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주영님! 화답을 하시니 교담을 나누겠습니다. 명증함이 필요함으로 거침없는 표현을 하겠습니다. 시중 잡놈들의 올챙이 뱃속처럼 대응하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신학을 기반으로 하는 의료인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쁜 일과 중에도 모범적이고 역동적인 일과를 보내고 계시는 듯합니다. 오랜 신앙심의 발로라고 여깁니다.
님의 글 속에서도 표현되고 민초의 주 멤버인 것으로 보아 교회의 제반 풍토에 대하여 호의적 시선을 갖고 있지 않은 듯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시류에 비추어 바람직한 자세입니다. 그럼에도 유감이지만 님의 신앙적 맹점 또한 여실합니다. 문양만 조금 다를 뿐이지 님 또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피는 흘려졌다.” 중요한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짐승의 피로 이어진 갈보리의 피가 그 피 흘림의 방점을 찍은 것이 분명합니다. 다 이루었습니다. 대속의 절대 조건이 이루어진 것에 여지가 없습니다. 희생의 실체가 충족되었기에 믿음의 의는 분명하게 안착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우뚝 솟았습니다. 고루한 성소의 제도로 돌아갈 필요가 없음은 자명합니다.
드러낸 바와 같이 성소를 돌아볼 가치에 의문을 품는 것은 님의 정리되지 않은, 다소 엉성한 신앙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직언하자면 시중에 유행하고 다중이 추구하는 관념적 신앙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참 신앙은 생물적 특성이 있습니다. 님은 교회 문화에 익숙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참으로 알고 있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역사 속의 인물까지는 확신하지만 현재의 그분에 대한 인식은 희박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영생에 대한 이해와 그 존재적 실체에 대한 인식은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분은 죽어있지 않고 지금 산 채로 있습니다. 사람이 그 희생의 진가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사의한 그 분을 인지하는 곳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공언하지만 그 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감상적 눈물을 흘리지만 그 희생이 어떤 것인지를 전혀 실감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소를 돌아보는 것은 이해불가의 그 분을 찾아가는 길인 것입니다. 사람이 타고 넘어갈 사다리가 생기도록 그 이성에 증거를 수집시켜 주어야 합니다. 성소 역사의 저변 속에서 그 희생을 만나야 만 이해의 사슬이 풀립니다. 그 때 인간은 이성과 인식을 토대로 한 신앙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믿는 것 같지만 전혀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고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닌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신앙은 허구입니다. 세인이 말하는 스스로 만든 스스로의 신입니다. 요셉의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을 예표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고난당한 그 분을 실제로 알지는 못합니다. 한낮 추상적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김 주영님의 신앙 형성은 사람에게 배운 것에 그대로 머물러 있음을 나타냅니다. 하늘로부터 배우는 것에 대한 경험의 부재를 나타냅니다.
저 자신이 님보다 우월하고 의롭다고 하여 이런 논조를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님의 언급을 되돌려보면 그림자는 님의 것입니다. 님의 신앙 관점은 그림자에 해당된다고 봅니다. 님은 그림자에 접근했을 분이고 저는 실체를 보았기에 이런 차이가 큰 괴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 산 자와 죽은 자가 있습니다. 내가 산 자인가를 매일매일 확인하는 것이 늦은 비에 대한 건실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결론은 님의 신앙이 진정한 산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책 속에 박힌 예수만을 알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쯤에서 패써바이님의 등장이 절실합니다. 이양반한테는 그분이 임자거든요. 왜 요즘은 들락거리시지 않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