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2장 - 45 장
자 이제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세계는 기근에 싸이게 되고, 결국 양식이 필요했던
형들은 양식을 구하러 요셉앞에 서게 됩니다. 그때 요셉은 형들을 일부러 모르는체 하며 아주
엄하게 대합니다. "요셉이 형들인줄 아나 모르는체 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요셉은 그 형들을 아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 (창 42:7,8)
왜 그랬을까요? 복수심이 유발해서? 제 생각은 아닙니다. 만약 복수를 원했다면, "자세히 보거라,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라고 물은뒤 자기 자신이 누군지 밝히는게 훨씬더 효과적이었을 겁니다.
그랬으면 형들은 당장 그자리에서 선체로 ...(상상에 맡기겠음^^). 그 다음 천천히 더 강도 높은
벌을 주는게 좀더 복수 다운 복수가 아니었을까요?
뿐만 아니라 사실 요셉은 그의 형들을 이미 용서 한 상태였습니다. 그 맏아들의 이름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므낫세 -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창41:51). 복수가 아니라면 왜 그랬을까요? 여기서 요셉이 형들을 100% 용서하고
그 들을 정말 형제로서 사랑한다는 전제하에 이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답이 나옵니다.
욥이 형들을 정말로 사랑했다면(전 그랬다고 믿습니다), 형들의 입장에서 생각하였을 것 입니다.
만약 요셉이 형들에게 "짜잔" 하고 나타나서 "형님들 접니다! 형들 나쁜 짓 한거 다 용서했으니
이제 우리 다 같이 행복하게 사십시다!" 그랬더라면, 형들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아무 껄끄럼
없이 형제간에 우애를 다질수 있는 관계로 발전 할수있었을까요? 아니 겠지요.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지만 형들은 아직 심리적으로 그 용서를 받아드릴 준비가 되있지 않았습니다.
형들은 요셉에게 "한게" 있기때문에 그 죄책감에서 벋어나지 않는한 요셉과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 하기긴힘들었을 겁니다. 겉으론 괜챃은척 하지만 늘 요셉이 언제라도 화가나면
자기들에게 해꼬지 하질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 요셉에게 진심으로 대하기가 힘들었겠죠.
그래서 요셉은 형들 마음에 뭍혀있는 그 "죄책감"을 해결해 주려고 노력 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요셉이 형들의 죄책감을 먼저 해결해 주어야 그들이 요셉에게 다가 올수 있고 또 요셉이 "거져"
주는 용서도 받게 되고, 요셉과 아무 허물없이 진정하게 우애를 다지는 관계로 발전 할수
있었을 테니까요.
그래서, 요셉은 형들을 그들의 죄책감 으로 부터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형들을 모르는척,
엄하게 다스렸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갑자기 너무 당황스럽고, 황당하기도한 힘든
상황에 부딪치게 될때, 자신을 둘러 보게됩니다. 어 왜 이런일이 나에게 일아났을까?
내게 갑자기 왜이런 "벌"이 내려졌나? 혹 그때 내가 잘못을 저질러서? 아님 저번 날의
그일 때문에? 그러면서 가슴속 깊이 뭍혀있던 "잘못한 것"들이 마음의 수면위로 올라 오지요.
요셉의 형들도 마찬 가지였습니다. 졸지에 정탐꾼으로 몰려 감빵까지 살고 나온 (창42:17)
그들은 요셉이 아우를 대려와 보라고 다그치자 당장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라고 부르짖습니다. (창42:21). 서로 통역을 두고 이야기 했기 때문에
형들은 요셉이 자기들이 한 말을 알아들었다곤 상상도 못했지요. 그러나 요셉은 그 들이
하는 말을 다듣고 자신의 애틋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얼른 밖에나가서 울고 들어옵니다.
우리도 세상살이에 시달리다 영적인 배고품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 예수그리스도께 진리를
구하러 교회를 갑니다. 그러나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의 “엄하신”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우리일상 생활에서도 축복은커녕 우리가 이해할수없는 엄한일을 당하게 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런 엄한 모습뒤에는 애틋하게 우릴 바라보시면서 우리에게 스스로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주시며, 우리마음속 깊이 숨어있는 죄책감으로 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또마음속 깊이
덮혀져 있지만 해결되지 않은 우리들의 상처들을 치유하시려고 눈물흘리시며 노력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여기서 무의식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잠시 삼천포로 빠지겠습니다. 저희 아버님은 포렌식
정신과 의사로(범법자가 진짜 미쳤나, 아님 쇼하나 등을 이밸류에이숀 하는 일) 일하셨습니다.
