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들들이 어린시절에는 전쟁 영웅들이 나오는 영화라면 픽션이던지
논픽션이던지 가리지 않고 좋아했고 gladiator 같은 영화는 아예 CD 를 사다놓고
시도때도 없이 보던 기억이 난다.
그놈들이 보던 영화중에 스파르타커스 라는 영화가 있었다.
전쟁에 패한 로마에 노예로 잡혀가서 반란을 선동하던 어느 작은 나라의 왕자였는데
그가 반란에 실패하고 그와 함께하던 직속부하와 처형을 당하게 되는 장면에서
나도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의 장면이 하나있디.
반란을 평정한 로마 8(?) 군단의 군단장이 둘중 하나는 십자가형으로 처형한다는
방침을 알려 주었다.
그 십자가 형에 상대를 내어주지 않기 위해서 둘은 갑자기 무슨 원수나 되는것처럼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싸움을 벌인다. 부하를 사랑한 나머지 그에게 그 참혹한 십자가를
면하게 하려는 왕자의 심정과 그가 섬기던 왕자에게 십자가의 끔찍한 형벌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두 지극한 사랑과 인심의 칼이 부딪히는 장면은 아들들의 방에서 훔쳐본 영화이지만
이십년이 가까이 흐른 지금에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장면이다.
십자가 형벌은 고대 페니키아인들에게서 발전된 형벌인데 그 고통의 질과 양 (긴 시간)이 실로 엄청나다.
이 형벌의 질과 양을 이해함이 우리의 믿음이라는 근본에 결정적인 도움은 아니되겠지만 이 형벌을 이해함이
우리입으로 가볍게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 하지 않을 수 있는 숙연함은 될것이다.
조금만 움직여도 달려있는 몸무게의 하중으로 못을 박은 곳의 고통은 상상할 수가 없고
횡으로 된 나무위에 팔을 올려서 비틀어 못을 박았기 때문에 쉽게 호흡을 하기가 어려웠다.
사지가 못에 박히고 호흡도 수명 유지에 가장 미니멈의 호흡만 할 수 있어서 사실상 그 고통의 무게는 엄청난 것이고
어떤 사형수는 일주일도 그 고통으로 십자가에 달려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로마는 그러하기에 자국의 시민은 절대로 이 형틀을 사용하지 않았고
반역 이상의 극악한 죄인들에게만 적용한 사형 방식이었다.
때로는 나는 이 형틀에 못박혀있는 상태에서도 지금의 민초에서 일어나는 이런 이야기를 자신있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도 내 자신에게 해 보기도 한다.
예수와 함께 못박힌 다른 두 행악자가 있었다.
로마사람들이 보는 행악과 유대인들이 보는 행악과 믿음이라는 차원에서 보는 행악이
삼교차하는 그런 곳이다.
예수와 함께 못박히기를 그리도 갈망하는 우리도 기왕에 그 자리에 어떤 행악자로 한번 서보도록 하자.
오른쪽이었는지 왼쪽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하나는 그 고통 (육신을 휘감는) 에서 떠날 수 없는
행악자였다. 예수에게 청한 그의 기도는 지금의 이 육신이 겪고있는 고통에서 당신도 벗어나고 나도 벗어나자는
일차원적인 기도였다. 우리 함께 이 못박힘에서 벗어나자는 주문이다.
그러나 다른 행악자는 같은 고통속에 있으면서도 그 못박힘 넘어에 지금의 육신을 넘어서서 다시 오는 나라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지금의 고통을 포기하고 그 나라와 그 낙원에서 함께 못박힌자와 (예수)의 새 삶을 선택했다.
나라면 그런 믿음이 거기에서 꽃필 수 있겠는가?
또 당신이라면?
불타는 정욕에 왜 그리도 마음을 빼앗기고 사는가?
그것을 고친다해도 여전히 불타오를 또 다른것이 있다.
왜 기독교적 진화론에 마음이 온통 바쳐지고 있는가?
예언은 그 나라와 그 의를 가리킴이요 기다림이다.
그 나라는 한 행악자의 육신에 각인된 과거 때문에 가지 못하는 나라가 아니요
그 행악자가 현재의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육신을 떠나서 그분의 나라를 바라본 그 간절하면서도
확실한 믿음의 간증 때문이다.
이 행악자가 율법의 마침이라고 하는 십자가 상에서 예수와 더블어 율법을 졸업한 제 일기생이다.
나는 그의 행악이 가증스럽지 않고 그의 그 믿음이 너무나 부럽다.
정욕이 불타지 않아도
오호라 나는 언제나 곤고한 사람이로다.
우리에게는 삶의 시간이 남아있으니 면제생이 될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