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고기 진짜로 삶아 먹기
북한에서는 개고기를 단고기라 부른다
달다 라는 말인지는 모르나 검색을 하면 이런다
“북한에서 처음에는 개고기국, 개장국집 등으로 불렸으나,
지난 1985년 김일성 주석이 단고기로 바꾸도록 지시해
보신탕 집을 단고기 집으로 부르고 있다.“
한국에서는 개고기 하면 몸서리를 치는 분들도 있고
맛있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내가 아는 사람은 개를 키우는데 웬만한 목장수준이다
그러나 우리는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고기로 분류(?)했기에
개고기 삶아 먹는 소리란 부정어에 속한다
물론 이런 소리 하면 발끈할 사람들 내가 안다
나는 이런 발끈하는 사람들을 개고기 삶아 먹는 사람들이 말한다
계명을 님/
“이곳에서 복음주의자들이라 한 것은 일반 개신교들이 주장하는
계명은 폐했다고 주장하고 은혜만 주장하는 자들을 일컬는 말입니다.“
이런 말 하는 사람들 머리에는 똥만 차 있다
너희들 율법 졸업했다고 하는 것 보니
일반 개신교회가 계명을 폐했다고 주장하고 은혜만 주장하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구나
아마 그렇게 지래 짐작을 하고 글을 쓰나보다
율법을 님은
깨달음을 중요시 하다가 율법으로 이웃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런 기초적인 것은 다들 아는 것이다
나 역시 하는 말도 다들 아는 것이다
그것을 어떤 기교로 풀이하는데 율법은 우리가 지킬 수 없기에
그분이 대신 지켜주신 것이라는데 나는 동의한다
그래서 나는 율법을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도 없고 지킨 사람도 없다
예수께서 대신 짐을 지시고 우리를 당신의 은혜 안에 거하게 하셨다
그분의 덮어주시는 은혜의 옷자락을 들치고 나올 때는 우리가 죄인이지만
그 옷자락에 숨어 살 때 우리는 의인 된다
그런데 우리는 수시로 그 옷자락을 들쳤다가 숨었다가를 반복한다
그래서 우리는 의인이 되기 위해서 계명이 필요하다고 여길지 모르나 그 반대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대가를 지불하심으로
그 안에 있을 때는 언제나 의인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옷자락을 벗어났다고 양심의 소리를 들으면 죄를 알게 된다
이건 내가 교인들의 율법에 대한 여론을 조사해 본 결과다
율법으로 죄인되거나 율법의 의인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기준에 의하고 양심의 소리에 의해서 죄인된 것이라는 거다
어떤 이는 이것을 깨달음이라 하지만 깨달음이 가지가지라서
그런 언어의 수사로 결정하는 신앙은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각자의 깨달음이 달라서 어떤 깨달음은 다른 이의 깨달음에서 볼 때
죄 속에 거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고기를 안 먹는 사람들이 먹는 사람들의 깨달음 수준을 하늘 못가는 수준으로
폄하하고 비하하고 저질스럽게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런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라 형식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율법의 저주란 말은 무슨 뜻일까?
저주란 한마디로 말해서 죽음을 말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율법의 저주는 그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그분만이 이룰 수 있는 것 아닌가?
우리가 그 저주를 이길 수 있는가?
유한한 생명을 가진 우리가?
그래서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 의미로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다는 표현을
온전한 율법을 이룬다 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이다
율법의 저주는 속박을 의미한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속죄를 행하신 그분께 의지하고 기대는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분의 의의 옷을 입고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고
결국은 인생사 다들 왔던 길을 가는 수준일 뿐이다
하나 물어보자
율법의 저주를 뭐라고 생각하나?
내가 율법의 저주에서 깨달음으로 벗어 날 수 있다고 여기는가?
다음
온전한 율법을 뭐를 말하는 걸까?
예전에는 불완전하고 불온전한 율법을 지켜서 율법의 저주를 받았나?
구약 내내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면 즐거워하던 것은 그럼 거짓말이란 말인가?
그런데 온전한 율법이 와서 그 율법을 행하는 자유를 누린다?
그런 말이 어디 있나?
우리는 율법의 종류를 불문하고 하나로 통일하다가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건 의문의 율법이니 제사법이니 국법이니 하고 핑계를 댄다
어떤 때보면 참 한심한 생각까지 든다
“우리는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분의 사랑이 율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율법의 저주는 그리스도의 저주인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를 용서 받을 뿐 아니라
새로운 삶을 얻는다. 그 삶 속에서 우리는 율법에 대한 순종을 표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 더 이상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자유로 말미암아 그렇게 한다."(안교교과)
구원을 얻으면 더 이상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가?
깨달음에서 오는 자유라는 것이 뭘까?
개인적인 깨달음에서 오는 자유에서 율법의 정죄를 피할 수 있다고 보는가?
그런 깨달음을 가지면 예수도 필요 없을 수도 있다
내가 율법을 통해서 깨달았는데 예수가 무슨 필요인가?
그런데 율법으로 죄를 깨달았지 의를 깨달았는가?
그렇다면 그는 신의 존재다
우리가 율법에 대한 순종의 표현할 수 있다는데
그 말은 무슨 뜻일까?
우리가 야고보서의 율법이란 단어에 얽매이게 해석해서 일어난 해프닝을
구원을 얻었기에 더 이상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고 표현해도 맞는 말인가?
율법을님/
“일반 복음주의 자들은 율법을 없애야 자유가 온다.
그러나 재림주의자들은 율법을 살려야 자유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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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주의자들이 율법을 살리면 계명주의자가 되고
일반 복음주의자들도 율법을 없애지 않는다는 기본도 모른다
우리는 그들과 다른 것이 하나뿐이다
10계명 중에 4째만 폐했다 안 했다고 하고 싸우는 중이란 사실을 알자
그것을 율법 전체를 폐했다고 우리는 억지를 부리고 있지 않는가?
자유의 율법
우리는 이 말의 뜻이나 알고 사용할까?
내가 지키지 못하는 것을 대신 지켜 주면 자유의 율법이란 말인가?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말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자신다는 말이 아니든가?
일반 복음주의 자들은 "율법이 없어야 자유케 되리라" 라고 표현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율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속박하고 저주한다
그 저주에서 살아남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뿐이다
불교에서 깨달음을 중시한다면서
그 깨달음은 루시퍼를 숭배하는 것이라고 목에 핏대 올린 사람이
이 게시판에 있었는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고 했던 사람을
사탄의 종자라고 못에 핏대 올린 사람이 있었는데
노자의 깨달음은 신앙이 아니라고 떠든 사람도 있었는데
기독교의 깨달음은 해탈하는가?
뭘 깨달았는데?
만약 기독교인들이 에센파처럼
수도 중에 깨닫는다면 그것은 도를 어떤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필요하다
항상 율법 속에 묻혀서 그 율법이 주는 의미보다
그 율법의 지킴에 앞장서는 모습으로 자유의 율법이라 포장하는 기술만 늘 것이다
성령을 아무데나 붙이면 기뻐하는 여기 재림교인처럼 말이다
계명을 님/
"보혜사가 오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성령과 함께하는 체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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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절 똑 바로 적자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뜻이 같다고 보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