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하 목사에게 부탁 말씀
1) 제목이 너무 과격하다. '민초스다'가 패거리들이 모인 곳인가? 카스다에서 글쓰는 몇 분 중 민초스다에 글을 남기는 분들이 박진하 목사가 옆에서 소리를 질러대니 양쪽에 글을 쓸 수가 있는가? 목소리 크고 자주 글을 올리는 카스다에서 그렇게 확성기 틀어놓고 '민초스다 나쁜놈들" 하는데, 누가 마음 편히 민초에 글을 남길까? 박 목사도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는가? 민초 안 들어온다며?^^ 거기 올라오는 좋은 글들과 여러 내용들도 어떻게 알고 그렇게 다 도매금으로 '민초는 도둑놈 소굴'이라 깡패 패거리로 넘친다고 할 수가 있을까?
2) 박진하 목사 형님이신 태릉교회 박금하 장로님께서는 얼마 전에 민초를 '집창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건 내 기억에 사실로 기억하는데, 만일 이 말이 박진하 목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면 사과할 일이다. 만일 댓글에 그런 말이 없으면 박금하 장로의 말이라고 하는 저의 기억이 맞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알겠다. '집창촌'에서 일하는 아가씨들의 애환을 아는가? 거기엔 예수가 없는가? 내가 보기엔 예수가 거기에 있는데, 없다고 하니 거길 얼마나 가봤길래 없다고 자신하는가? 만일 태릉교회를 집창촌이라고 하면, 그 누가 안성명광교회와 요양원을 집창촌이라고 공식적으로 막말을 해대면 사과를 받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 사과를 하지 않으면 법에 호소해서라도 사과를 받아내고 손해배상이라도 해야하지 않을까? 박진하 목사 성격에 가만 있을까? 난 민초를 대표할 자격은 없지만, 박금하 장로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마음은 없다. 그럴만큼 한가하지도 않고 그렇게 하기에는 민초스다(www.minchosda.com)가 귀하기 때문이다.
저런 제목 그리고 비슷한 글들, 카스다에는 실명이라 조용히들 있지만, 만일 익명이 보장된다면 박진하 목사의 글에 그렇게들만 반응하시겠는가?
민초분들 참 이해하기 힘든 것은,
안식교는 악마교라고 주야장천(晝夜長川) 떠들고
안식교 외 다른 종파와 교회에도 구원 있다고 주장하고(편집자: 그럼 구원파 같은 교단이나, 천주교인들중 신실한자들도 안식일교 들어오기 전에는 구원을 못 받나? 이런 생각 때문에 무슨 뜻으로 다른 교단에 들어갔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사람들이 알고 싶어하지 않을까? 평소에 부드럽게 소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모르지만, 이렇게 안식교 외 다른 종파에는 구원이 없다고 목소리 높이는 분이라는 것을 알 사람들은 다 아니까 궁금하지 않을까? 카스다 식구들도?)
모든 종교, 사상, 이념 등을 뛰어넘어
화해와 화합, 평화, 평등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안식교의 주요 교리, 신조, 종말론, 예연과 선지자,
역사, 신학 등을 껌 씹듯 씹어대고 조롱하고 안 믿는다고 하고
안식교 말고 세상 모든 종교를 품어야하고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분들이 내가 장로교회에서
부총회장으로 취임한 것이 무슨 그리도 큰 잘못이며 대수라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광고까지 하고 난리를 칠까요? ㅎㅎㅎ(종교적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은 대총회와 한국연합회의 입장인 것으로 아는데^^)
나 같은 사람은 상종할 가치도 없다고 하며(그런 말을 누가 했을까요? 어느 네티즌 한 사람이 이야기하다가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고 사실 여부도 모르겠으나, 그 분 외 민초스다 네티즌 모든 사람이 그랬을까요? 우리집 옆집 장로님의 부인되시는 선교 잘 하시는 집사님도 민초스다 들어오시는데, 그 분도 박진하 목사님을 "상종할 가치도 없다"고 하셨나? 그 남편 장로님은? 박 목사님에 대하여 전혀 관심없는 분인데. 박진하 목사님~ 이게 문제라는거예요. 목사님과 관련된 모든 문제가 이런 식이예요. 어느 누가 발언을 하면 그걸 왜 1) 자기 식으로만 생각하여 정죄하고, 2) 그 그룹을 모두 파문[정죄]하십니까? 