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이학년이 되어서 새학기가 시작하는데 짙은 허스키 목소리의 한분이
수학선생님으로 오셨다. 갓 결혼한 몸으로. 사모님은 숙대 국문학과를 졸업해서 국어 선생님으로 오시고.
경북대학 농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시고 논문은 사과의 불암병에 대해서 쓰셨다고 들었다.
그분이 오시자 마자 첫 수업시간에 눈싸움을 하자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신다.
싸움이라면 무엇이든지 자신있어 하고 좋아하는 나는 아직은 춘삼월이고 지난밤에 내린 약간의 눈속에
그대로 덮혀있는 겨우내 얼었던 눈송이들이 군데 군데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그 덩어리들을 떼어서 작정하고
집어 던졌더니 맞지는 않으셨지만 그 눈덩이가 땅에 떨어져 깨어지는 것을 보고는 눈빛이 달라지며
교실로 다 들어가자면서 들어가신다. 아이들이나 여학생들이 하는 맞아도 아프지 않을 눈장난 하면서 서로
인사를 하자는것인데 걸핏하면 힘으로 매사에 덤비려한 나의 시도는 경우에 걸맞지 않는 반칙이 되고
말았다. 금방 따라가지 못하고 슬금슬금 복도를 지나 교실문앞에 서서 문고리를 잡는데 안에서
"장 도개이는 깡패 아니야!" 라는 허스키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린다.
그 말에 주눅이 들어 고개를 들지 못할 일도 아니라고 애써 생각하면서 문을 열고 내 자리에 태연하게
앉았고 선생님은 더 이상 그일을 거론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에 저녁예배를 마치고 나도 모르게 나는 선생님이 사시는 신혼의 쪼그만 사택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는 내 자신을 보게 된다.
늦은 겨울이라 아직도 저녁은 이미 캄캄했고 어둠속에서 파자마 바람으로 선생님은 삽작문을 열고
나를 들어오라고 하신다. 선생님 내외는 막 저녁을 먹기 시작했는데 나보고 같이 먹겠느냐고 물어신다.
그저녁 한동안 서로 말이 없이 된장찌개에만 집중하던 시간은 참으로 길었다.
"죄송합니다" 이 한마디 하려고 갔다가 된장찌개 한그릇에 기회를 빼앗기고 나는 끝내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은채 맛있게 먹었다는 인사만 하고 집을 떠나왔다.
그러나 선생님은 내가 왜 왔는지를 다 아시는것 같았고 또 용서하시는것 같기도 했다.
자칫 악연이 될뻔한 일이 하룻저녁에 반전이 되고 우리 사이엔 수학적인 사이는 결코 아니고
참으로 인간적인 사이로 날마다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여기숙사 뒷뜰에 선생님들이 가꾸어 먹는 작은 채전밭이 있는데 천세원 선생님과 함께 그분도
감자를 추수하고 있어서 나도 거기로 내려갔더니 농업을 가르치는 농업선생의 감자는 아기의 그것이고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의 감자는 황소의 그것이 아닌가. 나도 민망해서 약간의 침묵이 흐르는데 그가 갑자기 소리를 지른다.
"이노오옴의 가시나들이 어디다가 거름 (오줌)을 주었노?
그 한마디로 다 추락한 농업선생의 위신을 다시 끌어 올리는 기막힌 순발력을 보게 된다.
감자알의 크고 작음은 농업선생이 잘못 한것이 아니고 가시나들의 거름에 의하여 판가름 났다는 논리!
대학 삼학년을 마치고 입대해서 다시 복학한 후에 나는 여전히 외상으로 학교를 다니는 노동생이고
언제나 제때에 등록금을 갑지 못하는 처지였는데 무조건 반달안에 그돈을 갚지 못하면 졸업이 불가하다는
총무부장의 불호령에 한번더 선처해 달라고 조르지만 막무가내여서 사무실을 돌아나오는데 한 신학과 학생이 들어간다.
생각지 않게 빨리 나오는 그에게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졸업후에라도 목사로 취직이 되면 갚으라고 하면서 졸업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그 순간에 뒤집힌 나는 그 복도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신학과와 영문과의 차별이 이럴 수 있느냐고 따지고
"니는 애비도 없냐?" 고 한쪽은 강공인데 "그런 애비는 트럭으로 갖다 주어도 도움이 되지 않지요!" 의 충돌은 사뭇
심각했고 급기야 그 총무님이 자신의 명예를 걸고 한 학생은 퇴학을 시킨다는 것을 천명하기에 이른다.
화가 풀리지 않은 나엿지만 그런 약이오른 천명을 넘어설 수 없어서 이런 학교의 졸업장을 받는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는
무슨 화랑도의 맹세처럼 나도 끝이 났음을 천명하고 자취방으로 돌아와 문을 잡궜는데 마침 그당시 삼육대학의 원예과
교수로 계시던 선생님이 자전거를 타고 내 자취방으로 찾아 오신다.
장장 세시간을 설득하시는 선생님에게 나는 문을 열고 함께 총무님께로 가서 용서를 빌고는 끝내 졸업을 할 수가 있었다.
이런 아름다운 순간들이 어찌 그분에게 나하고만 있었던 일일 것인가. 그래서 그분은 삼육대학에서 우수한 행정자로
총장의 일을 하시고 은퇴해서 여기저기 시간을 쓰시는 모습이 카스다에도 올라 오는것을 본다.
그해에 받았던 내 졸업장의 얼마가 그분의 것인지를 알수가 없지만
오늘처럼 학창시절이 그리운 날엔 그분이 내 삶의 여러 고비에서 밀어주고 이끌어 주었음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 감사와 함께 이런말도 드리고 싶다.
To Sir with Love!
Forever.
나중에 우리가 결혼을 하려고 할때 내 아내에게 나를 참 좋은 청년이라고 귀띰해주시고
과거의 그 소란했던 기억들 다 지우시고 사시던 분.
그 인연으로 나는 그분의 사위에게 아까운 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해 주기도 했고.
지금은 다시 만날날을 기다리며 남가주 어디에선가 속 편히 쉬시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