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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4 12:20

이해하기 쉬운 글

조회 수 1917 추천 수 0 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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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배님이 소개해 주신 사이트에 가니 이런 글이 있네요

빈배님 감사합니다

====================== 

 

개신교 교회개혁, 이렇게 하면 어떨까 [5]

원시 유일신 신앙 극복하여 이웃종교와 상생하라
2011년 01월 01일 (토) 10:34:58 류상태 목사sham57@hanmail.net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기독교는 유일신 종교이기에 어느 정도 배타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진정한 유일신 종교라면 배타성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

1. 유일신은 특정 종교인에게만 계시될 수 없다

 

유일신교란 무엇입니까? 유일신관의 핵심 개념은 글자 그대로 ‘신은 오직 하나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유일신은 어느 특정 종교인들에게만 계시되거나 그들과만 관계를 맺는 편협하고 지엽적이며 유한한 존재일 수 없습니다. 즉 하느님의 유일성은 전체 포용으로써의 ‘오직 하나(唯一)’이며, 모든 막힌 담을 허시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크게 품으시는 ‘궁극 실재(ultimate-reality)’로 고백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유일하신 참 하느님이 기독교만 인정하셨고, 기독교를 통해서만 당신의 뜻을 계시하셨다고 생각하는데 있습니다. 이런 편협한 원시 유일신 신앙이 인류 역사에 수많은 갈등을 만들어냈습니다.

 

기독교 세계가 오랫동안 배타와 독선에 빠져있었던 이유는 “성서의 모든 기록은 신의 계시에 의한 것이므로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며, 또한 절대 권위를 부여받은 기독교 성서가 자기 종교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확신하는 기독교인들의 신념을 확고하게 뒷받침하는 기록자들의 고백을 수없이 많이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의 복음서 14:6)라는 문장과 “이분에게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사도행전 4:12)라는 고백의 문장은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2. 성서의 언어는 ‘객관적 진술’이 아닌 ‘고백의 언어’

 

제 글에서 여러 번 반복했지만, 너무나 중요하기에 여기서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성서의 언어는 고백의 언어라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기자나 사도행전 기자가 그렇게 전하고 고백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객관적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내 애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진실로 고백한다고 해서 그것이 객관적 사실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교회 교인들이 성서를 열심히 읽는 것은 좋으나 성서의 언어가 고백의 언어라는 사실은 잊지 말고 읽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므로 몇 가지 예를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기독교 성서의 출애굽기(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 탈출에 관한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장자를 모두 죽이셨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한밤중에 야훼께서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맏아들을 모조리 쳐죽이셨다. 왕위에 오를 파라오의 맏아들을 비롯하여 땅굴에 갇힌 포로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에 이르기까지 다 쳐죽이셨다.” (출애굽기 12:29)

“그 때 파라오가 우리를 내보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렸으므로 야훼께서는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을 모조리 죽이실 수 밖에 없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까지도 처음 난 것은 모조리 죽이셨다.” (출애굽기 13:15)

 

그러나 성서의 이 기록은 당시 사람들의 고백이지 객관적 사실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또한 파라오 한 사람의 고집을 꺾기 위해서 이집트의 모든 맏아들을 죽이는 신이라면 인류 전체의 신으로 경배받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요? 혹 그가 이스라엘 민족만의 수호신에 그친다 하더라도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편협한 신으로 지탄받아 마땅하지 않을까요?

