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아래서 받은 기별은 율법이고
율법 아래서 죄는그 율법에서 행동이 빗나간 행위들을 죄라고 하고
용서는 그 죗된 힝위를 용서하는 것이며 그 용서의 장소가 옛성전이다.
행위의 용서를 위하여선 짐승이 죽고 짐승의 피가 뿌려진다.
예수 아래서 받은 기별은 은혜이고
은혜 아래서 죄는 없다. 죄인만 있을 뿐이다.
은헤는 죗된 행동을 다루지 않는다.
오직 죄인만 다루는 것이다.
모세의 율법은 죄를 다루지만
은혜는 죄인을 다루는 것이며
모세는 죄를 용서 하는 것이지만
은혜는 죄인을 용서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죄를 다루지 않았다.
오직 죄인만을 다룬 곳이다.
모세의 성소에선 날마다 죄를 용서 받아야 하고
날마다 제사를 드려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성소 사흘안에 지은 성소에선
단번에 제사를 드렸고
새로운 제사는 없다.
광야의 기별인 율법아래서 죗된 행위를 용서 받았지만
그들은 요단강을 건널 수 없었으나 여호수아 (예수-은혜) 와 함께
죗된 본성 을 용서받은 자들이 건너게 된 그 비유를 보고도 우린
눈만 뜨면 광야로 가고 거기서 하루만에 녹아버리는 일회용 용서를
찾아 헤메는 우를 범한다. 죗된 본성이 용서받는 것을 은혜라고
그대들은 믿어야 한다. 죗된 행위는 언제나 심판앞에 서게 되고..
우리가 받아들인 기별속에는 죄와 죄인을 다 다루는
과정으로 발전했다. 오히려 죄인을 다루기 보담 죄를 더
많이 다루는 교리로 발전한다.
이런 맥락에서 소위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보면 아들 그 자체를
용서하는 아버지가 보이지 않고 아버지의 것을 가지고 나가서
허랑방탕하는 것이 더 크게 보이므로 우리는 탕자라 부른다.
실제로 아버지는 아들의 그 행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잃어버린 그 아들됨을
찾아 주는 것이 용서라는 것이라고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그 아들됨의 용서를 집을 나가지 아니한 큰 아들과 같은 맥락에서
작은 아들을 바라보고 " 뭐 아버지 (하나님) 가 용서 한다니 우리도 용서를 할 수 밖에 없지\
않겠어" 라는 투로 보는것이다.
이 비유 전에 아흔아홉마리를 두고 한마리를 찾아 나서는 목자의 이야기가 먼저 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중에서 막내인 지구를 찾아 우주 (아흔 아홉) 을 두고 오시는
아들 예수를 말하고 있다.
이 지구로 표현된 한마리 중에서 일어버린 바 된것을 아는 작은 아들과 잃어버린바 된것을 알지 못하는
큰 아들 사이에 전개되는 이야기다.
율법의 행위로는 잃어버린 바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이스라엘과
은혜 앞에서 나의 존재는 잃어버린 바 되었구나를 깨닫는 새 언약으로 생겨난
영적 이스라엘 사이의 사건이다.
육의 행위로는 잃어버린 바 된 일이 없는 이스라엘에게
영의 행위로는 잃어 버린바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한
비유이다.
돌아오는 아들을 항해서 베푸는 잔치의 것들은 다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이다.
가장 귀한것
가장 살진것
십자가에 달린 당신의 친 아들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 아들이 잃어버린 아들이라 하지 방탕한 탕자라 하지 않는
까닭이다.
내가 잃어버린 그 아들이다.
당신도 그러하다.
오히려 아버지의 것을 허랑방탕하게 써버린 아들에게
더 큰 잔치를 베푸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이스라엘이
어차피 달려야 할 그 아들을 온갖 악한 심령으로 못박음이
가슴 아프다.
지금도 성경은 말한다.
원수의 그 행위를 용서하라고 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행위를 용서받은 자들은 상대의 행위만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본질 (죗된 본성) 을 용서 받은 자들이 상대의 본질을
용서하게 될것이다.
그 본질을 용서하는 행위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본질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분이시다.
많이 탕감 받은자가 많이 탕감하여 줄 수 있다는
이 기별을 귀담아 듣자.
졸지도 아니하는 분이
조는자 (죄인들)를 깨우러 오는 일이 남아있다.
도무지 의심이 되어 자신의 메 순간마다 행동을 점검하고 평안한 잠 들지
못한 자들보담 그의 놀라운 은혜를 믿고 그 믿음으로
평안히 잠자는 자들을 그가 깨우실 것이다
죗된 행위를 용서받고 싶으신가
아님
죗된 본성을 용서받고 싶어신가
전자는 율법의 성소로 가시고
후자는 은혜의 성소로 각자 갈 일이다.
회개하라는 침례요한의 소리는 모세의 성소에서
나와서 죄인을 용서하는 십자가로 가자는 말이다.
"회개!" 라고 할때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는 자는 데려감을 당치 아니하고
그때 오직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는 데려감을 당하게 될 것이다.
품성개발이라고 할때에 그것을 본질을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행위를 대상으로
하느냐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회개!"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같은 말이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이것은 본질을 용서하시는 사랑의 기별이다.
난 이 말에 눈물 많이 흘렸어요.
오늘도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