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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9/14) 설교다.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 설교 시리즈 6탄이다. 음성설교에서 얘기했듯이 같은 주제로 하는 설교가 이제 슬슬 지겨워지고 있다. ^^

 

덜 지겨워지려고 드라마 얘길 한 건 아니다. 몇 년 전에는 그랬지만 지금은 안 그런다. 우선 영화나 드라마를 그때처럼 많이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 드라마 얘길 한 건 드라마를 보면서 '계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계시'라고 하니까 무슨 거창한 얘긴 줄 알면 곤란하다. 중요하긴 하지만 거창하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받은 '계시'가 성경 얘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긴 했다.

 

이번엔 석 주 동안 읽기만 하고 설교는 하지 않았던 마가복음 9장에 대해 설교했다. 예수께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 들린 아이를 고친 이야기 말이다. 복음서가 귀신 들렸다고 전하는 얘기 대부분은 정신질환에 관한 얘기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걸로 다 설명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거기엔 중요한 상징들이 숨어 있기도 하다.

 

나를 악마가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 있다고 믿는다. 설교 말미에 그것이 뭔지를 얘기했다. 그러니까 그게 뭔지 알고 싶으면 이 긴 설교문을 끝까지 읽으셔야 하겠다. ^^

 

이런 긴 글을 어떻게 매주 쓰냐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게... 하지만 이런 생활을 20년 넘게 해왔더니 이젠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한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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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4일 / 성령강림절 열여섯 번째 주일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 6

마가 9:14-29

 

곽건용 목사

 

계시를 받다!

 

두 형제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어머니와 의붓아버지가 있습니다. 의붓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어머니와 형제를 때리곤 했습니다. 그래서 형은 어긋나갔고 맘 약한 동생은 그런 형에게 자주 얻어맞았습니다. 그 날도 의붓아버지가 어머니를 흠씬 두들겨 팬 다음 형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동생은 그렇게 얻어맞는 어머니와 형을 보다 못해 우발적으로 의붓아버지를 칼로 찌릅니다. 사실은 동생이 아버지를 찌른 게 아니라 아버지가 칼을 들고 있는 동생에게 쓰러진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아버지는 정신을 잃었고 정신을 차린 형은 동생의 피가 묻은 칼에 자기 지문을 마구 묻힌 후 자기가 찌른 걸로 하자고 합니다. 자신은 이왕 막 살았으니 2-3년 감옥살이하고 나오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어머니와 형제는 집에서 도망쳐 나오는데 그 전에 어머니가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정신을 잃은 아버지는 집과 함께 불에 탔습니다.

 

나중에 아버지는 질식사한 걸로 판명됩니다. 칼을 맞아 죽은 게 아니라 연기 때문에 죽었다는 겁니다. 불을 지른 사람은 어머니였으니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인 셈이지요. 하지만 동생은 형을 범인으로 지목합니다. 어머니가 너무 불쌍해서 어머니를 감옥에 보낼 수는 없었던 겁니다. 형은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11년 동안 감옥생활을 합니다.

 

감옥 밖의 어머니와 동생인들 어떻게 정상적인 삶을 살았겠습니까. 어머니는 해리성정체장애(解離性正體障碍, Dissociative Identity Disorder)를 앓아 사고 당시의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동생은 유명한 작가가 됐지만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은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한 고등학생이 자주 나타나서 그와 얘기도 나누고 여러 가지 일들을 같이 하는데 사실 그 학생은 실제 인물이 아닌 환상 속의 인물입니다.

 

지난주에 끝난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의 일부 줄거리입니다. 이 드라마는 제가 아직까지 본 드라마들 중에서 가장 좋은 작품 몇 개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계시’를 받았습니다. 자주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 설교 시리즈를 생각해 왔기 때문인지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셔서 ‘계시’를 내려주신 모양입니다. 제가 받은 계시는 이런 겁니다.

 

드라마에서 동생이 자기가 환자임을 인정하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형이 출소해서 동생을 면회하러 왔습니다. 그 전에 동생은 자기가 번 돈을 모두 형 앞으로 돌려놓았습니다. 형은 이 사실을 알고 동생에게 왜 그랬냐고, 자기를 감옥살이 하게 해서 미안해서 그랬냐고 따져 물었지요. 이에 동생은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합니다. 그러자 형이 동생을 때려눕힌 후 그를 짓밟으면서 이렇게 소리칩니다. “뭐가 미안한데, 대체 뭐가 미안한데?” 형은 뒤늦게 병실로 뛰어 들어온 경비원에게 끌려 나가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그럼 난 판사에게 ‘엄마가 죽였어요.’라고 말했을까봐? 넌 미쳐도 싸. 너만 엄마 뱃속에서 나왔냐? 나도 엄마 뱃속에서 나왔어!”