 

성서의 모든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그때는 ‘율법의 시대’였기에 ‘복음의 시대’인 지금과는 다르며, 하느님께서 지금은 그런 일을 하시지 않는다고 자위하는 기독교 보수 신앙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 때 그 아이의 부모였다면, 그래도 여전히 하느님을 ‘정의와 사랑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성서는 “야훼께서는 파라오로 하여금 또 고집을 부리게 하시었다.”(출애굽기 10:27)고 기록함으로써 하느님이 파라오의 마음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록들을 모두 역사적 사실로 믿게 되면 야훼는 파라오의 마음을 그렇게 조종해놓고는 신의 섭리에 거역할 능력이 없는 불쌍한 그에게 책임을 묻고 벌을 주는 파렴치하고 괴팍한 성격을 가진 신이 되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출애굽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섬겼다는 이유로 모세가 레위족속 사람들에게 살인면허를 주어 자기 동족 삼천 명을 몰살시켰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성서기자는 이 사건을 ‘야훼께서 하신 일’이라고 명백히 기록하고 있습니다.(출애굽기 32:35, “그 뒤에 야훼께서는 백성이 아론을 시켜 수송아지를 만든 데 대한 벌을 내리셨다.”) 이 기록은 신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지 않으면 이방민족 뿐 아니라 자기 백성들도 가차없이 죽이는 신의 잔인무도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납고 반인륜적인 기록들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과 기록자의 신인식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출애굽기의 기록은 당시 사람들과 기록자가 하느님을 그런 분으로 믿고 해석했음을 반영하는 것이지 그 기록 자체가 객관적 사실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서가 기록된 시대는 2~3천 년 전입니다. 2천 년 전 사람들은 그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도 그런 편협하고 반인륜적인 기록을 “성서는 오류가 없다”는 정통 교리 때문에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믿는 것은 2천 년 전의 원시신앙 안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입니다.

 

3. 하느님을 ‘인격신’이라는 교리적 전제에 가두지 말라

 

다원화된 사회에서 여러 이웃종교인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오늘의 한국 기독교인들은 ‘교리에 의한 배타적 유일신 신앙’을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기독교 전통이 고백하는 ‘유일하신 참 하느님’은 독선과 아집에 사로잡혀 인류의 아름다운 종교 유산과 신념체계를 모두 부정하는 ‘배타적 하나’님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의 ‘원인자’이며 우주만물을 크게 품어주시는 ‘궁극 실재’로서의 하느님입니다. 그런 유일신 신앙에는 배타성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는 그 동안 설정해 놓았던 모든 교리적 전제를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만은 절대로 버릴 수 없다”는 그 마지막 하나의 교리까지 다 내려놓고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처음부터 다시 재구축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모순들이 보이게 될 것이며, “이것만은” 이라며 그토록 소중히 붙들었던 그것이 바로 우상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

한국 교회가 진정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이웃종교와 더불어 상생 발전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은 인격’이라는 전제까지도 돌파되어야 합니다. 그 전제에 매인 착한 기독교인들이 “하느님은 사람을 심판하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착한(?) 결론을 내리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신으로 믿고 성서의 기록을 오류가 없는 신의 말씀으로 믿게 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성서가 가진 기록상의 오류와 한계뿐 아니라 기록자의 의도적인 왜곡에도 저항할 힘을 잃어버린 채 이성이 매몰된 폭력적 종교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 구절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엘리사는 그 곳을 떠나 베델로 올라갔다. 그가 베델로 가는 도중에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 ‘대머리야, 꺼져라. 대머리야, 꺼져라.’ 하며 놀려대었다. 엘리사는 돌아서서 아이들을 보며 야훼의 이름으로 저주하였다. 그러자 암곰 두 마리가 숲에서 나와 아이들 사십이 명을 찢어 죽였다.” (열왕기하 2:23~24)

 

 이 글에는 신에 대한 원시적 인식 내지는 기록자의 의도적인 왜곡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 중에는 이 글마저도 ‘신의 절대 권위에 의해 기록된 성서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이 기록에 의해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놀려댔다는 이유만으로 철없는 수십 명의 아이들을 곰을 보내 찢어 죽이는 잔인무도한 하느님에 대해 아무런 저항 없이 순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게다가 당시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를 그대로 오늘날의 ‘목사’와 일치시켜 교회 안팎으로 범죄를 저지른 일부 파렴치한 목사들이 자신을 ‘하느님의 사람’으로 내세우며 불가침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는 웃지못할 일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을 그런 신으로 인식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모독은 물론이며 기독교인 전체에 대한 기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말이 신을 믿는다면 그 신은 말을 닮았을 것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이 사람을 닮았다는 원시신앙의 전제를 비꼬는 말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인격’이라는 말을 신에 대입하면 그 순간 하느님은 우리가 규정한 그 ‘인격’ 속에 갇힐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느님은 ‘사람의 격(人格)’을 가진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격(神格)’을 가진 분이며, ‘인격적인 분’이 아니라 ‘초인격적인 그 무엇’입니다. 인격의 범위와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격’이라는 교리적 전제도 돌파되어야 합니다.