지금은 은퇴하셨구요. 저희 아버님이 정신과 레지던트로 근무 하실때 일어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 해볼까 합니다.
당시 정신과 수련의 들은 모두 최면술을 배우게 되있었습니다. 강의는
당시 예일대 교수로 계셨던 클리니칼 최면술의 권위자 이신 J님이 (저희 아버님도 이름을 기억 못하시네요)
맡으셨지요. 근데 저희 아버님께선 영 마음이 편치 않으셨습니다. 화잇이 분명 최면술을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강의 듣는 태도가 꽤나 삐딱 했나봅니다. 교수님께서 저희
아버님을 지목 하시더니, ‘인간이란 자기스스로도완벽히속이는능력을갖추고있고,또자신을
속이는게일반화된 디펜스 메케니즘이므로 인간의 진정한 동기를 알기 위해선 정신과
의사들은 그들의 무의식 세계를 들여다 볼수있는 최면술을 꼭 알아둬야 할필요가 있다고
친절히 설명 하셨답니다. 그리고선 자신의 포인트를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하여 간단한
실험을 해볼까 하는데 혹 도와줄수 있겠냐고 물었답니다. 저희 아버님의 대답은 예스 였지요,
삐딱했던 수강태도가 미안하기도 해서…
근데 갑자기 너무 덥다는 느낌이 들으셔서, 창문을 여시면서 “너무 덥고 갑갑하니 일단 창문부터
열고 실험을합시다”라고했더니,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낄낄거리기 시작했답니다. 갑자기들 그러니
너무 기분이 이상해지고 불쾌해서 왜들그러냐고 다그치셨구요. 그랬더니 교수님 하시는말씀,
“실험은 벌써 끝났습니다.” 그러더니 박수를 짝짝치시는데 갑자기 정신이 번뜩들면서 잠시
잊어버렸던 기억이 되돌아 왔답니다. 실험을 하기로 한후, 아버님의 동의하에 교수님께서
아버님께 최면을 거셨답니다. 그리고 깨어나자마자 너무덥고 갑갑한 느낌이 들테니 유리창을
열라고 명령 하셨답니다. 물론 최면걸렸던일을 박수칠때까지 잊고 있으라는 명령도 함께 했지요.
우린 우리나름대로 열심히 믿는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 마음에 과연 무엇이
들어있는지, 우리가 왜 이런 (그런) 행동을 하는지 스스로 모를때가 허다합니다. 우리의 동기
자체도 스스로 속이고 또 속고 사는게 인간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동기는 그 아무도 알수없는
무의식 세계 깊숙히 박혀있지요.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여 나를살피사 내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뜻을 아옵소서”(시편139:23)라고 부르짖었나 봅니다. 사실 우리가 아무리 날고 기는
종교와 철학으로 무장한들 우리는 겨우5%의 의식세계에서 놀고있을뿐, 그 누구도 스스로 자신의
무의식 세계를 클린엎 할순 없지요. ( 요셉이야기는2편 3부로 계속)
계속되는 글에 감사를 드립니다.
마음이 조급하여(분명히 언급할 부분이겠지만....) 이렇게 댓글을 올립니다.
오늘은 계속 마음이 슬픕니다.
창50:15~21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 할까 하고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조사심판에 대하여 아무리 설명하고 이해를 하여도 잘못된 선입관(자신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는다는 자기중심의 사고)으로 인한
야곱의 형들의 이해와 작금 우리의 이해는 별반 다르지 않음에
요셉의 눈물을 통하여 예수그리스도의 눈물(정확하게는 통곡이겠지요...)을 느낍니다.
1844년이 의미가 있다면...
예수그리스도께서 다시 통곡을 하시기 시작하는 시작점이 아닐까 생각이 퍼뜩 스쳐지나갑니다.
그리고 그 통곡의 끝은....다시 십자가로 귀착되어짐을 님의 글을 통하여 경험하게 됩니다.
1844년 이후로 다시 전파되어야 할 기별은 오직 십자가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요셉의 죽음이야말로 형들이나 그 가족의 마음에 남았던 죄의식에 대한 해결의 궁극적 결정체가 아닐까요?) --- 창세기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