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제가 알기로는 율법주의자들은 한명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자는 아무도 없단 말입니다.더군다나 저는,
율법을 지켜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에 초점을 맞춘 적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것은 님과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이지 내가 믿은 다음 법을 지켜서가 아님을
나는 압니다"
라고 결론을 내리면서,
마치 님은 은혜를 주장하고,
저는 행위를 주장하는 것처럼,
결론을 내리고 계십니다.
"오직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얻는다."
저의 주장과 동일 합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이냐?
님은 율법을 버려야한다.
저는 율법은 은혜에 은혜를 더하게 한다. 버릴 수 없다.
주구장창,
저는 님이 그렇게 주장하시는 믿음을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율법의 기능을 말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나, 님은 율법하면 "행위"라는 해묵은 논법으로
율법주의 자들과 논하는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대화하기가 힘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는
별로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많이 한 것 처럼 말입니다.
님도 별로 생각을 많이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로마서 7장은 몽학선생이 아니다 라고
단칼에 잘라 말씀하시는 투가 그렇단 말입니다.
바울은 7장 내내 율법의 그 기능을 말하고 있는 대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원리를 독자에게 설명하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 대도 말입니다.
어디 7장에 율법을 지켜야, 안지켜야 하는 논쟁이 있습니까?
사설이지만,
제가 신학교를 설립한다면,
모든 신학생은 일년간 수학은 무조건 필수 입니다.
그 가운데 기하학은 반드시 포함되야 합니다.
일년간 "B" 학점을 받지 못하면 무조건 탈락입니다.
신학교 근처도 얼씬 거리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몇분과 대화하고 느낀 점입니다.
논리나 원칙으로 나가다가 끝에가서는 꼭 감정, 휴너니즘, 등등 으로 빠집니다.
은혜를 꼭그런 식으로 처리한단 말입니다.
은혜는 자기들의 무슨 전유물인 양 하면서 말입니다.
바울은 은혜를 어떤 원리에서 설명하려고 함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너는 그래서 수학을 잘 한단 말이냐?
그래서 저는 신학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설이였습니다.
다시 돌아갑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이곳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바로 율법을 말함입니다.
사망의 음침함에서 나를 가이드 해주는 것이,
몽학선생이 바로 율법이라고
다윗은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가서 다윗은 이 말 바로 앞에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다윗은 율법의 인식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고 말할 때 "말씀" 을 줄여서 하면 결국 "율법"인 것입니다.
율법을 인식하고 인지 하는 태도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 (dwelling among us) 는
것이란 말입니다.
모세에게 야훼가 말씀하십니다.
"그들 중에 거할(dwell among them) 성소를"
그리고 지성소 제일 가운데 계명을 가져다 놓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바로 율법입니다.
인간에게 실존하는 여호와는 바로 율법의 실존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율법이 우리 가운데 거(dwelling)할 수 있는 가를
그 원리를 자세히 설명한 것이 바로 이 로마서 7장이란 말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느냐? 잘 안 지키느냐?가 이슈가 아니라,
율법이 어떤 역활을 하는 가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저자들의 한결같은,
그 궤를 같이 하는 사상은,
바로 이 성소의 그림이 없이는,
그릴 수 없는 그림들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없이하고 은혜를 논하자!
도대체 무슨말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지금?
누구 좋으라고 하는 말씀들입니까?
로마서 7장이 그렇게 어려운 말씁입니까?
어렵게 만들어서 좋을 사람들은
이 일로 밥벌어 먹을 사람들 일 것입니다.
제가 이미 다른 분과 토의 하면서
7장을 설명하였습니다만.
제대로 읽으신것 같지 않습니다.
님이 올리신 글에 일일이 답하는 것보다는
그 요점만 다시 이곳에 정리해 보겠습니다.
뒤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그 뜻이 더 간단해 질 수 가 있을 것입니다.
7장의 결론은 바로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부르 짖으며 그 결과로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몰입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게 된것은
바로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니라"(13절)
율법이 나를 죄인으로 몰아 세운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8절)인데
다시 말하면 법이 살아서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법이 없으면 죄도 없다"(8절)는 법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독자들로 쉽게 이해 시키기 위해서,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다"(2절)
다시 말하면 "법이 없으면 죄도 없다"는 법의 생리를
이해 시키기 위해 예를 든 것입니다.
한번 더 강조 하기 위해서
"남편이 죽으면"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않는다"(3절)
다시 말하면,
"법이 없으면 죄도 없다"(8절)는 법의 근본 원리를
이해 시키기 위해서 예를 한번 더 든 것 뿐입니다.
"남편이 죽으면" 가정 법을 쓰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를 든 것을 가지고 남편이 죽었으니,
율법이 죽었으니. 새 시집 가도 된다라고,
이것이 은혜라고 좋아하는
참으로 꼴 불견 아닙니까?
남편이 어디 죽었습니까?
그 반대로 남편이 시퍼렇게 살아있기 때문에
바울은 내가 죽일 놈이 됐다고,
음부가 됐다고 결론을(24절) 내리고 있지 않습니까?
왜? 서론의 예를 들어서,
결론을 돌출하려는 어법을 가지고,
김치국부터 마시면서 남편이 죽었다고
호들갑들을 떠느냐 이 말입니다.
...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없으면
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그 근본 원리와 다른 것이 있습니까!
이 율법의 superior 한 기능에 대해서는
제가 시리즈(하)편에서
좀더 언급하려 합니다.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좀더 수정하시죠
아니라는 입을 꿰매기 전에요
난 김치국 마신지가 오래됐어요
옛날 연탄가스마시고는....
지금 교회가기전에
수술한 집사람 병원 의자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