어느 신학자는 “이제 우리는 ‘하느님은 누구신가?(Who is God?)’라고만 묻지 말고 ‘하느님은 무엇인가?(What is God?)’라고도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물을 수 있다면 하느님을 더욱 새롭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격’이라는 개념은 신성의 신비와 독특성을 우리의 경험과 논리로 설명하기 위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분’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로서 ‘인격’이나 ‘하느님 아버지’라는 표현은 적절하고 아름다운 말일 수 있지만, 그 용어를 절대화하게 되면, 하느님은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 안에 갇혀버리고 말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매여서는 안될 개념과 규정에 매여 틀을 만들고, 그 틀 속에 우리의 신앙과 삶, 심지어 하느님까지 모두 구겨 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잔을 비우지 않고는 새 술을 담을 수 없습니다. 한국 교회도 이제는 비우고 버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과 구원의 길에 대해, 또한 신과 그 섭리에 대해 지금까지 규정했던 모든 교리의 굴레와 전제를 돌파하고 뛰어넘지 않으면 21세기에 기독교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 이 칼럼은 격월간지 <공동선> 2011년 1+2월호에 실린 글을 일부 수정하고 보완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 ?
    고바우 2011.02.14 13:02

    제게는 조금 근심스러운 내용입니다.

    성경의 말씀에 대한 접근에서 상기의 칼럼도

    결국 문자적인 접근에서 해석법을 찾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애굽의 장자들과 처음 난 것을 죽이시는 하나님]

    [엘리사를 놀린 아이들에 대한 저주와 곰으로 죽이신 하나님]

     

    이 기록들이 맞거나 또는 히브리인들의 고백의 언어이거나

    결론은 둘다 말씀을 곡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곡해하지 않을 방법들이 있을까요?

     

    [애굽의 장자들과 처음 난 것을 죽이시는 하나님]

    [엘리사를 놀린 아이들에 대한 저주와 곰으로 죽이신 하나님]

    vs

    [친히 인간이 되신 하나님]

    [죄인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예수님]

    [죽이시지 않고 죽으신 예수님]

     

    서로 상반된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기록들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구약이 히브리인들의 고백의 언어라고 치부하면

    신약도 제자들과 기독교인들의 고백의 언어라고 치부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성령께서는

    상반된 성경의 기록들에서 한 하나님을 발견케 하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바로 [사랑] 이십니다.

     

    분명히 성령께서 구약의 하나님과 예수님은 같은 분이시며

    그 모든 기록들이 사랑이심을 발견케하시고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 ?
    Windwalker 2011.02.14 19:17

    한 하나님이라...

     

    너무 견강부회하는 것 아닌가요?

    아무리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도 제게는 이해난망일 뿐입니다.

    그게 더 솔직하지 않을까요?

     

    어린 아이나 부녀를 무론하고 죽이고 도륙하는 구절에서 홀로코스트가 나올 수 있으며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는 구절에서 지구촌을 볼모로 붙잡고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의 참혹한 전쟁이 나올 수 있습니다.

    셈, 야벳, 햄에 대한 구절이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인종차별주의의 발상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우상화하지 않는 것...

    그래서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합니다.

  • ?
    고바우 2011.02.14 19:36

    님의 이해난망에 대하여 따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것이 모든 경우에 대한 정답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성경을 통하여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예수님이 같은 분임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깨닫게 하여주시기를 바랄뿐이며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길 뿐입니다.

