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평화의 연찬 제136회 : 2014년 10월 18일(토)] ‘예수님의 해학II’ 이번 주 '평화의 연찬' 강사는 김춘도 장로입니다. 김춘도 장로는 2014년 8월 30일(토) 서울조선족교회에서 조선족교우들과 (사)평화교류협의회 회원들 앞에서 예수님의 허허로움과 유머러스한 모습에 대하여 명강의를 해주셨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예수님의 말씀의 리듬을 따라 그분이 선택하신 단어들과 행간의 의미를 그 역사적인 배경과 김춘도 장로의 통찰로 더 깊고 더 우리와 가까운 예수를 전해주셨습니다. 이번 토요일 오후, 멋진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를 '유머가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해학을 통하여 느끼고 웃어봅시다. 여러분 모두를 환영합니다. 2014 예수님의 해학(諧謔) II
2014년 10월 18일 - 주님 함께하시는 제136회 '평화의 연찬' -
예수의 말씀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신약은 대부분 심오한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은 구절들이 있어서 우리를 답답하게 하는 구절들도 쉽게 볼 수 있는데,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런 경구 속에 내재하는 날카로운 혁명적인 과격성도 볼 수 있습니다. 대체로 약자와 피해자들에게는 당당함과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주고, 강자와 가해자들에게는 당혹스러움과 부끄러움을 안겨 주기도 합니다. 예수의 비유 말씀이나 경구는 이와 같이 날카롭고 놀라운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번 연찬에서 다루었던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대라”는 주제의 후속편으로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마저 주라" 라는 간단하지만 잘못 이해되고 있는 구절을 오늘 연찬에서 논의하고자 합니다. 우선 이 경구의 제 뜻을 알기위해 당시 옷 입기에 대한 사회관습을 먼저 알아 두어야합니다. 예수님이 사셨을 당시에는 누구든지 옷을 두벌 입는 것을 정상으로 여겼습니다. 하기야 지금과 많이 다르다고는 볼 수 없을 듯 합니다. 당시 재력 있는 사람들은 돈을 꾸거나 상거래를 할 때에 대체로 담보물로 토지 아니면 가축을 활용했습니다. 그러나 소작농이나 농노 같은 가진 것이 변변한 사람들은 내놓을 담보물은 겉옷 밖에 없었습니다. 이 같은 관행은 유대사회에서는 오래 전부터 시행되어 왔습니다. 신명기 24장 10-14절에 보면 겉옷을 담보로 내어놓고 추운 밤을 떨며 지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을 덜어 주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겉옷과 속옷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채권자가 담보물로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벗어 주라고 하였습니다. 겉옷은 외부 날씨에 따라 다소 융통성 있게 활용하는 것인데 반해, 속옷은 항상 입어야하는 필요불급한 옷일 것입니다. 따라서 속옷을 달라고 하는 채권자는 좀 더 악질적인 인간이듯 합니다. 담보물로 처음부터 속옷을 요구하였으니까요. 이런 딱한 경우 예수께서는 겉옷까지 홀랑 벗어 주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아무리 채권자 앞에서라도 둘 중에 하나는 걸쳐야 하는데 모두 벗으라는 것은 완전히 나신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너무 가혹한 명령으로만 보입니다.
당시 관습에 따르면 벌거벗은 몸을 보이는 것은 사회적 금기 사항입니다. 하기야 미치지 않고서야 남들 앞에서 벌거벗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이긴 합니다. 이것은 정상인에게는 커다란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벌거벗겨진 사람은 부끄러울 수밖에 없지만 남을 벗기는 사람은 더 잔인한 사람이란 수치심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몸의 일부를 일부러 드러내는 것이 저항과 결단의 뜻과 이어져있음을 새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예로 삭발은 머리만을 벗기는 일인데도 이것은 수치이면서도 저항 또는 상대방을 향한 비상한 결단을 뜻하기도 합니다. 또한 구약에서도 윗도리를 벗고 바닥에 주저앉아 울분을 표출하는 구절이 자주 나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혹하고 비정한 채권자 앞에서 속옷, 겉옷을 스스로 다 벗어던지는 채무자는 채권자에 대하여 온몸으로 저항한다는 뜻으로 밖에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채권자의 비인간적 탐욕을 자기의 벗은 몸을 통하여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극적인 저항의 행위라고 보겠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채무자 여러분, 너무 가난해 빚을 갚지 못하여 속옷까지 벗어 달라고 하는 채권자의 등쌀에 고생하는 여러분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채권자에게 다 홀랑 내어 주시고 까짓것 발가벗고 당당하게 사시지요" 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들에게 부자 채권자의 비인간성을 폭로하게 가르친 셈이지요. 그것은 당시 로마의 시민지의 수탈적 경제제도에 대한 예수님의 반어적 비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철저한 비폭력 저항을 강조 하셨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경구를 읽고 있어도 이와 같은 뜻이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또한 위와 같은 뜻을 갖는 예수님의 경구에는 "오 리를 가라면 십 리를 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경구에도 예수의 자비로운 "오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군대는 막강하였습니다. 세계를 지배한 군대이니까요. 로마체제는 또한 법질서가 막강하였습니다. 로마군인들은 로마도로를 따라 행군 했습니다. 로마 거리 곳곳에는 이정표가 뚜렷하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인들의 배낭은 무겁기도 했습니다. 군인들의 등짐 지는 수고를 덜어주기 위하여 필요한 경우 로마군법에 따라 민간인들을 징벌 하였습니다. 그 군법에 따르면 민간인들에게 등짐을 지게 할 때는 반드시 5리 (지금의 1.6킬로미터)를 넘기면 군법을 어기게 됩니다. 당시 로마군의 백부장이 이 법을 주로 집행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식민지배국의 군대가 피식민지 민간인에게 등짐을 지울 때, 오 리만 가지 말고 십 리를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명백하게 군법을 어기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신성한 로마의 법을 어기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적절히 이법이 집행된다면 로마군 중대장은 그의 상관으로부터 질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당시에도 군 계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토착 민간인의 원성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상황을 보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미군의 계급이 높을수록 한국인에 대한 주한미국 사병의 범죄에 대하여 더욱 곤혹스러워 합니다. 