 

저는 생각해봤습니다. 이 장면에서 작가가 보여주려 했던 것은 뭘까? 동생은 형의 겉모습만 봐왔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아무한테나 함부로 ‘미안하다’고 말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을까? 형이 그 상황에 있었다면 형도 동생처럼 어머니를 보호했을 거란 얘긴데, 그게 왜 미안한 일이냐는 걸까? 미안해하는 데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나는 미안해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하려는 이기적인 말일 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작가의 뜻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형이 동생에게 한 말이 하나님의 계시로 들렸습니다. ‘아, 그렇지! 나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지. 너도 하나님의 아들이고 저 사람도 하나님이 딸이지.’ 그런데 왜 저는 그동안 이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아니,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가슴으로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왜 우리는 지금껏 나와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미워할까? 나와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와 종교가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왜 그토록 미워했을까? 저만 엄마 뱃속에서 나온 게 아닌데, 그들도 엄마 뱃속에서 나온 엄마 자식들인데 말입니다. 하나님은 저만 세상에 내보내신 게 아니라 그들도 저처럼 곱게 빚어서 세상에 내놓으신 하나님의 작품들인데 저는 왜 저만 그렇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을까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왜 그래야 하는데?

 

칼 라너(Karl Rahner)라는 가톨릭 신학자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20세기에 가장 영향력이 큰 가톨릭 신학자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가 1970년대에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이란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실제론 그리스도인이지만 그렇게 불리지 않는 사람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없는 그리스도인, 이름표 없는 그리스도인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라도, 또 교회에 속해 있지 않을지라도 실제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 사실상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으로 그는 이 말을 썼습니다. 라너에 따르면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교 아닌 다른 종교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심지어 무신론자들 중에도 있다는 겁니다.

 

이 얘기는 당시엔 매우 획기적이고 충격적인 얘기였습니다. 보수 쪽 사람들이 난리가 난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지요. 그들은 그러면 예수를 안 믿어도 된다는 얘기냐, 예수 믿는 것 말고도 구원 받을 길이 있다는 얘기냐,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얘기냐면서 라너를 성토했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적어도 가톨릭교회에서는 그런 논란이 잠잠해졌고 대체로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데 익명의 그리스도인 얘기는 요즘 들어와서 새롭게 비판받고 있습니다. 이번엔 보수 쪽이 아니라 진보 쪽에서 이를 비판합니다. 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람에게 굳이 그리스도인 이름표를 붙이려는 거냐, 그러면 그리스도인이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행하는 사람은 ‘익명의 불교인’이라고 불러야 하냐는 겁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그리스도 중심주의적 발상이라는 것이지요. 일리가 있는 얘기죠. 그러니까 굳이 ‘익명’이란 딱지를 붙이지 않아도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고 같은 엄마 뱃속에서 나온 자식들이란 겁니다.

 

좌우간 저는 드라마를 보면서 저 자신에 대해서 화가 났습니다. 제가 교회 다닌 지 40여 년이 됐습니다. 40년이 짧은 세월입니까. 저는 40년이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왔으면서, 그 중에 절반을 목사로 살아왔으면서 왜 아직 이 모양 이 꼴인가 말입니다. 왜 저는 드라마를 보고서야 모두가 엄마 뱃속에서 나온 한 자녀란 사실을 깨닫고 가슴 치는가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 자신에 대해서 엄청나게 화가 났습니다. 운동을 멈추고 밖으로 나와서 서성거리며 화를 가라앉혀야 했을 정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라더니 정말 그런가봅니다.

 

