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긴글이지만 오늘 꼭 읽어야할 글...
[죽음으로부터 살아나온 자들의 이야기]
Maya Choi
"목이었어요. 전신 마비가 왔을 때, 만약 재활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평생을 타인의 수족에 의해 살아갈 생각으로 절망에 빠졌었더랬습니다...."
"지게차가 후진하며 왼발을 으스러뜨리고 갔지요.
다행이도 결혼을 앞둔 여직원은 튕겨져나가 타박상으로 그쳤지만 30센티미터정도의 간격을 두고 서 있던
저는 발 하나가 바퀴에 깔리며 뭉게졌어요. 아내가 병원에 와서 제 발을 보고는 기절했습니다..."
산재근로자 7기 집단상담에서 나온 이야기들..
1년 두 번씩이니 4년 째 들어선다.
매번 그들의 집단상담을 이끌 때마다 난 숙연해질 수 밖에 없다.
매회기씩 주제를 달리해서 '분노조절'이니,
'자존감향상'이니 아름다운 명칭하에 이루어지는 집단상담회기는 실상 그들에게 어떠한 도움이 될까.
난 그저 그들의 임사체험이나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신체적 상해,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던
그들의 정신적 손상에 마음 깊이로부터 고개를 숙인다.
고통고통 말을 하지만 적어도 살면서 발이 으스러지거나,
척추를 다쳐 전신마비가 왔을 때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때때론 추락사고로 하반신마비가 왔던 근로자가 참가를 했었는데 간암이 같이 발병되거나,
팔이 절단되었는데 이혼을 당해야 했거나 혹은 자녀가 가출한,
산재사고로 병원에 입원해 있어야 했는데 홀어머니가 낙상사고를 당해
가볼 수 조차 없는 이삼중의 고통을 함께 겪는 이들이 참가한다.
그들만큼의 고통을 겪지 않고 그들을 상담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은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이
매번 산재근로자나 장애아동을 둔 부모 집단상담을 할 때마다 가슴속에 메아리를 울리기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들에게 자신의 삶은 여건이나 조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닌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상정'하는 가에 있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 느끼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생기있게 살 수 있도록,
어떠한 여건에서도 굴하지 않고 고개 바짝 들고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죽음의 문턱의 경계에서 느꼈던 해일같은 공포들 모순적으로 또한 그 처절한 바다같은 관용들.
또 장애아동을 둔 어머니들의 집단상담은 또 질을 약간 달리하나 그 또한 바닥을 알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이들이다.
가장 사랑하고 보호해야 하는 자녀의 장애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부터가 고통이고 받아들이고 나면
그 다음에 겪어내야할 모든 상황이 고통이며 이것을 다 견뎌냈다 하더라도
막판엔 돌보고 있는 부모가 먼저 죽고 났을 때의 아이를 생각하는 고통이 있다.
꽤 많은 장애 아동 어머니들이 자기보다 아이를 먼저 보내고 싶어하는 데,
생각해보면 아이가 먼저 가면 아이를 가슴에 묻는다 할 만큼 부모에겐 아이를 먼저 보내는 것이 최고의 고통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자신보다 아이가 먼저 가기를 바라는 그 마음의 고통을 가늠이나 하겠는가?
그 마지막 화두를 다룰 때가 상담자 역시 가장 힘겹고 고통스럽다.
보통 부모들은 그 짐을 형제에게 지우게 되는데 그것은 장애형제를 자식에게
또 한 커다란 고통을 짐지우는 것이기에 바람직하지 않다.
즉 그 부분은 사회에서 국가에서 해주어야 한다.
늘 생각하는 것은 좋은 나라는 소위 '잘사는 나라'는 무엇인가?
했을 때 이런 개인적 고통에 어느정도의 복지시스템을 가지고 있는가?란 기준이
'잘사는 나라 좋은 나라'를 판단하는데 중요한 한 축이 된다는 것이다.
