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판 리더스 다이제스트였는지 아님 샘터에서 였는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대학생 시절 읽었던 인도네시아의 전설하나가
생각이 난다.
하나님이 남자를 만들고는 혼자 살게 했는데 그 남자가
일주일 후에 하나님께 와서 하소연을 한다. 무언가 심심해서
못살겠다고...
그래서 하나님이 뚝딱 여자하나를 만들어서 팔장을 끼고 돌아가게
도와주셨다.
일주일이 지난다음 그 남자가 그 여자와 멀찍이 떨어져서 하나님께
와서는 그 여자를 여기다 다시 놓고 가고 싶다고 소원한다.
이유는 너무 시끄러워서 못살겠다고...
그러면 놓고 가라고 순순히 허락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남자가 혼자 떠나갔다.
일주일 후에 다시 그 남자가 하나님께로 왔다.
그 여자를 돌려달라고...
심심한것 보다는 시끄러운것이 좋으니 다시 데려가겠다는 것이다.
사십년전에 읽은 글이니 표현이 원본하고는 다를 수 있겠지만
그 순서는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는 줄거리다.
결혼생활 삼십여년에 자주 자주 나는 이 전설의 이야기를 떠 올리곤 한다.
국제시장의 그 덕수처럼 나는 경상도 특유의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감정의 표현이 마음에만 맴돌았을 뿐 입으로나 행동으로
표현하는데 시간도 걸릴 뿐 아니라 표현한다 해도 언제나 인색하고 궁색한
앞가림 정도의 것들이었다.
전쟁과 배고픔이 생존을 지배하던 우리모두의 어린시절에 사랑과 관심의 표현이란
밥한그릇 보다 못한 사치스런 종목이어서 우린 배고픔이 가슴에도 있다는 것을
모르고 뱃속에만 있는 줄 알고 자랐다.
그런 와중에서도 아내의 어린시절은 비교적 형편이 넉넉하고 가족의 구성원이 비교적
따뜻한 환경에서 자라서 나하고는 세대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지역적으로
분위기가 다르게 성장했다. 동네 사람들이 인정할만큼 이쁘고 귀여운 맏딸로 태어나서
가족과 사회에서 언제나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 하고 자랐다고 할까.
주변 모든 사람들이 보내는 관심의 눈빛을 오히려 햇볕보다 더 많이 쬐며 자라난 아내는
주변으로 부터 성격도 좋다는 칭찬을 한몸에 받고 자라서인지 시끄러운 여자는 아니라도
경상도 남자가 함부로 다루기에는 힘에 겨운 고급스런(?) 존재여서 위에 말한 인도네시아 전설의
그 남자처럼 나는 특별히 신혼시절엔 하나님께 도로 반납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었다.
전쟁은 육이오만 전쟁이 아니라는 것을 결혼생활을 해본 사람들이 어느정도는 수긍을 할 것이다.
제각기 다른 환경에서 제각기 다른 지역적 배경을 안고 살아온 두 개체가 만나서 생각과 행동과
목적의 합의점을 어느정도 갖게 되려면 상당한 기간 그리고 상당한 전쟁의 상채기를 거쳐서
합의에 도달하는 암묵적 평화가 이르러 온다는 것을 우린 다 뼈저리게 느끼는 사실이다.
전쟁과 평화는 밤과 낮처럼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리듬인지 어떻게 보면 평화를 얻기 위해서 전쟁을 하고
또 평화의 끝에 꼭 어떤 식으로 던지 전쟁은 오게 된다.
그런 와중에 아내는 자주 자주 이런 질문을 내게 했었다.
"Do you love me?"
남자에게 특별히 경상도 남자에게 이 질문은 당혹스러운 질문이다.
"당연하지! 그러니까 같이 사는것 아니야?" 하고 반 신경질 적으로 얼버무리며 돌아서 누우면
뒤통수에 다시 총알하나가 더 날아온다.
"How much?"
눈으로 보고 살갗으로만 확인하던 연애시절의 그 설탕가루같은 알량한 사랑이
몇번 씹으면 쏙 빠져 버리는 신혼의 달콤함을 지나서 서로의 가슴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사랑의 본격적인 관계로 들어가기전에 반드시 다시 확인해야 할 질문들이다.
요한복음 21장으로 가면 온갖 능력을 구사하고 온갖 기이한 이치를 논하던 선생에게 무조건 미쳐서
따라다니던 제자들이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면서 졸지에 무기력한 죽음앞으로 끌려가는 선생의
이해못할 죽음앞에서 실망하고 배신하여 제각기의 길을 떠났을 때 세번에 걸쳐서 철저히 선생을 부인하던
제자를 찾아와 묻는 질문도 그런 질문이다.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겉으로만 사랑하던 예수의 이적과 삶을 거쳐 지나가서
이제는 가슴 깊숙히 그분의 죽음과 사명을 짊어져야 할 적절한 시기에 물어야 하는 근본적 질문이다.
나는 아내의 질문을 통해서 내가 진정으로 아내를 사랑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고 또 마음의 상처들이
치료받는 경험을 하였듯이 이 예수의 질문을 나에게도 던지면서 내가 예수의 모든것을 사랑하는지를
깊이 생각하고 가늠해 보는 뜨거운 경혐을 하게 된다.
적어도 나같은 죄인에겐 세번만 물어야 할 질문이 아니고 날마다 매 순간마다 물어야 할 질문이다.
이 사랑의 본질 앞에서 당혹스럽게 고민하는 죄인에게 성령께서 오셔서 가슴에 십자가를 세우는
기적을 행하실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계심의 결론은 우리가 예수를 사랑하게 되는 그것이다.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고 주님은 그렇게 버린 목숨을 거둬 가실것이다.
안식일 지켰다는 명목으로 시퍼렇게 살아있는 그런 목숨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의 열매이고 결론이다.
먼저 우리를 위하여 목슴을 버린 하나님의 아들을 위하여
우리가 다시 목숨을 버리는 이 사랑의 묘약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이 어디 있을꼬?
모든 교리 그리고 율법들아 이 사랑 앞에서 물렀거라!
"Do you love me, 민초여?"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지켜 줍니다.
어리석고 엉뚱한 이론에 빠지지 못하도록 정기적으로 깨우쳐줍니다.
"매 안식일에 모든 혈육이 내 앞에 이르러 경배 하리라"
하나님을 경배하는것이 작은일, 율법적인 일로 여겨지십니까?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것은 자신의 근본을 잊어버리는것입니다.
창조사업이나, 구속사업이나 모두 근본에 관한 문제 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명령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분께로부터 나온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쉼의 허락 입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분리하고자 하는 시도는 옳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