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 어디에 있는가?
별별 신자도 많고 별의별 교회명칭도 많고 선생도 많고 선지자도 많은 세태이다.
작금의 예수에 대한 신앙과 그 이해는 거의 변질되어 있고 가공되어 있다.
신학계 역시 호젓한 망망대해를 끝없이 표류하고 있다.
“예수는 없다”는 표제는 온 세상의 예수파들에게 내리는 사망선고로써 적합하기 그지없다.
소위 고명한 신학자 그룹도 도찐개찐이다. 저들은 성경을 넘어서지 못하고 성경에 매몰되어있다.
저들은 학자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신자는 아니다.
저들은 지리한 신학사조에 매몰되어 있다. 예수의 역사성을 인정하고 그의 메시야론에 찬동하는 것이 저들의 우월감이다. ‘
예수’라는 실존은 놓쳐버리고 세련된 신학의 관념으로 박제해버렸다.
정평이 난 유명 설교자들도 대부분 한낱 도덕주의자일뿐이다. 저들은 모조품을 가지고 저들을 연명시키고 있다. 그러한 극기주의는 여타 종교의 수행자들보다 결코 우위에 있지 못한 것 역시 사실이다.
예수 믿음을 공언하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진품신자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은 세태가 되어 버렸다. 그 흐름은 날이 지날수록 더해지고 있고 SDA도 결코 비켜가고 있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나름의 종교적 소신을 따라 예수대열에 가담했지만 저들의 예수이해는 거의 맹탕 수준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질주 방향을 심사숙고하지 않는다. 생존에 대해서는 치열할지 모르지만 신앙행태에 있어서는 앞만 보고 무작정 달려가는 짐승의 떼처럼 거의 맹신으로 점철되어 있다.
나는 예수라는 분을 만나지 못했다. 그저 책에서만 읽고 보았을 뿐이다. 그러나 내 행적은 책에서 끝나지 않았다. 책속의 주인공은 내 인식의 망에 포착되었다. 그 사유의 단초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다.
나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동방의 조선반도 아주 끝자락에서 미물의 생명체로 그 운명을 부여받았다.
나는 태양이 내게도 비친다는 것과 먹어야 산다는 연명방식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세상은 내게는 미지의 세계일뿐이다. 인공적 행정지명에만 익숙해져 있을 뿐이다.
나는 ‘예수’라는 커다란 물음표와 마주쳤다.
그것은 열 두해 혈루병 여인의 경우처럼 나의 일방적인 접근일 뿐이다.
나는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
다만 복음서의 기록이 내 영혼을 천지개벽의 계몽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나는 우리의 세상에 성경이 왜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사람들에게는 한낱 미스터리일지 모르지만 예수의 실존은 내게 과학으로 다가왔고 나는 그 운명의 중심에 서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예수교의 진수는 말에 있지 않다. 개안, 눈을 뜨는 것이다.
모든 해괴한 선입견을 지워버리고 산 자들의 나라를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