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선한행위는 하나 입니다.
자꾸 이원론 적으로 생각하시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선한 행위는 믿음이 낳습니다.
선한 행위를 나무라시면 안됩니다.
믿음은 선한행위를 먹고 자라고,
선한행위는 믿음을 먹고 자랍니다.
믿음은 철학 혹은 사고 혹은 지식이 아닙니다.
일종의 생명입니다.
생명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열매가 선한 행위들입니다.
참 믿음이 생기면
죽을힘을 다하여 선한 행위를 하고 싶어 집니다.
전혀 서로 반하지 않습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 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선한행위를 부자연스러워 하는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이 둘사이를 가르려 하는 것이
오늘날 잘못된 신학(좋은 신학도 있음)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신학적으로 연구하기보다는
하나 하나의 인물적으로 연구하다보면,
한 인물이 어느 순간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인생이 변하면서 그들의 생애가 어떻게 변화하는 가를
그리고 그 후 어떤 행위들을 하는 가를 관찰하다보면,
아주 확고한 공식이 나옵니다.
그들은 선한 행위를 한다고 생각 하지도 않습니다.
열병에든 자들과 같이 그져 주님을 위해
생애를 바쳐 올인 할 뿐입니다.
"믿음"을 하나의 구원얻는 기술 정도로,
연마해서 얻어내는 certificate 얻어내는 식으로 가르치려는 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만들어낸 조화 같아서 진짜와 구별 못할 정도로 비슷하지 만,
세월이 가도 변하지는 않아도,
세월이 가도 열매가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열매는 선한행위가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선한행위를 하게 되고
선한 행위가 열매들을 맺게 합니다.
믿음은 선한행위를 먹고 자라고,
선한행위는 믿음을 먹고 자랍니다.
이러한 불가분의 관계를 갈라 놓으려는 시도는
과연 누가 좋아 하겠습니까?
오늘날 선한행위를 죄보듯하는 어색한 분위기는
하이브리드 그리스도인들 만 잔뜩 양산해 놓고 있습니다.
선한행위는 바로 계명을 순종하는 길이요.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라이프 스타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꼭 그래야 구원을 얻습니까?
구원을 얻으려는 목적의식에서 동기유발이 된 것이 아니고,
그 분의 한없이 높으심과 (* 아주 중요한 부분임)
한없이 겸손함과
그리고 종이 되어 십자가에서 아주 영원한 희생을
감수하신,
나에대한 열정에,
감동이 된,
이 사실이,
나를 동기 유발 시켜,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기로 결심한 것 뿐인 것입니다.
그것을 순종이라 불러도 좋고
그길을 계명을 지키는길이라도 좋고,
그 길이 구원얻는 길이라도 좋은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 동기가
어떻게 유발이 됐느냐 인 것입니다.
구원을얻고자 하는 목적성 동기 유발인가?(꼭 나쁠것은 없지만...)
"그러한 분"이 나에 대한 태도에 대한 감동이 동기 유발인가?에 따라,
나의 그 후의 모습은 아주 다르게 표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사실 하나는,
성경의 인물들을 추적하다보면,
이러한 순간에
다시 말하면,
이러한 그 분과 마주치고,
그 분에게 감동된 순간,
반드시 사명을, 할 일을, assignment 를 받는 다는 것입니다.
비록, 개인마다 다 다르고 크고 작은 일들이겠지만
그 일을 위해 맹진하다 보면,
자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게 되고,
그 분을 매일 의지하고,
그 분을 매일 먹지 않으면,
그 일을 수행 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한행위를 먹고 자라고,
선한행위는 믿음을 먹고 자라게 된다고 생각 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 선한 행위가 구원에대한 목적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분에대한 사랑에서, 감동에서 동기 유발이 됐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긴 이야기 나누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다 아시는 일을 저도 정리할 겸 적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