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어떤 메모
<지나간 미래>, 라인하르트 코젤렉 지음, 한철 옮김
문학동네, 1998
영화 <카사블랑카>의 주제가, ‘세월이 가면’(as time goes by)처럼 시간은 ‘가는’ 것일까? 간다면 목적지는 어디일까. 시간의 생김새는 한 가지 방향으로 직진하는 무한대의 선일까. 독일을 대표하는 석학 라인하르트 코젤렉은 그렇지 않다고 역설한다. 그의 <지나간 미래>는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문제제기 중 하나다. 1979년 작. ‘과학들’의 고전으로 내게는 세상과 거리를 두기 위한 투쟁 지침서다.
우리가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은 과거의 경험에 의거한 것이다. 그래서 <지나간 미래>다. 요지는 시간 개념의 전복. 전복이랄 것도 없다. 현재 통용되는 역사, 시간, 지식의 의미는 18세기 유럽에서 만들어진 필요의 산물이었다. 불과 이백년 전 유럽 인구의 80%는 농민이었다. 일상의 잣대는 시간이 아니라 자연이었고 부(富)는 기후에 의해 정해졌다.
“시간은 단수(單數)이고 과거, 현재, 미래의 순서가 있다. 인간은 노력으로 미래를 실현할 수 있다. 시대에 뒤처지면 안 된다.” 익숙한 이 언설들은 사실이 아니다. 틀린 말도 아니다. 다만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좋은 말로 발전주의가 작동하려면 이 같은 시간 개념이 필수적이다. 역사에는 수레바퀴가 달려서 기술이든 민주주의든 전진한다고 믿는 사고 체계, 이것이 근대성의 핵심이다. 미래는 곧 발전을 의미하게 되었다. 백인은 문명화 사명을 띤 인류의 대표를 자처했고, 그들의 미래는 비서구인에게 식민주의와 인종 말살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문제는 이것이다. “하면 된다.” 하면 무엇이 되나? 해서 되는 일이 하나라면, 안 되는 일은 아흔아홉개다. 우리는 세상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뜻한 바가 많을수록 좌절과 불행이 동반 방문한다. 더 큰 문제도 있다. “하면 된다”는 근대화 정신은 “하면 안 되는 것”에 대한 상식을 잠식했다.
글자 그대로 미래(未來)는 아직 오지 않음이다. 이전과 이후를 인식하는 그 순간이 현재다. 본디 과거나 미래는 순환할 뿐 순서도 위계도 없었다. 더구나 미래 개념의 근본 문제는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없는 자에게 더욱 예측 불가능한 도/박이다. 미래는 시간 개념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공간으로서만 상상할 수 있다. 세계 10대국 어쩌구, 노벨상 수상 국가, 좋은 집, 합격 등 우리가 추구하는 미래는 삶의 형태지 시간이 아니다.
없는 미래를 만들어내려니 비유가 필수적이다. 아마 ‘지평’(地平)만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코젤렉은 흥미로운 실화를 전한다. “저 지평에 이미 공산주의가 보입니다.” 흐루쇼프가 연설했다. 청중 한 사람이 질문했다. “동무, 지평이 뭡니까?” “사전을 찾아보시오.” 흐루쇼프가 대답했다. 학구열이 강했던 그 청중은 사전을 직접 찾아보았다. “지평, 하늘과 땅을 가르는 가상의 선. 사람이 다가가면 뒤로 물러난다.”(396쪽)
평평한 대지의 끝과 하늘이 맞닿은 경계선. 지평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나중에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는 선이다. 예측은 가능하지만 경험할 수는 없다. 지평에 닿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래는 언제나 관념의 영역에 머문다. 미래 지향적 사고? 이 그럴듯한 이데올로기 때문에 인간은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신과 옆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대신 내일을 걱정하는 데 사용한다. 현재는 “다가가면 물러나는 미래”를 위해 희생되었다. 늘 계획해야 하는 삶. 프랭클린 다이어리는 자본주의 최대 히트작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
겨울에 대비해 여름에 열심히 일하는 개미와 그의 ‘적’ 베짱이 이야기는 오해다. 모두 한철을 사는 것뿐이다. 레몽 아롱의 말대로 과거, 현재, 미래 사이에는 인과 관계가 없다. 역사의 규칙도 없다. 우연과 필연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며 관찰자의 관점에 따라 다를 뿐이다.(175쪽)
기대는 희망이 반영된 망상(望床)의 안락의자, 잠시의 착각이다. 갑을 관계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기대와 시간이다. 갑은 참으라는 ‘비전’을 제시한다. 우리가 참고 있는 현재가 그들의 지나간 미래다. 그러니, 지금 행복하다면 모든 계획은 이미 실현된 것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출처: 한겨레신문 논단
이 누리가 하도 조용하니까
접장님이 글하나 올려놓고 얼마만큼 동의하냐고 젊잖게 물으신다.
두세번 읽어야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의 시간이 가설적이나마
어느정도 느껴지는 글이다
무슨 시험이 이리도 어려운가?
아직 나의 지독한 감기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븥들고
예배당에도 가지않고 침대에 드러누워 함께 딩구는데...
과거와 미래를 들락거릴만한 착각의 기름 (윤활유) 한방울도 없이
건조하기만 한데...
지나간 미래
기대는 희망이 반영된 망상(望床)의 안락의자, 잠시의 착각이다.
갑을 관계를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기대와 시간이다.
갑은 참으라는 ‘비전’을 제시한다.
우리가 참고 있는 현재가 그들의 지나간 미래다.
그러니, 지금 행복하다면 모든 계획은 이미 실현된 것이다.
나는 우리가 되어야 하나
아님 그들이 되어야 하나
이것부터 난해하다
시간은 단수(單數)
여간 어렵지가 않다
지금 행복하다고 하면
나는 그만 그들이 되고
그렇지 않아야 비로소 우리가 되는
이 요상한 질문앞에서
아젤리나는 어떤 답안지를 쓰고 있는지
컨닝을 하고 싶은 마음이다
독사에게 걸려서 낙방하더라도...
나의 과거는 베짱이의 계절이었다
그리고 또 나의 미래도 분명 베짱이의 계절일 것이다
시간이 단수 라면 대답은 단순하지만.
다만 지금의 나는 베짱이 인지
아님 개미인지가 분명하지가 않구만.
또
코젤렉은 과거
한철은 현재
정 희진은 미래인가?
접장님
그래서 그런데 동의를 하지 않는다면
우짤낀데?
그것이 우선 알고싶소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