 무얼까?
미국에서 온 선교사가 한국의 현실을 늦은 비 성령의 결과라고 보고해도
그게 자랑스럽지 않았던 것과 오늘의 아프리카 선교가 무엇이 다른가?
그렇다 분명 다른 것 있는데
그 때 우리는 믿음보다 율법이 우선이었고
지금의 아프리카는 행함보다 믿음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지금 그들에게 채식이니 안식일 시간표니 하는 것 없다
그저 믿는다면 다들 물속으로 들어가고 나오면 예전으로 돌아간다
복음은 같은 것인데 나라와 백성과 방언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가 복음의 해석을 골고루 해 좋은 것이다
그럼 율법의 저주로 예수의 십자가를 발견하는 우리 같은 재림교인과
믿음으로 발견하는 아프리카 재림교인들 사이에 무슨 차별이 있는가?
르완다의 투치와 후투족의 전쟁 속에서 재림교인의 인간성까지 말살했던 기억들이
율법의 의로 구원이 아님을 알게 해 준 것 아닐까?
인간의 잔인함 속에 숨어 있는 하찮은 믿음
인간의 사악함 속에 숨어 있는 율법주의적 신앙
짧은 인생을 투자하고 영원을 얻는다는 거짓된 사상들이
아프리카에서부터 울음을 삼키고 돌아다닌다
율법이 죄를 지적해 줘서 십자가를 바라본다고?
우린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가르쳤고 그렇게 믿었다
그게 오늘을 돌이켜보면 말짱 도루묵이란 것을 알게 해 준 것이
바로 전쟁이라는 참상이었다
그 앞에서는 신앙도 지식도 인간적 유대도 필요 없었다.
목사도 목사를 죽는데 내어 줬고 그들 따라서 눈치 보던 교인들도 그렇게 했다
이게 율법주의적 신앙이냐 아니면 복음적 신앙이냐를 떠나서
인간은 자기부터 살고 본다는 논리가 더 설득력을 가진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 천국은 뭐냐?
그건 사상누각이다
인간의 현실 저 멀리 솟아있는 보일 듯 말 듯한 상상속의 탑일 뿐이다
그걸 얻기 위해서 오늘 우리는 율법적이어야 하고 복음적이어야 한다고 떠들고 있다
지금 아프리카 신앙을 욕할 사람 있냐?
그들 하루 한 끼 밥과 맑은 물 한 모금의 더 소중한데
율법적인 신앙을 포함해서 채식, 십계명 준수, 뉴스타트니 하는 고등학문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십자가를 봐야 한다
그런데 그 십자가는 죄인이어야 하고 죄인이 아니면 죄인인척이라도 해야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오늘의 한국어를 사용하는 재림교인들처럼 믿어야 한다고 보시는가?
나는 이 70평생을 살아오면서 이렇게 앞뒤 막힌 교인들 하고 부대끼면서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을 본 것은 오직 예수라는 단어였는데
그것까지도 율법에서 죄인된 것을 아는 자 만의 것이라는데 놀란다
채식이니 안식일 준수니 하는 자질구레한 것에 얽매인 한국의 재림교인들을 바라보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그 당시 우리보고 뭐라고 했을까?
단위에만 서면 마28:18-20 행 1:8만 줄 곳 가르치던 그들이
사실 잿밥에만 관심 있고 제사는 관심 없던 무리들 아닐까 하는 생각을
난 평생 하면서 살아왔다
아프리카 재림교인들은 구원이 없다고 말하고 싶겠지?
나 같이 믿는 사람에게도 구원 없다고 하는 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아마 주님은 우리들 중의 누구에게
넌 몰라! 본 적도 없어 할지도 모른다
아프리카처럼 믿어도 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난 오늘도 행복하게 안식일을 기다린다
혹시 밥 한 그릇 줄 교인들 있을까 봐서다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 아니라고? 굶어봐라 뭐가 보이나?
충무의 동호동 앞바다의 물결이 눈가에 찰랑거리고 있습니다
이 모목사님과 한국판 화잇이라 하던 그 사모님과 그 부대원들도 생각이 납니다.
지금도 설교의 마지막엔 꼭 증언으로 도장을 찍고
교과시간엔 증언이 최고의 권위로 시퍼렇게 살아있슴다.
그러나 아랑곳 하지않고 열심히 예수를 믿고 삽니다.
선배님의 그 강렬한 산타기의 건강을 늘 부러워 하면서
율법이 죄를 지적해 줘서 십자가를 바라본다고?
에라이 메뚜기 같으니라고?
에라이 날강도 같으니라고?
에라이 미꾸라지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