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 세 번째 설교다. 이 주제로 설교를 하면 할 수록 길어질 것만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 이번에도 결코 짧지 않았는데 아직도 할 얘기가 많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시편 82편은 진지하게 널리 읽히는 시편은 아니다. 그리 유명하지도 않다. 하지만 이 시편은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시편이다. 시편 23편처럼 내 맘을 위로하고 평안하게 해주지는 않지만 뭔가 불끈 솟아나게 하는 게 거기엔 있다. 하긴 시편 23편도 잔잔한 물가나 푸른 초장만 생각하면 위로가 되지만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느니' 하는 구절은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데(그래야 하는데) 초장과 물가에 맘에 쏠려 그 대목은 슬쩍 건성으로 지나가는 게 아닌가 싶다.
각설하고,
며칠 전에 올라온 녹음에 붙인 글에서도 얘기했듯이 '재미'는 별로 없는 설교가 되겠다. 독자가 생각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얘기가 있어서 그걸로 시간 쓴 보람을 느낀다면 나로선 다행이겠다.
----------
2014년 8월 24일 / 성령강림주일 열세 번째 주일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 3
시편 82:1-8 마가 5:1-13
곽건용 목사
피고로 재판 받는 신들(gods)
오늘은 지난주일 설교의 계속입니다. 이 설교 시리즈는 앞으로 몇 주 더 계속될 텐데 얼마나 이어질지는 저도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아마 9월 한 달은 계속될듯한데 그 전에 끝날지도 모르겠습니다. 10월로 넘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할 얘기는 별로 재미가 없을 겁니다. 주로 성경 이야기를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오늘 설교가 많은 정보 또는 지식을 담고 있거나 그것들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곧 여러분이 이러저러한 지식은 이미 갖고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잘 모르는데 알고 있다고 여겨서 설명하지 않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가급적 설명을 해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니까 재미는 별로 없을 수밖에 없겠지요. 저도 이런 설교를 하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는데 천사와 악마 얘기를 하려니 피해갈 수 없네요.
지난 주일에 마가복음 5장의 군대 귀신 얘기를 읽은 데 이어서 오늘은 시편 82편을 읽습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법정에 나오셔서 신들을 모아들이시고 재판을 하셨다.”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재판과 시(詩)라……. 잘 어울리지 않는 조합 아닙니까? 어울리지는 않지만 좌우간 이 시편은 법정에서 벌어지는 재판을 노래하는 시입니다. 재판장은 당연히 하나님이겠지요. 그럼 피고는 누굴까요? 시인은 피고가 ‘신들’(gods)이라고 했습니다. ‘신들’이라니! ‘신들’이 피고가 되어 재판을 받는답니다.
궁금한 점은 이 ‘신들’은 어디서 왔을까 하는 겁니다. 시편에서 재판을 받는 ‘신들’은 어디서 왔을까요? 구약성서는 야훼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제시하지 않습니까. 야훼 하나님만 진짜 하나님이고 나머지는 죄다 우상이요 허수아비요 허깨비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사야 40장은 “우상이란 대장장이가 부어 만들고 도금장이가 금으로 입히고 은사슬을 만들어 걸친 것”이고 “금이나 은을 구할 형편이 못되는 사람은 썩지 않는 나무를 골라서 구하여 놓고” 숙련된 기술자를 찾아내서 만든 우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신들’이라니요? 야훼 하나님 앞에 불려나가 재판을 받을 정도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신들’이 대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시편 82편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시인은 야훼 이외에도 ‘신들’이 존재한다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신들’은 단순한 우상이나 허수아비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해야 할 ‘역할’이 있고 자리 잡아야 할 ‘위치’란 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제 아래에 있긴 하지만 그래도 수행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겁니다. 물론 이 역할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들’이 하나님에게 부여받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판 받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신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언제까지 너희는 공정하지 않은 재판을 되풀이하려느냐? 언제까지 너희는 악인의 편을 들려느냐?” 아하! 그러니까 ‘신들’이 피고석에 앉아서 재판받는 까닭은 그들이 악인의 편을 들어 공정하지 않은 재판을 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그들이 해야 할 역할은 “가난한 사람과 고아를 변호해 주고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에게 공의를 베풀어” 주는 일이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가난한 사람과 빈궁한 사람을 구해 주어”야 했고 “그들을 악인의 손에서 구해 주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고석에 앉아 있다는 겁니다. 이제 왜 이들이 재판을 받는지가 분명해졌습니다.