중세 교황과 목사님이 다른게 무엇입니까? 목사님이 그런 식으로 편을 가르니까, 그런 분이 게시판에서 목소리를 높이니까, 목사님과 같은 사람이 안식교의 대표로서 그 사고의 수준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까? 왜 과장을 합니까? 민초스다를 들어오고 싶어도 목사님이 쓰셨던 단어를 써서 '주구장천' 비난만 하시니, 뭔가 문제가 있나보다 하지 않나요? 안식교를 이단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하는 방식 아닙니까? 민초에 드나드는 사람이 모두 목사님을 비판합니까? 아니잖아요! 근데 왜 민초는 밥만 먹으면 박진하 목사님을 비난한다고 카스다에 와서 주구장천 말씀을 하셔야 할까요? 하나님은 그 일에 대하여 목사님께 무엇이라고 하시든가요? 벼락이라도 내려서 민초스다 관리자집과 서버의 컴퓨터를 다 날려버리실까요? 왜 소통에 목마른 소중한 싸이트를 그렇게 하나로 묶어서 비난을 일삼는가요? 이게 최근의 일은 아니잖습니까? 왜 목사님은 조용히 계시지를 못하십니까? 민초스다에 목사님과 대화 트면 친구되고 형 되고 동생될 사람들 많습니다. 목사님은 누구보다 자기탓, '내탓이오, 내탓이오, 내탓이오'를 부르짖어야 하지 않을까요? 숯을 입에 대고, 재 위에 앉아서 목사님이 파문한 민초스다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사과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박진하 목사님과 박금하 장로님이 민초스다를 폄훼하는 것이 아주 부당하다고 봅니다. 이건 입으로 말하기도 부끄러운 상식 아닙니까? 혹시 신학생 때도 이와 같이 문제를 풀어가셨나요? 신학생 때도 다니엘 계시록 배우시면서 이렇게 편을 나누셨습니까? 그때야 학생 때니까 이해가 된다고 해도, 이젠 성숙한 목회자 아닌가요? 언제까지 피해의식 속에 사셔야 하겠습니까? )
<목사님이 쓰신 단어를 보십시오. 이게 형제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목사가 할 말입니까. 왜 세상을 전투적으로만 사십니까?>
자신들의 사이트는 아예 열어보지도 못하게 차단해 놓고 (편집인: 관리자는 그런 적 없다고 하는데, 안성 시내 피시방의 아이피를 어떻게 알고 다 차단했을까? 혹시 그쪽에서 직원들을 민초스다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고 역으로 차단해놓거나 그렇게 차단된 것을 착각하는 일 아닌가)
우리 교회 홈페이지와 내 개인 홈은 날마다 쥐 잡듯 뒤져 (편집자: 난 박 목사님 홈페이지가 있는 것도 모릅니다. '날마다' 뒤지는 줄은 또 어떻게 아는가? 이래서 과장이 입에 뱄다고 하는 것입니다. '항상', '날마다'...... 무슨 할 일이 없어서 그런 데를 '날마다' 갈까요. 그런 말 방식이 이해가 안 됩니다.)
비난하고 까발릴 것이 없나 늘 상 살피는 저들의 (편집인: 저들이 대체 몇 명입니까. 이런 방식의 말은 적어도 중학교 때는 벗어나야 하는 것인데, 남들은 다 벗어났는데, 아직도 힘들게 들고 계십니까?) 이 행태는
참으로 선악의 대쟁투의 배후를 살펴야만 알 수 있는 간교한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저들이 참으로 간사하다는 것이고
늘 상 거짓과 속임수에 능한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얼마나 이중적인 모습들인가요?
저들의 평상시 모습 그대로라면
나의 이 일은 저들에게 축하를 받아야 하지 않나요? ^^*
저도 보았는데, 박 목사님이 글을 올리실 때 민초스다에 글을 올린 사람도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좀 놀라운 소식이고, 박 목사가 개척적으로 뭔가 움직였는데, 이게 장로교 중 우리가 소위 말하는 그런 정상적인 하위 그룹인가 하는 생각은 했었지요. 그러데 목사님은 마치 민초스다에서 난리가 난 것처럼 쓰셨더군요. 그래서 민초스다에 가보니까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미리 그럴 것이라고 쓰신 모양인데, 가슴이 아프더군요. 아침에 새벽기도회를 하셨을텐데, 그 시간에 기도를 하지 않으시고, 카스다에 글 쓰실 생각만 하셨나, 이런 생각까지 했습니다.
멍멍이의 개 짖는 소리 일 뿐이고 그것을 예언한 선지자는 자기가 살아가는
그 시대 너머를 전혀 바라보지 못하고 그저 인간적 안목에서 자기 시대만
바라보며 반응하여 언급한 헛 소리 일 뿐
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논리
일지 모른다."