복지국가는 '약자들이 적정한 보호를 받고 살만한 나라,
기회의 균등과 질적 평등이 보장된 나라'라는 측면에서
우리가 제아무리 미국제국주의를 비판할 수 있고 천박한 그들의 자본주의를 경시할지라도,
그들의 복지체제가 현 한국의 복지체제보다 훨씬 진보되었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산재근로자 집단 상담이나 장애아동부모 집단상담이나
결국 맨 마지막에 가서는 '사회의 변화 운동을 사회개혁운동에 참여' 논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의 지극한 고통이 사회개혁과 맞닿아 있기에 그냥 뜬구름 잡는 진보운동이 아닌
뼈속깊숙이에서부터 나오는 절규같은 변혁의 외침이 바로 그들의 사회변혁운동이다.
또 하나 이러한 지극한 고통을 받는 집단 내에서 조차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음'에 대한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서로의 고통의 경중을 따지며 나는 손가락을 하나 잃었기에 정상인들보다는 고통스럽지만,
팔 두개를 잃은 이들보다 혹은 하반신 마비가 온 이들을 보며 '안도'를 느낄 수 있다는 점,
또 내 아이의 정신지체는 그래도 단순하지만서도 훈련을 통해 스스로 생계자립을 할 수 있는 것이 장애가 큰 다른 아이,
누구의 도움없이는 생활자체가 불가능한 다른 아이의 장애보다는 낫다라는 비교상의 안도를 인간이기에 느낀다는 것이다.
즉 같은 고통의 집단내에서도 반목과 질시가 존재한다.
즉 장애가 없는 다수 일반인들의 집단이나 고통을 당하는 집단이나 이러한 구성원간의 반목과 질시는 다르지 않다.
이부분을 잘 보여준 소설이 있는데 바로 '눈 먼자들의 도시'이다.
정체불명의 전염병으로 한 도시의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눈이 멀어가고,
초기에 눈이 멀었던 사람들을 격리 수용하는데,
이 수용소 내부에서 조차 권력쟁탈과 계급이 만들어지고 착취와 억압이 횡행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원래부터 소경이었던 자들(원래는 약자였던 자들)이 권력을 가지고
전염병으로 눈이 먼 자들의 보급식량품을 독점하고 그들에게 보급품을 주는 조건으로 성상납을 요구한다.
순식간에 병으로 눈이 먼 사람들은 권력에 대항하지 못하고 억압당하고 착취당한다.
'눈 먼자들의 도시'는 지금_여기 우리가 사는 작금의 세상에서 일어나는
추악한 행태들을 빼지도 더하지도 않고 그대로 그리고 있는데,
그 수용소안엔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한 여자가 있다.
눈 먼 것처럼 가장 해서는 사랑하는 눈 먼 남편을 따라 수용소에 들어가서 그 모든 것을 목도한다.
그 와중 권력집단의 성상납에 무기력하게 유린당하는 과정에서, 피권력집단내에서
'어차피 성상납'할 거라면 우리끼리 먼저 성을 나누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눈이 멀어 건물 전체가 그들의 배설물로 악취를 풍기는 그 곳에서 피지배계급들을 그들의 성을 서로 탐닉하는데,
유일하게 눈을 뜬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를 찾아가 섹-스를 하는 것을 아무말 없이 지켜본다.
그녀는 한 여자로서는 서글픔과 배신을 또 한 편으론
그런 억압상황에서의 일어나는 그 모든 상황에 대한 고통과 분노를 이중적으로 느낀다.
결국 한 명의 눈 뜬 그녀는 보급품을 독점하며 성을 착취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맹인집단의 우두머리를 살해하고
눈 먼집단을 이끌고 밖으로 탈출하는데 희망을 가졌던 바깥세상은 이미 도시전체가 눈이 멀어 아비규환 그 자체다.
결국 남편과 자신이 속했던 그룹을 데리고 그녀의 집으로 돌아온다.
눈 먼 사람들은 그녀에게 묻는다. 바깥세상은 어떠하냐고.
그녀는 담담하게 진실을 말해주고, 그들을 무기력해지고 절망에 빠진다.
결국 그들은 위안 거리를 찾아 클래식 음악을 듣고 소소한 자신의 개인사 이야기를 나누는데,
가장 먼저 눈이 멀었던 자부터 이유도 없이 눈이 멀었던 것처럼 이유없이 눈을 뜨게 된다.
눈을 뜬 이들이 광명을 찾았다 환호할 때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그녀의 눈이 서서히 멀어간다.