이들에 대해 야훼 하나님께서 내린 판결은 이렇습니다. “(이들이) 모두 ‘신들’이고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지만 사람처럼 죽을 것이고 여느 군주처럼 쓰러질 것”이랍니다. 이들은 분명히 ‘신들’입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게다가 가장 높으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제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처럼 죽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들은 본래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되어 있었지만 제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처럼 죽을 것이란 얘기지요.
‘신들’은 어디서 왔을까?
여기서 또 궁금한 점은, 이들 ‘신들’이 어디서 왔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들은 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어디서 나타났을까요? 구약성서에서 하나님 이외의 ‘신들’에 대한 얘기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전혀 없진 않지만 자주 등장하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이런 얘기가 익숙하지 않은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신들’은 삼라만상처럼, 온갖 동식물과 사람처럼 하나님의 피조물일까요? 그렇겠지요. 피조물 아니면 창조자, 둘 중 하나일 터이니 말입니다. ‘신들’이 창조자는 아닐 테니 피조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 역할을 못 했다고 사람으로 강등된다면 그런 존재를 가리켜서 창조자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이들은 피조물임에 분명합니다. 창조자가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왜 삼라만상의 창조를 말하는 창세기 1장과 2장에는 ‘신들의 창조’ 얘기가 없을까요? 사실 창세기뿐 아니라 구약성서 어디에도 ‘신들’의 창조 얘기는 없습니다. 그런데 구약성서는 ‘신들’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얘기가 창세기 1장 26절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우리(복수)가 우리(복수)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복수)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만드신 창조 현장에는 하나님 이외의 누군가가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라는 복수를 사용했겠지요. 이들이 누구일까요?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과 같이 있었던 그들이 누구였을까요? 이 텍스트를 있을 그대로 읽는다면 어떤 신적인 존재를 가리킨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창조하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존재는 ‘신들’일 수밖에 없겠지요.
여러분에게 이런 얘기는 익숙하지 않고 이상하게 들릴 겁니다. 들어본 적이 없는 얘기일 겁니다. 하지만 구약성서는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 창조 시에 하나님은 홀로가 아니었다고 말입니다. 한 가지 보태면 십계명의 첫째 계명은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인데 여기서도 다른 신들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다른 ‘신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절대 그들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 개의 타락 이야기
이제 성서가 분명히 얘기하지 않기 때문에 알 도리가 없는 얘기는 그만 하고 성서가 분명히 말하는 얘기를 해봅시다. 구약성서는 ‘타락’을 말합니다. 구약성서 첫 장을 열면 바로 창조 얘기가 나오고 한 쪽을 더 넘기면 곧바로 ‘타락’ 얘기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창조 얘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타락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창조세계의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음미하고 만끽할 여유도 주지 않고 곧바로 아담과 하와의 타락 얘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했습니다. 그것 외에는 모든 것을 해도 되지만 그것만은 하지 말라 하신 바로 그것을 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겁니다.
이유가 뭐가 됐든, 그리고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든 분명한 사실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타락’이라고 부르고 이들이 저지른 짓을 ‘원죄’라고 부릅니다.
첫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일을 ‘타락’이라고 부릅니다. 이 용어가 제 맘엔 안 들지만 그래도 널리 사용되고 있으니 저도 ‘타락’이란 말을 쓰겠습니다. 창세기가 말하는 타락은 도덕이나 윤리적인 방종이나 파렴치함 같은 것과는 다릅니다. 성서에서 타락은 본래 그가 있던 자리, 또는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난 것을 가리킵니다. 본래 자기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려다가 본래 있던 자리에서 쫓겨난 것이 아담과 하와의 ‘타락’입니다.