과거 재림 교회 안에 있었던 극단적 사고를 가진 자들에 의해 잘 못 전해지고 가르쳐진
그러한 예를 빌미로 이 마지막 시대에 성경과 예언의 신에 기초하고 근거한
경건하고 건전한 종말론까지 마치 잘못된 것인양 매도하는 것은 바로 사단의 정신일 뿐이다.
왜 말 끝마다 "저들은...."하면서 아주 부정적으로 '저들은'....을 외치십니까? 왜 형제들을 원수로 만드십니까?
박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내용대로 진정 웃으면서 남자답게 탁 터놓고 화해할 수 있는 그럴 날은 재림의 날처럼 멀까요? 화합 하려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만일 예수님이 옆에 계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왜 일요일휴업령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 안에 어떤 의문점이 있으며, 그것을 걸러내면서 젊은이들이나 그 누구에게 설득력있는 방법으로 일요일휴업령을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나요?
왜, 어떻게 하면 다양한 생각이 교차하는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을 지에 대하여,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트인 목회자라면 그런 것도 이해하면서 보다 나은 접근법을 찾아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런 다양한 사고 속에 각자 설득력있고, 보다 대안적인 방법을 찾아가야지, 일요일휴업령에 대하여 현실적으로 '어렵지 않을까', '그런 일이 가능할까'라는 생각 자체를 왜 봉쇄하십니까? 박진하 목사라는 사람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다 '일요일휴업령'을 반대합니까? 일요일휴업령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모두 박진하를 반대하나요? 우스운 이야기 아닙니까?
혹 박 목사님같은 사람만 있으면 안식교가 아주 좋은 신앙공동체가 될까요? 일반 목회를 나가셨으면 그 많은 사회생활하는 신자들을 어떻게 양육했을까요?
오히려 자유로운 토론 속에 일요일휴업령에 대한 각자의 이러저러한 생각이 정리되는 길을 본인이 나서서 가로막는 노이지마케팅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은 없는가요?
일요일휴업령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의구심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저~ 자들"이라고 해야 할만큼 가치가 없습니까?
무엇보다도 언어를 순화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말로 인해서 문제가 되어야 하겠습니까?
이런 문제가 촉발되는데 있어서 본인의 책임은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본인의 책임을 혹 1퍼센트 있다고 믿으신다면, 그 1%에 대하여 하나님은 무어라 하시던가요? 박 목사님이 계시는 그곳에서 박 목사님께 진언, 쓴소리를 할만한 분이 있나요?
어머니의 가슴에 안겼던 기억이 나시지요? 그 가슴과 그 느낌이 박 목사님께 가장 필요한 때가 아닐까요?
혹 주체할 수 없어서 대성통곡하며, 도저히 울음을 그칠 수가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까? 없으셨다면 그러한 시기가 이른 시간 안에 오기를 소망합니다.
하물며 육적으로 사는 자들에게 이 살기 좋은 세상에 '일요일 휴업령'같은 소리는
멍멍이의 개 짖는 소리 일 뿐이고 그것을 예언한 선지자는 자기가 살아가는
그 시대 너머를 전혀 바라보지 못하고 그저 인간적 안목에서 자기 시대만 바라보며
반응하여 언급한 헛 소리 일 뿐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논리일지 모른다.
그래서 저들에 의해 요한 계시록 12장에 의거하여 이 땅에 출현한
마지막 교회 선지자 엘렌 지 화잇은 '산 너머 산' 하나도 내다보지 못한
어리석고 무지몽매한 선지자 아니 선지자도 아닌, 하나님의 계시도
받지 못한 한 여자로 전락하고 마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들은 화잇도 그저 우리와 성정이 같은 한 여자일 뿐이다라는
지극히 인간적 동정심을 발휘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저들의 논리대로라면 '산 너머 산' 정도도 내다보지 못하고
그 시대에 일고 있는 현상만 이야기하고 그 일요일 휴업령을
대쟁투에 최종적 예수 재림 종말 사건으로 수 없이 기록한것이라면
그녀가 기록한 다른 종말적 사건들은 그 누가, 어떻게 믿을 수 있으리요?
한마디로 화잇의 대쟁투 후반부 종말 사건들 모두는
미련 없이 모두 폐기하고 소각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과연 누가 의도하고 누가 가장 기뻐할 일인지는 자명하지 않는가?