탄식하신 예수님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병자를 고친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들 중에는 시각장애인도 있었고 앉은뱅이도 있었으며 혈루병 환자와 나병환자도 있었습니다. 정신병 환자들도 있었습니다. 복음서가 ‘귀신들렸다’라고 말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정신병자였을 겁니다. 이런 병자들 중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뭔가도 있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칠 때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예수께서 특별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병자 스스로 예수께 왔거나 누군가가 병자를 예수께 데려오는데 이때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않거나 몇 마디 말을 나눈 다음에 바로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병자를 꾸짖거나 정죄하시지 않았는데 이것이 놀라운 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질병이 하나님의 징벌이나 저주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병자를 두고 무엇 때문에 그가 병을 앓는지를 따지고 그 사람이나 가족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곤 했다는 사실에 비추어보면 예수께서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제자들이 병자를 꾸짖은 경우는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자이며 거지였던 바디매오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자기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그를 꾸짖었지만 그럴수록 그는 더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불러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밖에 예수께서 병자를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구를 불쌍히 여기셨냐고요? 당연히 병자를 불쌍히 여기셨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씀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시리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탄식’하신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마가복음 9장 본문이 그런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이 귀신 들린 자기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려왔습니다. 아이는 말을 못하게 하는 귀신이 들려 있었답니다. 귀신이 아이를 사로잡으면 아이가 거꾸러지고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진다는 겁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마가복음 저자는 이 병자가 귀신에 사로잡히면 ‘거꾸러지고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진다’고 썼습니다. 물론 실제 그런 모습을 보이기도 했겠지만 여기엔 상징적인 의미도 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거꾸러짐은 무력함을, 이를 갊은 원한이나 보복을, 몸이 뻣뻣해짐은 마비 증상 등을 가리킨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 사건이 한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고 추측합니다. 병의 원인이 복합적임을 보여주는 얘기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 사건은 한 개인의 병과 그 치료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는 얘기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에 대해 자초지종을 듣고 이렇게 탄식하셨습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언제까지 너희와 함께 있어야하겠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에게 참아야 하겠느냐?”

 

저는 궁금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탄식’하셨을까요? 이것은 그냥 힘없이 내뱉은 탄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화가 나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분노하고 계신 겁니다. 본문은 드러나게 그렇게 쓰진 않았지만 여기선 예수님의 분노가 분명히 느껴집니다.

 

왜, 대체 왜 예수님은 화가 나셨을까요? 무엇 또는 누구에게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걸까요? 병자가 끊임없이 몰려왔기 때문일까요? 병자들 고치는 것이 힘들고 귀찮기 때문일까요? 정말 그랬을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대체 예수님은 왜 화가 나셨을까요? 이런 물음을 갖고 좀 더 읽어보겠습니다.

 

귀신 들린 아이가 예수님 앞에 왔습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보자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땅에 넘어져 거품을 흘리면서 뒹굴었다고 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답니다. 귀신이 아이를 죽이려고 여러 번 불 속에도 던지고 물속에도 던졌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귀신은 아이를 죽이려 했던 겁니다. 하지만 그를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귀신이 아이를 죽이지 못할 정도로 약했기 때문일까요? 그럼 그게 무슨 귀신입니까. 귀신이 사람 하나 못 죽일 정도로 허약하다면 누가 귀신을 두려워하겠는가 말입니다. 아이 혼자서 귀신과 싸웠을까요? 아니면 누군가가 그를 도와줬을까요? 아이와 도와주는 이의 저항이 워낙 강해서 아이를 죽이지 못했을까요, 아니면 귀신 나름의 의도가 있어서 그를 살려뒀을까요? 자세한 내용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이는 거의 망가진 상태였을 거란 사실입니다. 그는 죽지는 않았지만 살아 있다고도 말할 수 없는, 몸과 정신과 영혼이 거의 파괴된 상태였을 겁니다.

 

아이 아버지는 예수께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라며 사정했습니다. 그랬겠지요, 왜 안 그랬겠습니까. 자기 자식이 귀신 들려 죽어 가는데 아버지가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이 대목에서 세월호 참변에서 죽은 아이 부모들이 떠올랐습니다. 바다에 잠기는 배 속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바라만 봐야 하는 부모들 말입니다. 아이 아버지는 자식이 낫는다고만 하면 뭐든지 하려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뜻밖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이전에는 보였던 적이 없는 전무후무한 반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라며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는 겁니다. “할 수 있으면…….”은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뜻으로 읽히기 때문에 널리 사랑받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부드럽게 하신 게 아니라 ‘버럭 소리를 지르셨다’고 했습니다. 역시나 예수님은 화가 나 있습니다. 그러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셨던 겁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큰소리로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외쳤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악한 귀신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벙어리와 귀머거리가 되게 하는 귀신아, 내가 너에게 명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말아라.” 이 귀신은 수시로 아이에게 들락날락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말라.” 하셨겠지요. 귀신은 소리를 지르고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켜 놓고 나갔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죽은 듯이 누워있어서 사람들은 모두 그가 죽은 줄 알았지만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서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섰다고 했습니다. 해피엔딩입니다. 하지만 에필로그가 없을 수 있습니까. 제자들이 예수께 따로 와서 왜 자기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냐고 묻자 예수님은 “이런 부류는 기도로 쫓아내지 않고는 어떤 수로도 쫓아낼 수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주제인 ‘기도’가 등장합니다. 똑같은 사건을 전하는 마태는 ‘기도’ 대신 ‘믿음’이란 말을 썼지만 학자들은 ‘기도’가 더 본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로만 할 수 있다!

