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독교 신앙의 최대 걸림돌 2가지는?
이스라엘의 신앙의 기둥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다윗 왕가에 주신 영원한 '언약'과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집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야말로 이스라엘의 삶을 더럽히고 타락시키는 원인이었다. 이스라엘은 일상의 불의가 가득한데도 언약이 있는 한 다읫의 나라가 평안하리라 여겼고,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있는 한 안전하리라 믿었다. 예레미야가 사역 기간 내내 이스라엘과 맞붙어 부수어 버린 것이 이 두 가지에 대한 헛된 기대였으니, 어찌 그의 삶이 평안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예레미야서는 오늘 우리 신앙의 기초를 흔들어 버리고, 익숙한 삶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다윗의 영원한 언약을 믿기만 했던 이스라엘과 예수 이름만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맹목적인 신앙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나님의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 가운데 거했던 이스라엘과, 무수한 예배와 찬양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다를까? 구약 시대 유일했던 예루살렘 성전이 산산이 파괴되었는데, 우리는 무슨 근거로 무수히 많은 우리 교회들이 절대 무너지지 않으리라 믿을 수 있을까? -12-
-2- 야훼께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먼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여호와께로 돌아감의 두 번째 의미는 '흔들리지 말라'는 것이다...
'여호와께도 돌아감'의 삶의 세 번째 의미는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맹세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아브라함을 부르신 까닭은 자손의 복을 주시고 땅의 복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 땅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려고 부르셨으며(창 18:18-19), 정의와 공의를 행할 주체가 필요하기에 자손을 주시고 정의와 공의를 이룰 공간이 필요하기에 땅을 주신다.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웃과 정의롭고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규정하며, 특히 가난한 이웃(고아, 과부, 외국인 노동자 등)을 향한 올바른 이웃 사랑을 명령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풍요와 번성을 약속하면서 무한한 제사를 요구하는 세상의 헛된 우상을 버리고, 두려움을 버리고 흔들림 없이 진리와 정의, 공의를 따라 이웃과 더불어 살면, 이들을 통해 열방이 야훼께 돌아오게 된다.
관건은 그들의 삶 가운데 드러나는 정의와 공의의 행함이다. 입술로 야훼의 살아 계심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정의와 진리를 행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야훼께 돌아간다는 진정한 의미다. -71~73-
야훼는 한결같이 부르시지만 이스라엘은 실상은 지겹도록 변하지 않는다. 그들의 이웃에는 가난한 자를 죽인 피가 묻어 있고(렘 2:34), 번창하고 거부가 되어 살지고 윤택함에도 고아의 송사를 공정히 판결하지 않는다.(5:27,28)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과 어쩌면 이리도 똑 같은가. 이스라엘은 번창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축복으로 알아 열심히 제사를 드렸으나 가난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오늘 우리 삶도 하나님의 은혜로 윤택해졌지만 우리는 결코 가난한 사람의 재판에 개입하지 않는다. 얼마든지 예배드리고 얼마든지 세계 선교를 위해 헌금하지만, 힘없는 이들의 억울한 사정은 남의 일이다.
구약 시대 통치자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재판이었음을 생각할 때 이를 우리 사회 구조와 틀에 적용해 볼 수 있다. 즉, 구약의 불의한 재판은 가난을 초래하는 우리 사회 구조와 사람들의 무관심에 비견 될 수 있다. 구약 시대에 재판 대신 제사에 몰두했다면, 우리는 구조 대신 개인 경건에만 몰두하고, 가난한 자를 돕는다고 자선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때로 그들을 돕기 위해 헌금은 하면서도 그들이 계속해서 억울함을 당하는 구조를 바로잡는 일에는 철저히 무심하다.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에 신앙 공동체가 잘 나서지 않는 주된 이유는 한 번 나섰다가 혹시 자신들의 마음이나 삶이 더욱 불편해질까 봐 염려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모르는 체한다. 자선은 베풀지만 구조나 틀은 바꾸려하지는 않는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은 언제나 갈채와 환호를 받지만 가난한 자와 친구가 되면 빨갱이라는 말을 듣기 일쑤다. -세인 클레어본, <믿음은 행동이 증명한다> 규장, 20007, 97,98- 지독한 위선이다. - 74-
-3- 무엇이 하나님의 구원인가?
예레미야의 소명 기사에서 하나님이 예레미야와 함께하셔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두 번이나 주셨다. 무엇이 하나님의 구원인가? 곤경과 재난, 핍박으로부터 건져내심이 구원인가?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저들이 예레미야를 괴롭히고 죽이려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 그것이 구원이다.
그래서 예레미야에게 하나님의 구원은 쇠기둥과 놋성벽으로 나타난다. 아무리 핍박을 받고 조롱을 받아도 결코 굴복하거나 수치스러워하지 않고 끝까지 야훼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 그것이 견고한 성읍, 놋기둥, 놋성벽이 상징하는 바다.
예레미야의 삶을 보면 하나님의 함께하심은 계속된 고난 속에서 고난을 견뎌내는 순종으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그리고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것이 그를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건져내는 것만은 아니다. 이는 이사야에서 소개하는 야훼의 종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사 50:4~9).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이유로 매 맞고 수염이 뽑히고 침 뱉음까지 당한 야훼의 종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굳게 확신한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말씀의 핵심은 그의 '얼굴을 부싯돌같이 굳게'(사 50:7)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떤 모욕을 당해도 부끄러워 않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모욕과 수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견디어낼 수 있게 된다. 이사야서의 "부싯돌"은 예레미야서에서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과 기능이 같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제 막 사역을 시작하는 에스겔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도 이와 동일하다.(겔 3:8~9)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그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적극적인 사고방식이요,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다.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우리가 능히 고난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우리가 주님을 따라 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라는 말씀의 참뜻 아닐까. -<특강 예레미야>, 김근주 51~52-
주) 위의 글은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구약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에서 구약을 가르치던 김근주 교수가 당시 강의(예레미야서) 노트를 재정리해서(쉽게 풀어서) 출간한 책 <특강 예레미야, 파괴하고 무너뜨러라 그것이 은혜의 시작이다>에서 요약 발췌한 글입니다. 성경, 특히 예레미야서를 연구하시는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좋은 책입니다!
이번 주 해야하는데 큰 도움이 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