     

    그리고 제게 있어 성령의 인도하심이란...

     

    구약의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책임지심의 모습이

    오직 십자가를 통하여 투영되어야 이해가 되고 

    그래서 역시 하나님은 사랑이심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가 중요합니다]

    라는 댓글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혹시 덧붙이자면 성령의 인도하심에 맡겨보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 ?
    Windwalker 2011.02.14 21:16

    혹시 디오니소스의 십자가에 대해 들어 보셨는지요?

     

    우리가 그 동안 진실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들이

    때로는 그럴듯하게 포장된 허구였다는 것을 깨닫는 경우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붙들고자 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네가 어떻게 읽느냐"는 말씀은 기존의 상식 또는 믿음까지도 바꾸어 놓는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유럽인의 모습을 한 예수의 초상과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의 사고의 영역에서 지우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이제는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아니라 내게 "어떤 의미인가"로

    되물어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 ?
    고바우 2011.02.15 00:58

    디오니소스의 십자가 뿐  아니라 많은 이야기와 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제게 은혜와 감동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글들은 제게 흥미는 유발시키지만 저를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저는 십계명의 두번째 계명도 좋아합니다.

    예수님의 초상이나 예술가들의 동상들은

    제게도 잘못된 선입관을 넣어줍니다.

     

    제게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정말 죄송하게도 눈을 감아도 아버님과 어머님의 얼굴이 잘 그려지지는 않습니다.

    (저만의 문제일 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언제나 아버님과 어머님을

    아무리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아니라 내게 "어떤 의미인가"는

    제게도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부모님은 많지만 제 부모님이 제게 특별하듯이 말입니다.  *(^ ^)*

  • ?
    Windwalker 2011.02.15 16:56

    디오니소스의 이야기가 제게도 은혜와 감동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밑그림을 이해하는 단서를 주고 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 이야기가 어떻게 해서 출현을 했는지 등등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말이 안되는 이야기여서

    이상 믿음으로만 밀어부칠 없게

    한계를 풀어주는 열쇠가 것입니다.

     

    추종자들에 의해 윤색되고 각색된 구절과 표현들을 제거하면

    말씀의 의미가 더욱 뚜렸하게 다가옵니다.

    이렇게 이단적인 생각을 가지고서도

    그리스도인으로 남아 있는 것은 말씀이 저를 붙잡기 때문입니다.

     

    고바우님의 신앙관에 대해 왈가왈부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나름대로 훌륭한 신앙관을 가졌다고 생각하고 존중합니다.

    아무튼 제가 주장하는 것은열린 신앙관을 갖자는 것입니다. 

    크고 높은 뜻을 바라볼 있어야 배타적이 되지 않을까 싶어 댓글을 달았습니다.

  • ?
    고바우 2011.02.15 17:51

    열린 신앙관을 갖자는 님의 의견에 적극 동의합니다.  ^ ! ^

  • ?
    바다 2011.02.14 15:18

    이 글을 소개한 것은 배타적인 우리의 관념을 살펴보자는 의미였습니다

     

    아 고바우님 말씀을 생각해보면 제가 간과한 것이 있긴 하네요

     

    구약이 히브리인들의 고백의 언어라고 치부하면

    신약도 제자들과 기독교인들의 고백의 언어라고 치부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타교파인과 안식일에 대한  성경공부할 때에 답답해서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같은 분이라고 강변했었는데

    이렇게 이해도 되네요

     

    생각은 바다속에서 침잠하기도 하고 치솟기도 하고

    물줄기를 타고 온 해양을 떠돌아 정착하겠지요

     

    합당한 선을 이루듯 합당한 가치관의 정립을 위해 ^^

     

     

     

  • ?
    고바우 2011.02.14 16:14

    저 스스로에 대한 글이었다고 생각하며 적었음에도

    내용상 님께 결례를 드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님 또한 구약과 신약을 통한 한 하나님에 대한 강변의 경험을 갖고 계시는군요 *(^ ^)*

    물론 그 하나님은 사랑이시겠지요?