 

기도가 뭡니까? 복음서도 그렇고 현대 기독교인도 그렇고, 그 동안 우리는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았다, 병자를 고쳐줬다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춰서 이 얘기를 읽어왔습니다. 그래서 ‘와, 역시 예수님은 못 하시는 일이 없어!’라고 감탄하거나, 아니면 ‘이런 일을 하는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라는 데만 초점을 맞춰서 이 사건을 읽어왔습니다. 우리가 소홀히 했던 부분은 ‘이 아이는 왜 귀신이 들렸을까?’ 하는 점입니다. 요즘말로 표현하면 ‘무엇이 이 아이를 정신적으로 병들게 했을까?’ 하는 점은 파고들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의학에서 병을 치료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방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신앙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문제가 생기지 않게 예방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저는 신앙의 문제가 생기지 않게 예방하는 방법으로 남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자고 제안합니다. 너무 싱겁다고요? 맞습니다. 누구나 다 아는 싱거운 대답입니다. 하지만 이것 이상의 좋은 답이 어디 있겠습니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많은 질병이 ‘미움’에서 나옵니다. 남을 미워하는 데서 병이 생긴다는 겁니다. 미움을 버리지 못하면 남도 아프게 하고 자기도 병이 듭니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가 이 사실을 참 잘 보여줍니다. 거기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아픕니다. 모두 환자입니다. 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미덕은 환자가 환자를 치료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 등장인물 모두 아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남의 아픔에 무감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병보다 남의 병에 더 민감합니다. 남의 아픔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하지만 조심스럽게 남의 아픔에 다가가서 손길을 내밉니다.

 

사람이 완벽하게 건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미움을 갖고 살아갑니다. 신학적으로 어떻게 규정하든 이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본성 같은 겁니다. 미움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남을 미워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사람의 약점일 수 있습니다. 악마는 이 약점을 파고듭니다. 어떻게? 악마가 사람의 미움을 증폭시킬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악마는 사람이 갖고 있는 미움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사람 영혼을 사로잡습니다. ‘그래, 맞아, 네가 그 사람을 미워하는 건 정당해. 그는 네가 미워할만한 사람이야. 어떻게 이런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니. 그런 사람은 미워해도 괜찮아. 아마 하나님도 그를 미워할걸?’ 악마는 이렇게 우리는 유혹합니다.

 

찰스 킴볼이라는 비교종교학자는 《종교가 사악해질 때》라는 책에서 종교가 사람을 구원할 수도 있지만 다음의 다섯 가지 증상을 보일 때는 사람을 망치는 사악한 괴물로 둔갑한다고 했습니다. 첫째로 자기 종교만 절대적인 종교라고 주장할 때이고 둘째는 맹목적인 순종을 강요할 때이며 셋째는 ‘이상적인’ 시간을 정해놓을 때이고 넷째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할 때이며 다섯째는 신의 이름으로 성전을 선포할 때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하지만 더 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가 사악해지는 때는 ‘남을 사랑하기를 멈출 때’이고 ‘남을 미워할 구실을 찾았을 때’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남을 미워할 ‘정당한’ 이유를 찾았을 때 여러분은 이미 악마에게 사로잡혀 있는 것이란 사실 말입니다. 그때는 온 힘을 다해서 기도해야 하고 혼자 힘으로 안 되면 믿음의 벗에게 기도해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


노란 배경색상은 퍼온이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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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indwalker 2014.10.16 19:38
    (마 22:39)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다 아는 이 구절이 가장 어려운 말씀이었는데,
    역설적인 착안점이 insightful 합니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부처 너머 부처를 보게되니,
    (요 8:32)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 ?
    엘로우 2014.10.16 20:28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람들
    1.박근혜를 비롯한 권력자들(알고 보면 너무 불쌍한 사람들이다)
    2. 재림 교회 지도자들
    3.민초에서 막말하거나 댓글 다는 사람들
    ........

