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자기 파괴적 탐욕으로 부터 해방시켜 존재의 기쁨과 안식을 누리는 자유를 부여하려는 일관된 의지가 십계명 안에 현실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나열되어 있다.
십계명은 인간을 억압하고 구속하는 율법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백성을 종 되었던 땅 애굽으로부터 해방시킨 존재가 그들에게 보다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자유, 곧 신을 떠난 인간의 죄성으로부터 해방되는 자유를 부여하려고 내린 '자유의 선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십계명은, 계명을 내리면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이 되어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20:2)라는 말로 자신을 일컬어 자유를 선언하는 자로서 다시 한번 강조하여 밝힌 신의 의도와 합일 할 수 있다.
또한 자신과 복음을 부단히 구약과 연결하던 예수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라고 한 말이나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갈6:13)라고 한 바울의 입장과도 모순 없이 연결된다.
오늘날 십계명 해석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신학적 연구들은 마틴 노트, 폰 라드, 마도 로흐만 그리고 무엇보다 프랑크 크뤼제만의 작업들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이 십계명에 대해 취하는 입장은 한결같이 십계명의 본질이 자유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노예로 살던 땅 애굽에서 그의 백성들을 해방시켜 사회적 자유를 부여했던 신이 이번에는 그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해방시켜 존재의 자유를 부여하려고 십계명을 주었다.
때문에 십계명은 인간을 더욱 죄에 빠뜨리는 '죽이는 문자'도 아니고 '사회적 자유의 보존을 위한 선포'도 아니며 오직 '죄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선포' 곧 우리가 '존재의 자유'라 이름 붙인 '신적 자유'를 위한 선포라고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적 해석에 가장 적합하다.
(십계,키에슬로프스키 그리고 자유에 관한 성찰 데칼로그 19-23 쪽)
계명이나 율법에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표준이 높아 보이는 것은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그만큼
표준이 낮아 졌다는 말도 되지요. 완전한 상태에서 타락한 후 6천년이나 지났는데 오죽하겠습니까?
그런데 신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은혜만 믿으면 쉽게 의인이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