저들에게 예수님이 예언하시고 성경에 반복하여 예언된 짐승의 표나 환난의 때는
이 시대에 새롭게 해석되고 이해 되어야 할 다른 성경이 되어야 하고
저들의 논리에 의거하면 겨우 한 세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자신의 시대에 일고 있는
일요일 휴업령에 급급하여 대쟁투의 최종적 종말 사건과 예언으로 일요일 휴업령을
'성령의 조명 아래 기록했다'는 엘렌 지 화잇 선지자는 거짓 뿌렁일 일삼은 자요
그녀의 대쟁투, 살아남는 이들, 마지막 사건들 등 예언의 신은 19세기 말 현상만을
기록한 그래서 지금쯤 저 19세기 유물을 보관하는 박물관에 가 있어야 할 책이 되고 만다.
그래서 저들에게 지금도 여전히 미국에서 일어나게 될 국가적 일요일 휴업령을 믿고
그 기별을 전하며 그것을 언제나 예의주시하는 목사나 기별자들은 성도들이나 겁주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평화를 깨트리며 이 시대를 읽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로 매도된다.
그러면서 저들은 재림교회가 19세기 사관에 얽메여 일요일 휴업령에나
목을 걸고 예수가 아닌 일요일 휴업령이나 기다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이 시대에 맞는 그러한 일(사랑)을 하자고 하며 그러한 자신들의 사고가
바로 이 교회를 개혁하고 사랑하고 깨우는 일이라고 역설한다.
저들이 말하는 이 시대에 걸맞는 바로 그 일이란 무엇일까?.....
왜 저들은 자신들이 있는 각 교회에서 그 일을 시작하지 않고
실천하지도 않고 십수년 동안 입으로만 그 사랑을 떠들어만 댈까?
저들이 말하는 이 시대에 맞지 않는 일요일 휴업령과 같은 것 말고
이 시대에 맞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에 대한 결과와 열매들을
그동안 수 십 수 백 번도 더 보여주고 나타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명백히 성경에 예언된 '일요일 휴업령'에 대해 인간적 논리로 부정만 일삼으며
과거 입산파나 시기파들에 의해 주도된 극단적인 일요일 휴업령에 대한 견해가 아닌
지극히 성경과 예언의 신에 기록된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성취될 최종적 예언과 경고들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을 예의주시하며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벧전 5:8)
사단 마귀의 거짓과 속임수에 대적하는 경건한 자들의 지극히 성서적 믿음과 신앙까지도
일괄 빗나간 것처럼 호도하고 여론화시키는 저들의 진정한 목적은 무엇이며
저들의 배후에 누가 움크리고 앉아 이 일을 주도하고 있는 것이가를
우리는 영의 안목으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과거 재림 교회 안에 있었던 극단적 사고를 가진 자들에 의해 잘 못 전해지고 가르쳐진
그러한 예를 빌미로 이 마지막 시대에 성경과 예언의 신에 기초하고 근거한
경건하고 건전한 종말론까지 마치 잘못된 것인양 매도하는 것은 바로 사단의 정신일 뿐이다.
저들이 늘 상 부르짓는 이 시대에 걸맞는 그 일이란 저들이 허울좋게 읖어대는
명확하지도 않고 저들조차 실천하지도 않는 '사랑'이라는 실체도 없는 끈구름같은 것이 아니다.
진정 이 시대에 이 재림교회와 재림 성도들에게 걸맞는 가장 성서적 신앙이란,
성경이 명시한 "마지막 때"인 1844년이 170여년이나 지나치고 있는 이 위급한 때에
더욱 깨어서 근신하여 다니엘서와 요한 계시록에 예언 되어 있고 선지자 엘렌 지 화잇을 통해
영감의 글로 기록된 예언의 신의 종말적 사건들에 예의주시하며 그 마지막 사건들이
최종적으로 가리키는 예수 재림을 위해 기도하며 전도하며 우리 주변에 지극히 작은 자들
곧 사람들이 지나치기 쉽고 업신 여기고 무시하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되고 버려진 자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저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과 필요한 것들을 아낌 없이 나누는 삶이다.
과거 입산파, 시기파 등의 극단적 종말론 등을 예로 성경과 예언의 신의
종말론 등을 믿는 사람들을 모두 빗나간 신앙을 하는 자들로 매도하는 것은
성경 다니엘서와 요한 계시록을통해 마지막 때에 성취될 예언을 주신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고 성경 자체를 부정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육과 영은 서로 원수가 되고 서로 대적할 뿐이다.
이 둘이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교회 안에도 철저히 이 두 부류가 존재한다.
그리스도인들 양과 염소 둘 중 하나에 속한다.
슬기로운 처녀 교인들이 있고 미련한 처녀 교인들이 있다.
