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나님은 사람과 닮은 원숭이를 그것도 별의별 종류별로 다양하게 만들어 가지고
진화론의 원조 다윈과 기타 머리가 좋은 인간 종자들을 통해서 거침없이 진화론(창조주의 능력을 부인하게 하는)으로 치닫게 하셨는지 의문서러울 때가 있다.
같은 맥락에서 선악과 또한 그러하다.
그리고 율법은 어쩌자고 시내산에서 덜커덩 주셨는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서 비록 성경에는 죽임을 당한 것이라 표현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다 이루었다” 라고 말하면서 아버지의 구원의 계획을 다 이룬것으로 말씀하시고 사람은 돌문으로 그의 무덤을 막았으나 그 문을 열고 누에고치 (육신-율법의 요구와 저주에 갇힌 몸) 에서 나와 이제는 영적이요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난 나비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셨건만 그 구원의 나비를 다시 율법의 프레임 속 (누에고치-아빕월 또는 큰 안식일)으로 끌어 들여서 결박하는 일을 하면서도
“재림 성도 여러분”
“주님 속히 오십니다”
라는 자가당착의 기별을 쉼 (안식)없이
전하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보고
그러면 왜 그러셨는가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꺼리가 되었다.
왜?
하필 선악과?
선악과 때문에 결국 인간의 조상이요 인류의 씨로 창조된 아담의 부부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유혹 (그 유혹의 진정한 발원지는 사단인가 하나님인가?) 에 휘말리고
하나님과 같이 되기는 커녕 역사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창조의 아름다움들이 망가지는 degeneration 내지는 창조의 demolition 으로 지구를 흘러가게 한 조상 그리고 씨가 되었다.
여기에 말하는 선악과와 생명과는 두개의 나무가 아니라 원어로는 단수로 쓰여져서 한나무에서 나오는 두가지 기능임을 암시하고 있다. 두개의 개체를 가지고 동전의 양면처럼 뒤집어 보아야 양면을 전체로 이해할 수 있듯이 우 리는 그 양면에 주어진 기능을 뒤집어 볼 수있는 신사적인 성서 고찰이 필요하다. 선악과를 통해서 죄가 이땅에 들어오고 같은 나무에서 그 죄를 용서하고 제하여 버리는 일 즉 십자가-생명과-첫열매가 차후에 있는 일이듯이 율법으로 우리는 죄라는것을 깨닫게 되고 그 죄의 저주가 결국 죽음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모세의 광야에서 사십년 겪어본 후에 알게 하셨고 그 율법의 저주와 테두리의 연장선에서 십자가라는 유일한 길을 훗날에 세우신것의 순서와 의미를 알아야 할 것이다.
재림교단이 666 이라는 정체만 밝혀지면 모든것이 해결이라는 식의 다니엘 해석과 요한계시록 해석이 이런 관점에서 매우 위험한 장난이라는 나의 우려도 이런 시각에서 본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공식을 한번 생각해 보자
먼저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요 그 다음은 생명을 주는 나무의 실과요.
먼저는 선악을 구분하게하는 율법이요 그 다음은 그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는 십자가 (율법의 마침)요.
먼저는 오직 이 땅에서 흙으로 시작한 첫째 아담 (산영)이요 그 다음은 하늘에서 내려온 둘째 아담 (살게하는 영) 이요
먼저는 시내산이요 그 다음은 갈바리 모리아 산이요.
먼저는 엘리야요 그 다음은 엘리사요.
먼저는 홍해를 건너게 하는 모세요 그 다음은 요단강을 건너게 한 여호수아요.
먼저는 율법과 선지자의 화신 광야의 소리 침례 요한이요 그 다음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시요.
그 기능과 순서를 신약의 저자들이 말하는 내용속에서 우리는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남은무리가 되기 위한 지나친 몸부림의 일환으로 성경이 성경을 말하는 그 원칙에 서지 않고 성경을 증언(?) 이 말하고 도장을 찍고 해석하는 위태위태한 게임으로
교회를 몰아가고
있다는 나의 우려가 이 아침에 나팔꽃이 되어 피고 있다.
Herman Hesse 가 지성과 사랑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고 웬만한 지성인들이라면 그 내용이나 제목쯤은 귀에 익었으리라 생각한다.
소설에서 지성으로 대표하는 인물은 수도원의 수도사인 나르찌스이고 사랑 또는 야망으로 대표하는 인물은 골드문트이다.
그 내용속에는 골드문트는 본능적이요 타고난 야망과 욕망에 사로잡힌 자신에서 탈피하고 싶은 욕구가 그의 고향선배요 수도승인 나르찌스를 경외하는것으로 나타나고
자신의 모든 본능을 누르고 훈련하고 다듬어서 인격의 금자탑을 쌓고 살아가는듯한 나르찌스는 온갖 패륜과 부도덕의 형벌로 형장에 메어달린 고향의 후배요 동생앞에서 오히려 자연스러운 내면의 흐름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온갖것을 누르고 억제하며 겉을 키워온 자신의 삶이 비록 부도덕 할지라도 동생의 그 자연스럼 앞에서 별반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는 생각과 속으로는 언제나 자신도 그 부도덕한 생각과욕망을 어찌하지 못하고 살았다는 고백을 하게된다.문제는 이것이다.우리가 헤세에게 묻기전에는 많은이들이 나르찌스와 골드문트가 각기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헤세는
그 두사람이 우리속에 함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선악과와 생명과
율법과 십자가
광야와 가나안
제발 유사품에 속지 마시오!
제발 그 기능을 순서적으로 잘 이해하도록 힘쓰시오!
성경을 성경이 말하게 하시오!
성경의 내용을 증언의 어떤 힌트를 섞어서 새로운 진리 (?)를 발견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고
그것이 십자가를 능가하는 무게의 것으로 새벽별처럼 떠오를때 까지 제발 조신들하시오!
가을 바람님.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얻고자 하는 생각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말은 제가 처음 말씀 드린게 아닌걸로 아는데 또 같은 얘기를 쓰셨네요.
율법은 본래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노예해방을 시켜 주신 후에 율법을 주신것처럼, 율법은 구원받은 자들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입니다.
"깨끗하고 건강하고 영양 풍부한 고기만 먹어라" 라고 레위기 11장에서 말씀 하신게 억압으로 느껴지시나요?
" 너의 노비라 할찌라도 희년에는 그를 자유하게 돌려 보내라" 이 율법이 율법주의로 보이시나요?
"안식년에는 땅을 쉬도록 해주어라" 땅이 쉬면 일꾼도 쉬게 되고 모두가 쉼을 얻는것인데 그게 율법 주의인가요?
" 살인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주의로 보이시나요?
이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 위대한 업적을 깨닫게 될때에 우리 구원받은 인간들은 하나님이 혹 명하지 않으셨다 할찌라도 자원하여 아빕월 15일을 안식일로 제정하게 될것입니다.
에스더가 아달월 14일과 15일을 부림절 안식일로 제정한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요.
하나님을 찬송하는 날을 제정하는게 율법주의라고 생각 하시나요?
가을이나 여름에 장막부흥회를 하기 위해 날짜들을 정하는게 율법 주의인가요?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모일려면 시간을 정해야 모일 수 있는건 당연한것 아닌가요?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우리를 위해 죄를 대신하여 화목제물이 되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을 드리기 위한 목적입니다.
에스더의 이야기가 오늘날 즉 신약시대에 일어났다면 십자가 이후이므로 부림절을 제정하는것은 율법주의라고 정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은 사랑의 율법이며 구원받은 자들은 그 놀라운 사랑에 감사하여 자원하여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