눈이 멀었던 자들이 눈을 뜬 들, 과연 그것이 눈 뜬 자들의 도시가 될까?
어쩌면 그녀는 그 눈 뜬 자들이 앞으로 벌일 눈 먼 행태들을 예측할 수 있었기에 눈을 감는 지도.
이 소설은 지금 우리가 눈을 뜨고 살아가는 이 도시가 이 사회 이 국가,
어쩌면 온 세계가 눈 먼자들의 도시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집단상담으로 돌아가서, 이렇게 동급의 집단이라 하더라도, 동질의 고통을 받는 집단내에서도
늘 화합과 협력과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다. 또 그 안에서 계급화가 이뤄지고 권력과 암투와 반목과 질시가 일어난다.
인간의 속성이다.
상대의 고통이 내 고통보다 양적으로 크기에 내가 안도를 갖고 그 나마 행복감을 갖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나보다 나은 조건의 누군가를 맞닦뜨렸을 때 상대적 불행을 크게 느낄 수 있다는 것이고,
자신의 행불행의 척도를 자신 내부에 가지고 있지 않고 타인에게 혹은 조건과 같은 외부상황에 넘겨줌으로서
절대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되는 진짜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게 되는 편협한 인간관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담가가 다뤄야 하는 까다로운 이슈 중 하나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격, 소양의 문제, 가치관과 세계관 혹은 우주관과 관련되어 있어
짧은 시간에 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행복한 삶은 '체제적 복지사회'를 바탕으로 '구성원의 성숙도'에 달려있다.
이 양대축 어느 하나 소홀히 해서는 '살기 좋은 나라, 사회'를 이룰 수 없다.
이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던 분이 바로 백범 김구선생이다.
일부 지식인들 조차도 김구선생을 테러리스트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행동의 어떤 면이 테러인 것이 맞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김구선생을 테러리스트라 말하는 것은 큰그림을 못보고 지엽적인 것에 매달리는 편협한 시각이다.
예전에 김구선생동화를 쓰며 김구선생의 일생을 총체적으로 탐색한 적이 있다.
겉으로 들어난 부분 숨겨진 부분, 공적 생활과 사적 생활, 심지어 난 그의 사주도 봤다.
그의 태생적 기질을 파악하는 데 도움될 하나의 참고 도구로서 말이다.
그 모든 자료를 다 연구한 후에 난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만약 김구선생이 암살되지 않았더라면,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선생이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면,
북한의 김일성주석과 끊임없는 접촉으로 분단국가가 아닌 통일국가를 만들려고 했던
김구선생이 우리를 이끌었다면 우리의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김구선생을 테러리스트라 말하는 사람들을 봤을 때,
또 소위 스스로 자신들이 인텔리겐차라고 생각하고 입에 거품무는것을 봤을 때,
난 김구선생의 그 아름답고 고매한 이상과 한없이 따뜻한 민중에 대한 사랑과 칼날같이 강직했던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를 그들이 알고나 말하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아직도 저승을 못가고 이 땅을 맴도는 김구선생의 영혼이 우리에게 말을 하고 있다.
(그것을 내가 어찌 아는 지 묻지 마시라)
네 소원(所願)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大韓獨立)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 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自主獨立)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동포(同胞)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내 과거의 칠십 평생을 이 소원을 위하여 살아왔고,
현재에도 이 소원 때문에 살고 있고,
미래에도 나는 이 소원을 달(達)하려고 살 것이다.
독립이 없는 백성으로 칠십 평생에 설움과 부끄러움과 애탐을 받은 나에게는,
세상에 가장 좋은 것이, 완전하게 자주 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 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거니와,
그것은 우리 나라가 독립국만 되면 나는 그 나라의 가장 미천(微賤)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왜 그런고 하면,
독립한 제 나라의 빈천(貧賤)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富貴)보다 기쁘고 영광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는 우리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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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아침 드는 생각은 과연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빼앗긴 주권을 다시 되찾은 것인지,
아님 여전히 주권을 갈갈이 찢어 발겨 이곳 저곳에 빼앗긴 채로,
빼앗긴 것조차 모르는 눈먼자들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아기자기님.
단숨에 읽었습니다.
의미있는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