부지런하고 충성된 교인들이 있고 악하고 게으른 종 교인들이 있다.
알곡 성도들이 있고 쭉정이 곧 가라지 교인들이 한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두 편 어디엔가 속해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아벨의 제사(예배)와 가인이 제사 중 그 어느 하나를 드리고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일 뿐 중간 지대란 없다.
육(肉)이면 육이고 영(靈)이면 영이지 영도 육도 아닌 성도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요일 3:10) 중 그 하나이지 그 중간은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깡패 무리들과 어울려 다니며 그들과 함께 동거동락(同居同樂)하며
깡패짓을 하는 아들은 그저 깡패인 것이지 '우리 아들은 착한데 그 놈의 깡패 때문에'라는
그러한 논리는 절대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성경과 예언의 신을 따라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자들을 비난하고 인신 공격하고 언제나 조롱과 험구를
일삼고 하나님의 남은 교회를 필설로 묘사할 수 없는 언사들로 공격하고 허물고
남은 교회의 진리를 훼파하고 무너 뜨리는 무리들과 함께 어울리고
저들을 철저히 옹호하고 저들과 동거동락하는 자들은 오직 저들일 뿐이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갈 4:28-29)
놀라운 것은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들"을 핍박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경의 역사이며 기독교의 역사이고 지금도 그것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아벨이 가인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고
그래서 요셉이 형들에게 린치(lynch)를 당했고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 의해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과 사도들이 같은 민족, 같은 형제들인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박해를 받고 고난을 받은 그 모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교회의 형편을 보면 여전히 동일한 이유 때문에
언제나 육적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괴롭힌다.
모든 사물을 철저히 육적으로 계산하고 육적 안목으로 판단하는 자들은
오직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는 자들을
율법주의자, 바리새인, 문자 주의자, 근본주의자, 화잇 주의자,
사랑이 없는자, 보수 꼴통들이라고 맹비난한다.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고 거짓으로 형제들을 인신 공격하고 비난하고
인격 살해를 일삼고 험구와 조롱을 일삼으면서도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한다.
저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마 24:49)는 바로 그 "악한 종들"인 것이다.
시대마다 반복되었던 그 동일한 역사가 마지막 때인 지금은
우리 안에, 우리 교회 안에, 남은 교회 안에
더욱 더 활발하게 그리고 더욱 더 교묘하게 반복되고 있다.
사단은 온 갖 속임수와 거짓과 궤휼과 간사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속이고 있다.
참으로 그럴듯한 사람의 논리와 인간의 말과 감언이설(甘言利說)로
기묘하게 사람들의 눈과 귀를 철저히 가리고 있다.
참으로 급박한 이 마지막 시대에 나와 우리는 누구이며
지금 우리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자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인가?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는 자인가 아니면 반대하는 자인가?.......
“우리는 지구 역사의 종말에 가까이 이르고 있는데
이 때에는 다만 두 무리가 존재할 것이며
모든 남녀와 어린이들은 이들 군대 중 하나에 속하게 될 것이다.
한 군대의 대장은 예수가 될 것이며
그 대적 군대의 경우는 사단이 지도자가 될 것이다.
........
이 부하들은 그들의 지도자 사단과 함께 그들의 군대를 강화하며
사단의 요구를 주장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통하여
그들의 대열에 다른 이들을 이끌어 들여 모으고자 할 것이다.
사단은 그의 기만과 미혹을 통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라도 미혹하려 할 것이다.
그의 기만은 작은 것이 아니다.
그는, 그를 영화롭게 하게 하지 못하며 그의 사업에 있어서
그를 돕도록 강제할 수 없는 모든 자들을 괴롭히고, 애먹이고,
속이고, 비난하고, 허위 묘사하기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계속적으로 혼란시키고
그의 방법에 대하여 무디게 할 때
사단은 가장 크게 성공하게 되는데
이는 부주의한 자들을 마치 눈이 가리워진 자처럼
이끌 수 있기 때문이다….”(3기별, 422-423)
“우리는 크고 엄숙한 사건들이 일어나려는 찰나에 서 있다.
예언들이 성취되고 있다.
마지막 투쟁은 짧으나 무서울 것이다.
오랜 쟁투가 재연될 것이다.
새로운 투쟁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나는 누구에게 충성하고 있는가?
나의 마음은 거듭났는가?
나의 영혼은 개혁되었는가?
나의 죄는 용서를 받았는가?
새롭게 되는 때가 올 때 그것들은 말소될 것인가?”하고
모든 사람은 질문해야 할 것이다….” (3기별, 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