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어느 글에 댓글로 달린
passer-by 님과 빈배님의 짧은 대화입니다.
고수들의 대화를 흘려듣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두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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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어느 글에 댓글로 달린
passer-by 님과 빈배님의 짧은 대화입니다.
고수들의 대화를 흘려듣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두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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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전모를 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나가는 분의 화잇에 대한 또 다른 견해입니다.
passer-by
우리아이들을 화잇의 새자녀 지도법이나 종말론과 같은 교리로 키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동의합니다. 불안하고 병약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화잇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그녀의 십대의 심리상태가 너무 불안하고 분열적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못생기고 공부 못하는 쇠약한 아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종말론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성장과정을 통해 그녀는 한 교단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구원론과 완전론의 족적을 남겨주었고 그 사상의 뇌관은 고스란히 <새자녀지도법>에 담겨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겠지요. 일전에 한 재림교회 교육전문가가 화잇의 교육철학은 지극히 어른중심적이며 부적 강화를 강조하는, 심지어 아동학대적인 요소도 일부 남아 있는 구시대적인 시스템이라고 평한 것을 듣고 깊이 동의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이러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화잇을 가르치는 게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앤드루스 세미나리에서 예언의 신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같은 책은 읽지 말라고 했습니다.
새자녀지도법도 그런 류에 들어가겠지요.
여기 저기 써 놓은 여러 글들을 짜집기해서 만든 것으로 그녀의 생각보다는 편집자의 의도로 만든 책이지요.
그런 류의 책들이 그녀의 '그 사상의 뇌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책이 아니라고 봅니다.
새자녀지도법으로 배우기 보다는 차라리 문제 많고 얼룩졌던 그녀의 가정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더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여기서 말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선지자보다 더 많은 것을 알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앤드루스 대학이 크고 교수님들도 많이 계시지요?
세미나리에서 공부 하는 학생이 청년에게 보내는기별 집에 있는것 보내 달래서
보내 주었는데요...
어느 교수님은 읽지 말라고 하고 어느 교수님은 읽으라고 하니 원 참..
맨 윗줄은 말씀을 안하셨으면 ...
청년에게 보내는 기별이나 새자녀 지도법 무엇이 문제이던가요?
저는 화잇을 복합적인 면에서 바라봅니다. 객관적으로 화잇의 가치와 한계를 이해하자는 방식이죠. 일부 화잇을 마치 신주단지 모시듯
자신의 글에다 화잇의 글로 각주를 다는 사람들은 경멸하지만 화잇의 여러가지 종교경험에서 나오는 가치들은 여전히 발굴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조금은 엉뚱한 설명이지만 이렇게 생각한다면 조금 이해가 쉬울 수도 있겠지요.
우리가 경전을 말하면 자꾸 성경만을 이야기 하는데 세계종교들의 경전 중에 도그마적이고 폐쇄적인 기독교와 다른 열린 해석과 첨언을
허용하는 경전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불교가 있는데, 불교의 경전을 흔히 삼장(三藏)라 부르고, 이는 경(經), 율(律), 논(論)을 합쳐
이르는 말입니다. Roughly speaking, ‘경’은 부처의 교설을 모은 아함경 같은 이른바 핵심 경전을 말하고, ‘율’은 가르침에 맞는 일상의
계율을 설명해 놓은 경전을 말하죠. 이 두 가지는 부처가 살아생전에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부처가 열반한 후, 그의 제자들이 모여
“여시아문(如是我聞)”의 전통에 따라 결집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며 여러 해석들이 분분하게 되자 다시 제자들이
모여 ‘경’과 ‘율’에 바른 가르침(定說, orthodox)을 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탄생한 ‘논’은 결국 경전 해석을 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이런 경전화(canonization)는 단지 불교뿐 아니라 유교에서도, 일부 기독교 등에서도 유사하게 일어났는데, 유대교가 타낰(TaNaK)과
탈무드를 자신들의 경전으로 가지고 있는 게 그 좋은 예입니다. 경전을 서로 다른 세 가지 방향의 다른 층위로 생각하면 화잇의 글이
안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들이 해결될 여지가 있습니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화잇의 글도 그녀의 신비적인 계시를 담은 ‘초기문집’ 같은 책과 교회의 권면과 규율을 제시한
‘교회증언’ 같은 책, 그리고 2차 자료들을 인용해 가면서 성경을 해석한 코멘타리의 일종인 ‘각 시대의 대쟁투’ 같은 책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모두 화잇이 쓴 것은 맞지만 그 성질과 그 격이 다르다는 겁니다. 물론 편집자에 의해
여러 갈래 나누이긴 했으나 어떤 책이든 저는 ‘I saw....’로 이어지는 그녀의 계시 경험과 특정한 상황 속에서 특정 인물에게 쓴 글은
같은 책에서라도 분명 다른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떤 분들은 화잇의 모든 책을 다 축자영감으로 된 작품인양 인용하는데,
저는 성경도 축자가 아닌 사상영감으로 보는데 화잇을 축자영감으로 보는 건 ‘화잇신격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봅니다.
이렇게 해석하지 않으면 발생되는 신학적 문제가 여러 가지 있는데 그것들이 무엇인지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쓰도록 하죠.
조금 논란이 있겠지만 아주 아주 쉽게 말해서,
경→이론(theory)→화잇의 계시→fact이므로 변할 수 없는 메시지
율→실천(praxis)→화잇의 권면→advice이므로 가변적인 국지적-상황적인 메시지
논→해석(commentary)→화잇의 성경해석→interpretation이므로 시대에 맞게 수정적 계승할 메시지
이는 경전의 이해를 가지고 화잇의 글을 이해해보자는 취지이지 화잇의 글이 canon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길
Thank you for your interest and compliment. I can imagine how hard you understand my scheme of thoughts above.