     

    ~ 온 해양을 떠돌아 정착 한다는 말씀에 기분이 좋습니다.

     

    꼭 니고데모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같아서요~~

    성령께서 님을 끝까지 인도하시리라 기도합니다.

  • ?
    Windwalker 2011.02.14 18:58

    신을 인격 (人格)안에 가두는 사람들이 “신의 뜻” 또는 “신의 말씀”이라고 하는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작 인간의 뜻임을 많이 보게 됩니다.

    물론 깨달음이 없으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오랜만에 보는 류상태 목사님의 통찰력이 있는 글이군요. 감사합니다.

     

    P/S 기독교 초기에는 집적(集積)해 놓은 성경이 없었는데,

    재림교회가 원수처럼 여기는 로마 황제에 의해

    집적 및 공인되었다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독자 제위께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 ?
    고바우 2011.02.14 19:48

    그렇지요!

    하나님을 자기의 생각 안에 가두면 자기의 뜻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자기의 뜻은 신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실행하는 무서움이 있습니다.

     

    신념과 믿음이 다르듯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내가 진리를 깨닫는 것이 아니고 그가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니

    따라가면 되겠지요!!!

     

    그리고 재림교회가 로마황제를 원수처럼 가르쳤다면

    그건 잘못 가르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
    Windwalker 2011.02.14 21:29

    "그가 모든 진리로 인도하시니" 하셨는데,

    만일, 정말로 만에 하나, 그 것이 잘못 인도되었다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피켓을 들고 다니는 분들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그렇게 한다고 하는데, 혹시 내 자신도 부지불식간에?

     

    그래서 끊임없는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P/S 그간 고바우님의 글을 통한 인품을 보면 온화하며 신실하신 느낌이 들어

    제 댓글에 해당되는 분은 아니라 사료됩니다.

  • ?
    무실 2011.02.15 15:27


    로마황제가 공인한 성경은 라틴어 성경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보는 책에서 인용하는 성경은 그리스어로 된 70인역인데

    70인역과 한글 성경이 전혀 다른 뜻인 적이 몇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70인 역에는 현재의 성경에서 보지 못한 책도 있음을 봅니다.


    저의 아이러니는 제가 읽는 성경은 한문이 섞여 있어서 읽다가 옥편을 찾을 때가 있는데

    지금 보급되는 한글 성경들은 한문이 없어서 어떻게 이해하는지 궁금합니다.

    시편에 내게 상을 베푸시다는 말을 한문으로 보기 전에는 그 상이 밥상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한글 사랑 꼭 필요하지만 우리말의 70% 이상이 한문용어라 하는데 (%가 맞는지??) 성경, 어려운 책이 분명합니다.


  • ?
    Windwalker 2011.02.15 17:00

    로마제국이니 당연히 라틴어 성경이었겠지요.

    내용이 조금씩 차이나고 때로는 단어 하나에

    구절의 해석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초기 기독교 당시 여러 사본과 역본, 외경, 위경

    중구난방으로 되어 있는 소위 하나님의 말씀들을

    로마황제가 취사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당시 교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종교지도자들과 함께 말이죠.

     

    그리고 어려웠던 것은 2000년전에도 그랬습니다. 

    사본 또는 역본마다 내용이 조금씩

    또는 많이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고대 그리스 문체에는 띄어쓰기와 구두점이 없었던 관계로

    읽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때로는 의미가 잘못 전달되기도 했겠지요.

    낙타와 바늘귀 말씀과 같이

  • ?
    무실 2011.02.15 17:25


    낙타와 바늘귀 말씀을 어떻게 들으셨는지요?


    저는 가르치시는 분으로 부터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는 

    바늘 귀라는 문이 있었는데 실제로 낙타가 그 문을 통과하기에는 매우 힘이들었다 했습니다.