예수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군 장성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반로마 저항이 로마의 원로들에게 보고 될까봐 항상 노심초사 했습니다. 예수를 극형에 처하였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이 경구는 로마군의 부당한 요구가 폭로되기를 의도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우리를 통하여 무폭력 적극적인 저항을 전하시려 한 것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악의 제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자세, 그것이 현대에 사는 우리들의 자세가 되어야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결코 환상적인 유토피아론자도 아니며, 그렇다고 폭력으로 제도폭력을 뒤엎으려는 테러리스트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주님은 부당한 제도에 순응하도록 가르치는 무저항주의자가 결코 아님을 확인하여야합니다. 교회전통과 기독교 교리가 너무 오랫동안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을 왜곡시켜 왔습니다. 우리의 눈은 값싼 종교적 축복으로 어두워졌습니다.
이 땅에 사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위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 땅에 평화를 만들어 가는 일꾼이 되어야합니다. 아직도 일제의 식민의식에 사로잡혀 예수님이 사셨을 당시에 유대인으로 로마에 적극적으로 부역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일반 유대인 위에서 군림하였던 헤로디안처럼, 아직도 기독교의 가르침을 왜곡하며 무조건적인 자국 국민의 식민 권력에의 순종을 강요하는 자세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목숨을 버리신 고귀한 목적과는 상이함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교리와 신조 교회의 전통과 중용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지 않고 나만 편하면 된다는 보신주의를 지향하는 일부 지도자들의 행동이 성경구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말씀과 행동, 그 당시에 눌리어 살았던 일반 국민의 시대상황을 이해하지 않고서, 이 모든 것을 구속사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보면 예수의 말씀이 지닌 놀라운 지혜를 놓치는 우를 범하게 됩니다.
아담의 원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려는 거대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만 이해된다면 그 뜻에 합당한 예수의 모습만 강조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해학을 지닌 우리와 같은 예수님의 인간적 모습은 아예 무시되고 맙니다.
예수님 부활의 능력을 보는 것도 구속사적으로 보면 너무 중요하지만, 그 분의 통찰력 감동적인 혜안, 날카로운 해학을 실존적으로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더 풍성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을뿐더러 그 당시에 억압을 받는 시민들에게도 부활이라는 미래의 복음보다 예수님이 그들의 편에 속하여 있다는 사랑의 감정을 더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예수는 사랑이니까요. 최근 유일 초강대국의 호전적 정책으로 세계가 긴장을 하며 수많은 난민들이 생겨나는 것을 보면서 교회에 나온다는 성도들이 전쟁을 불사하려는 제도 폭력에 대하여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지금 예수가 우리와 함께 있다면 어떤 판단을 내리실지 한국의 신자들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여야 합니다. 제도교회의 눈으로 심각한 문제의 핵심을 깨닫기 힘듭니다. 예수의 산상수훈에서 번득이는 혜안을 새롭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살펴본 두 경구야말로 정말 교회가 너무 오랫동안 잘못 해석해 왔습니다. 아니면 일부러 제대로 해석을 안 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폭력의 피해자로 하여금 더 큰 폭력에 순종하는 순한 양으로 제도 교회가 가르쳐 온 것 같습니다. 폭력에 대한 무조건족인 무저항주의를 심어 놓은 것이지요. 비굴하더라도 폭력 앞에서 순응하고 모르는 척 하는 것이 교인다운 선택이라고 무의식적으로 가르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의 귓속에는 교리와 전통의 차단장치가 너무 오랫동안 설치되어있지 않아 그 말씀의 뜻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대국이 약소국을 멋대로 농락하려고 해도 약소국이 비굴하게 순종 하는 것에 대하여 오히려 “아멘”으로 축복 해주는 교회의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을 살며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우리들은 예수의 놀라운 지혜를 깨닫고 이 땅에 예수님이 그토록 원하셨던 평화를 만들어가는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어엿한 패배자가 되어 그 무거운 십지가를 우리를 위하여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던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참된 평화와 정의의 기쁨을 맛보게 하시려고 “겉옷까지 벗어주시오” “ 십 리까지 등짐을 지고 가시오” 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음성을 열린 귀로 똑똑히 듣고 올바른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 이번 주는 ‘예수님의 해학 II’ 이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화평의 뜻이' 이 땅에서 신속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평화실천의 장인 연찬(硏鑽) 모임을 함께 이어 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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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6 22:31
[평화의 연찬 제136회 : 2014년 10월 18일(토)] ‘예수님의 해학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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