‘원죄’라는 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첫 사람이 지은 죄가 대대손손 후손에게 유전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 그것은 성서가 말하려는 바가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교리처럼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원죄에 대해 자세하게 얘기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한 마디만 더 하고 이 얘기는 마치겠습니다. 성경에는 아담과 하와의 죄가 후대에 유전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저지른 짓은 후대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것은 유전이라기보다는 오염된 공기와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게 더 낫습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오염된 공기, 원칙적으로는 벗어날 수도 있고 개선할 수도 있지만 좀처럼 어려운 그 무엇과 같은 것이 됐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서는 ‘타락’을 말합니다. 첫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고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더 낮은 자리로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는 한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 타락을 말합니다. 첫 째가 아담과 하와의 타락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했습니다. 자기들이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려고 했습니다. 뱀이 그렇게 유혹하지 않았습니까. 그걸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거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들이 기왕에도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됐다고 분명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본래부터 ‘하나님처럼’ 창조됐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뱀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이것이 타락의 전부는 아닙니다. 타락한 자가 아담과 하와만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들’도 타락했습니다. 창세기 6장에 그 얘기가 나오는데 짧지만 매우 중요한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이 땅 위에 늘어났고 딸들이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당연한 얘기겠지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아들만 태어난 게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과 신들 사이에 생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sons of God)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저마다 자기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자기 아내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은 다양한 의미로 쓰였습니다. 우선 사람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아 보냄 받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또한 신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간혹 ‘천사’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구약성서에서 ‘천사’를 가리키는 말은 ‘말라크’라는 말이 따로 있습니다. 분명한 점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이 낳은 아들들’이란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대조되고 있으니 누군지 정체가 분명하진 않지만 신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말임에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한 결과 ‘네피림’이라고 부르는 거인족속이 태어났는데 이들은 옛 용사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창세기 6장은 이 수수께끼 같은 얘기 바로 다음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고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언제나 악한 것뿐이란 사실을 아시고 사람을 창조하신 일을 후회하며 마음 아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홍수로 멸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홍수 심판은 사람이 악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6장은 이와 별로 상관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 얘기를 그 가운데 집어넣었습니다. 앞뒤 문맥과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둘 사이의 관련을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홍수 심판이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의 결혼과 무관하진 않음을 암시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 얘기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 자리를 벗어나 타락한 얘기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 이은 두 번째 타락인 것입니다.
세 번째 타락은 ‘공동체’의 타락으로서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가 이를 보여줍니다. 길게 얘기할 시간은 없습니다. 이들이 탑을 쌓은 목적은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해서 자기들 이름을 날리고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했습니다. 하늘에 닿는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처럼 되자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가서 더 직접적으로, 다 친밀하게 소통하겠다는 뜻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니 이 얘기도 결국은 공동체가 자기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얘기가 되겠습니다.
선한 편에도 그 이상의 무엇이 있다!
그렇다면 왜 성경을 하나가 아닌 세 개의 타락 이야기를 전할까요? 그것은 성서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어느 한 부분의 타락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까닭을 누군가 한 편만의 책임으로 돌리기에는 ‘그 이상이 뭔가’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을 탓하고 자기는 책임을 지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실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 자체가 타락의 일부분이지만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남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하나님이 제게 배필로 주신’ 여자가 선악과를 먹자 해서 먹었다고 말했고, 하와도 뱀이 유혹했기 때문이라고 각각 남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그런데 불쌍한 뱀은 탓할 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실망하신 진짜 이유는 그들이 남 탓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사실은 타락의 책임을 어느 한 편에게만 전적으로 물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도 ‘그 이상의 뭔가’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성경이 세 가지 타락을 얘기하는 까닭 역시 ‘그 이상의 무엇’이 있음을 은연중에 보여주려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그 이상의 뭔가’는 악한 현실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편에도 ‘그 이상의 뭔가’가 있습니다. 때로 선한 편에 서 있는 사람들도 그것을 분명히 느끼지 못할 때가 있지만 ‘그 이상의 뭔가’는 선한 편에도 있습니다. ‘그 이상의 선(善)’은 모든 사람의 영혼 깊은 곳에 오롯이 존재합니다. 그 어떤 악에도 불구하고 영향 받지 않고 훼손되지 않고 존재하는 그 이상의 선이 있습니다. 사람 안에 있는 그것을 구약성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도 훼손되지 않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새로운 얘기가 아닐 겁니다. 사람이 저지른 죄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된다면 어찌 그걸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를 수 있겠습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이상의 선한 무엇’은 각 개인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신들’에게도 있고 공동체에도 있다는 겁니다. ‘신들’에게도 보이는 것 이상의 선한 그 무엇이 있습니다. 이는 공동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니버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말을 썼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도덕적인데 그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사회는 비도덕적이란 사실을 우리는 자주 봐옵니다. 그래서 이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에 진실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공동체를 한 꺼풀 더 깊이 들여다보면 거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선한 알짬이 있습니다. 이는 신들에도 마찬가지고요.
오늘을 여기까지 말하겠습니다. 이 설교는 다음 주일에 이어집니다. ♣
2014.09.01 18:47
그래서, 결국 우주의 대쟁투는 있다라고 이 장로교 목사는 말하려는 것인가.
조회 수 635 추천 수 0 댓글 1
덕분에 시편 82편을 다시 읽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