Try as you may, you could never reconciliate these notions with your view of <Spirit of Prophecy> as a part of the Bible.
That's because you've already--consciously or unconsciously--been taught by SDA church to think Mrs. White
to be a prophetess and consider her works as authentic words from God.
As you know, however, E. G. White made some mistakes--ranging from trivial to not small--as a human,
which is set as my starting point. If we cannot deny that we've caught hold of the theory so-called
White's infalibility and immaculacy, now we have to turn our ears to Mrs. White's confession like this:
"Although I am dependent upon the Spirit of the Lord in writing my views as I am in receiving them,
yet the words I employ in describing what I have seen are my own."--Review and Herald, Oct. 8, 1867
화잇의 저작에 일정한 "층위(strata)"를 두자는 건 화잇을 분쇄해 버리려는 게 아니라 화잇을 십자포화에서 건져 내려는 것입니다.
월터 리(Walter Rea)가 1980년대 초반 <The White Lie>를 출간했을 때만해도 화잇의 저작이 다른 자료(other sources)를 극히 제한적인
상황에서, 극히 제한적인 분량만을 인용했다고 대총회는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교계 안팎의 집중적인 조사를 통해 알려진 것들은
당시 화잇이 상당한 수준의 인용을 감행했고, 심지어 "나는 보았다(I saw..... 또는 I was shown....)"로 시작하는 부분 중 일부에도
토시 몇 개 안 틀리고 다른 저작에서 그대로 긁어온 부분이 있음이 밝혀지게 됩니다. 물론 월터 리가 주장하는 분량을 저는 모두
믿는 것은 아니고, 그녀가 분명 성서적 견지에서 "이상"을 본 부분이 있다는 것, 즉 그것을 종교적 탈아현상으로 부를지 심리학적
분열증으로 부를지를 떠나, 그러한 부분이 진짜 있었다는 사실은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그녀가 오늘날로 말하자면 일종의
표절(plagiarism)을 했고 그 표절이 생각보다는 광범위했다는 것도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화잇의 저작을 지금의
방식으로 묶어 출간하는 것을 지양하고, 화잇의 초기 이상, 그리고 다른 외부의 저작들을 인용하지 않은 부분들만을 따로 편집하여
새로운 <예언의 신>을 만들 수 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교단을 이끌어가면서 행정가로서 썼던 많은 권면들과
외부의 저작을 인용한 부분들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종교적 신비경험에서 나왔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에, <예언의 신>의 지위가
아닌 그 보다 한 단계 아래의 위치에 놓인 지침이나 혹은 코멘타리 정도로 놓을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그 저작의 가치는 충분히
살리면서도 21세기에 <예언의 신>의 독특성도 손상되지 않는 차원의 수정적 계승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자가 직접 글을 써주시니 저는 따로 댓글을 달 필요가 없겠군요.
하지만 잠시 제 감상을 첨언하자면, 몇몇 교인들은 재림교회에는 사상가가 없네... 신비주의자가 없네.... 말들 많이 하는데
저는 감히 화잇 여사야말로 밖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재림교회의 훌륭한 사상가(thinker)요 신비주의자(mystic)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재림교회는 그간 화잇 여사를 교육자(educator)요, 건강개혁자(health reformer)로만 조명을 해왔기 때문에 화잇에 대한 학적 발굴은
역설적이게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종교학적으로 신학적으로 화잇은 거의 연구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초기문집> <각시대의 대쟁투>가 교리를 단장하고 이론적 수사를 조립하는데에 하나의 부품으로는 쓰였으나
그 자체로 하나의 영성가의 텍스트로는 조명되거나 학적으로 이해되지 못했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그녀는 힐데가르트만큼 다양한 비젼을
보았으며, 스웨덴보리만큼 문학적으로 신비적이었으며, 에디만큼 건강을 새로운 인간관에 비추어 전인적으로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빈배님의 책 속에도 들어갔더라면 좋았겠지만.... (살짝 실망은 되었지만ㅋㅋ) 한국에서 출판되는 종교서적이니만큼 쓸데없는 분쟁과
오해를 일으킬 필요는 없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ㅋㅋ 여하튼 이번에 새로 출간될 빈배님의 책도 무실님의 일독을 권합니다.ㅋㅋ
빈배
passer-by 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화잇도 훌륭한 신비주의자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녀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녀를 완전 무오의 위치에 올려놓아 다른 외부 사람이 그녀를 함부로 다룰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체험 자체만을 두고 보면 다른 신비주의자들의 체험과 많은 면에서 공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의 경우 cognitive contents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데, 그녀가 한 말들, 특히 예언에 관한 것 등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올려 놓음으로, 그 말들이 빗나감에 따라 그 체험 자체도 별볼일 없는 것으로 취급되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제 책의 경우 모든 신비주의자들을 다 다루려고 한 것이 아니고, 그저 각 종교 전통에서 대표적인 몇 분들의
종교 체험을 소개하므로 종교는 이론이 아니라 의식의 변화, 특수 인식능력의 활성화라는 체험임을
보여주려 한 것입니다. 어느 분들이 기독교 전통에서 발견되는 여성 신비주의자들만 다루는 책을 써도
흥미있으리라 믿습니다. 빙겐의 힐데가르트도 제 원고에는 있었는데, 지면상 생략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