    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합시다.
  • ?
    평화 2014.10.16 20:36
    이 설교를 교황이 읽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을 핍박하지 말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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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31 재림운동 안하고도 재림성도인가? 2 김운혁 2014.10.16 377
9130 민초 스다에 역사하는 섭리 5 봉하마을 2014.10.16 444
9129 최악의 리더(대총회장과 한국연합회장) 5 리더 2014.10.16 528
9128 주님과 같이 1 아침이슬 2014.10.15 591
9127 동아일보 “아사히 사태 입다문 日언론… 한국언론 비판정신 배워라” 엄마아빠 2014.10.15 463
9126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박근혜 대통령 ... 부끄럽다" [이대근 칼럼] ‘산케이 사건’ 본질을 직시해야 엄마아빠 2014.10.15 572
9125 여러분은 국정원을 믿으십니까? 2 음지 2014.10.15 471
9124 한국연합회장님은 쿠바에 한 번 다녀올 일이다. 10억?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6 김원일 2014.10.15 655
9123 예언의 신 책을 내다 버렸다.그리고 행복하다. 5 예언의신책을내다버리다. 2014.10.15 527
9122 김운혁님께. 7 2014.10.15 429
9121 박근혜 대통령과 프란치스코 교황간 '두 달만의 재회' 1 보인다 2014.10.15 477
9120 미주 한인 안식일 교회들은 망했다! 7 truesda8 2014.10.15 597
9119 세월호 유가족의 6개월과 박근혜의 6개월, 이렇게 달랐다 [리멤버 0416-②] 유가족 사경 헤맬 때, 대통령은 전복 사고 연극 관람 10 대통령의 판단 2014.10.15 541
9118 너만 길이냐 나도 길이다 17 김균 2014.10.15 730
9117 작금의 현실 - 원인은? 20 김주영 2014.10.15 702
9116 <사교집단>님과 <헷갈림>님에게 예언 2014.10.15 414
9115 닳아지도록 읽으라고 모든 사람에게 강권해야 할 책 2 예언 2014.10.15 522
9114 율법 졸업 했다 vs 율법 졸업할 수 없다 6 민아 2014.10.15 495
9113 믿음에 대해서 감히 한마디 합니다, 2 하주민 2014.10.15 512
9112 우리에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솔나무 2014.10.15 463
9111 201번째 글을 쓰면서 8 김운혁 2014.10.15 469
9110 미, 이라크전때 화학무기 찾았는데…왜 숨겼나 은닉 2014.10.15 543
9109 2300저녁과 아침의 이중 적용 20 김운혁 2014.10.15 508
9108 평화의 사도 교황에게 부탁드립니다. 4 닉네임 2014.10.15 514
9107 민초의 현주소가 재림교회의 현주소인가? 6 fallbaram 2014.10.15 591
9106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도 사이버 망명. 망명 2014.10.14 574
9105 안식교인 종말론 끝판 왕. 11 끝판왕 2014.10.14 1068
9104 교황이 점점 본성을 드러내고 있네요 7 버드나무 2014.10.14 511
9103 공무시간 '7시간'은 꽁꽁 숨기면서... file 그려 2014.10.14 482
9102 <하나님의 사랑만을 너무 강조>하다가 구원받지 못한 재림교인 5 예언 2014.10.14 885
9101 이래도 되지예 12 justbecause 2014.10.14 603
9100 '사이버 망명' 확산일로…검찰·SNS업계 충돌 조짐 유구무언 2014.10.14 486
9099 다니엘 8장 19절 "정한 때 끝" 에 관한것 = 2300 저녁과 아침= 진노하시는 일이 마치는때= 계시록 15:1 3 file 김운혁 2014.10.14 518
9098 간디의 그 때 그 시절! 2 umer 2014.10.14 611
9097 잠잔다 아니다 죽었다 8 fallbaram 2014.10.14 618
9096 그리움만 쌓이네 -- 여진 fall 2014.10.14 670
9095 가톨릭 교회 "동성애, 이혼, 피임 죄악시 말라" 선언 3 음모론 2014.10.14 530
9094 북한에 날려보내는 삐라에 왠 남녀 정사 사진이 삐라 2014.10.14 1552
9093 모조리... 2014.10.14 502
9092 (사)평화협의회 답변에 답하다. 부탁말씀 2014.10.13 536
9091 [10월-2주] 주간 포털 브리핑 이희욱 2014.10.13 563
9090 율법에 대해서 한마디 올립니다. 2 하주민 2014.10.13 458
9089 박원순 “병역 거부 ‘여호와의 증인’ 대체복무제 가능” 4 놀랄일 2014.10.13 732
9088 <떨림, 창백, 공포, 고뇌>하는 재림교인 예언 2014.10.13 917
9087 Candle In The Wind: A Princess Diana Tribute 아침이슬 2014.10.13 473
9086 박정희 난장토론 (진중권 교수) 01/03 이것도 2014.10.13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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