    다른 의미 전달이 있으면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 ?
    바다 2011.02.15 21:48
    낙타를 약대로 기록했는데 제가 배울적에는 약대라는 것은 한약을 다려서 약을 짤 때에 쓰는 조그만 봉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대 낙타와 바늘귀는 어울리지않습니다
  • ?
    Windwalker 2011.02.16 18:11

    아마도 여러 곳에서 다 들 한 번쯤은 들으셨을 것 같아 그냥 요약만 드리겠습니다.

     

     

    1. 바늘귀라는 별명을 가진 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유래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문을 아주 작아서,

    겨우 사람이 드나들 정도의 크기였다고 합니다.

    낙타를 타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사람 키의 2배 가까울 정도로 무척 크기 때문에

    그 성문을 드나들려면 낙타의 무릎을 꿇리고

    앞으로 당기고 뒤에서 밀어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아마도 무실님이 말씀하신 설일 것입니다.

     

     

    2. 1번의 아류인데, 바늘귀라는 협곡이 있었다고 합니다.

    길이 너무 좁아 자칫하면 떨어질 수 있어 그 길을 지나는데 매우 힘들었다고 하는군요.

     

    3. 'gamta(밧줄)'를 'gamla(낙타)로 바꾸어 썼다고 하는군요.

    즉, 바늘귀와 댓구가 될 수 있는 단어는

    낙타보다는 밧줄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실제로 “밧줄”로 쓴 사본이 있다고 합니다.

     

    4. 탈무드에 코끼리가 바늘귀로 들어간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현재의 낙타가 맞다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사실, 밧줄이나 낙타, 또는 코끼리이든지간에

    과장 또는 강조의 차이이지 문자적으로

    바늘귀에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성경을 읽는다면 부자가 천국을 간다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부자의 개념은 무엇일까요?

    요즘 시세로 따져서 어느 정도 있어야 부자일까요?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으면 수 많은 구절에서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즉, 성경무오설이나 축자영감에 발목이 잡히지 말고

    말씀하고자 하는 뜻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
    Windwalker 2011.02.16 18:19

    언젠가 계시록에 나오는 종말론에 무게를 두는

    어느 목사님에게 제가 성경을 읽을 때 가지고 있는 원칙을

    아래와 같이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경우에는 상식적으로

    두 가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그 메시지가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며,

    두 번째는 그 메시지에서 보편적인 원리를 찾고 그것을 현대에 적용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서와 계시록 해석에서 첫 번째 단계를 뛰어넘고

    곧바로 두 번째로 넘어가는 경우가 바로 우리 교회의 해석입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독단적으로 성경을 해석할 위험이 많이 있습니다.

     

     

    다니엘서와 요한 계시록은 당시에 그것을 받은 독자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먼저 그 본문이

    그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상고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그것을 현대에 적용해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요한계시록의 경우 로마 황제들에 의해

    박해 받는 초대 기독교회에 주어진 긴급한 서신이었습니다.

    저자는 이 편지를 통해서 로마의 박해를 받는 기독교회들을

    위로해 주고 승리의 확신을 주기를 원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계시록에 나오는 교회를 대적하는 대부분의 상징들은

    1차적으로 기독교 교회를 박해하는 로마 황제, 거짓 종교,

    그리고 그 로마 황제의 배후에 있는 사단의 세력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우리가 초대 교인이라고 가정해 보면 요한 계시록을 읽고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마도 그 편지를 읽으면서 박해하는 로마 황제와 거짓 종교,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사단의 세력의 멸망과 교회의 승리를 확신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요한 계시록의 메시지는 1차적으로 1세기 당시의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본문에 주어진 원리를 현대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는 요한 계시록의 상징들을

    대부분 역사의 종말에 일어날 사건으로만 설명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교회의 박해 세력을 독자들보다

    수세기 내지 십여 세기 후에 등장할 교황 또는 가톨릭이나

    다른 역사적인 사건으로 곧 바로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죽음의 위기 앞에 놓였던

    1세기 초대 교인들에게 장차 일어날 가톨릭이나 다른 역사적 사건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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