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60년대 도시에서는 극장, 제과점을 돌며 청춘 남녀가 사랑을 나누거나 야외라곤 흔히
제방을 따라, 철길을 따라 속삭인 게 도시나 읍 소재지 풍경이다. 대중교통이 빈약하고 생
활 반경이 넓지 않아서 걸어서 등하교하던 때라 우연히 눈에 꽂히면 '히야까시'를 하면서
말문을 트던 때라 웬만하면 어디 사는 누구며, 누구와 남매 간이라는 정도는 쉽게 알 수 있
고, 얼마나 수줍던지 남녀가 친구를 대동하고서야 만날 수 있던 시절이다. 겨울 방학 시작
하자 특히 성탄절 디데이를 치르면서 연인 관계가 분명해지거나 아니면 여름 방학 해수욕
시즌에 결정 타를 날리던 그때부터 청춘 남녀의 사랑은 쉽게 성사되었다. 가끔 동네에 들어
선 가극단이나 활동사진 천막이 시골 연애 둥지이기도 했다.
이 시기는 청소년이 까발라지고 영리하고 속전속결로 남녀 간 사랑이 전보다 쉽게 잉태하
니 자유로운 연애 풍조가 사회상이었다. 그런 좋은 시절에도 연애를 모르고 살아온 지난 세
월이 회한에 사무친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건 사랑을 끝내 열매 맺지 못하고 자살까지 하
는 사랑은 어떤 것인가 내심 그려본다.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랑에 목숨을 바친 순애보를 생
각하면, 살았어도 헛산 기분이다. 20곡 가까운 사랑 타령을 늘 귀에 꽂고 반복하여 음미하
는 이 마음은 허탈하기까지 하다. 어디 가서 헛보낸 청춘을 되찾을 수 있을까. 다시 환생하
면, 꼭 체험하고 싶은 사랑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인스턴트 사랑과 달리 사랑의 실마리부
터 완연히 다른 사랑을 그려본다.
우선 도시가 아닌 시골, 이웃한 마을끼리 오가는 동네가 있는 시골에서 움트는 사랑을 그려
본다. 도시에 유학하는 동네 총각이 방학 때 귀향하여 또래인 이웃 동네 친구와 어울리다
보면, 그 동네 개울가 빨래터를 지나면서 처녀 몇이 빨래하느라 궁덩이를 들썩거리는 모습
이 스친다. 그러나 유독 시선이 꽃인 처녀를 유념하여 그 동네 친구와 희희낙락하면서 그
처녀를 두고 그 친구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러다 보니 그 청년은 먹잇감을 위해 정신없이
헛간에 들락거리는 쥐처럼 행보가 잦으니 그 처녀에 대한 작전이 시작되리라.
그러다 보니 한가위놀이에 서로 탐색하고 스스럼이 없어지면서 겨울 방학이 오고 시골 성
탄절을 맞이하여 새벽 찬양에 서로 어울리면서 서로 탐색전에 빠진다. 눈빛으로 서로 의식
하면서 내심 신뢰가 쌓이면서 겨울방학이 끝나자 청년은 도시로 떠난다. 이때 이미 처녀는
성탄 기념 선물을 그 청년에게 하지 못한 것을 몹시 아쉬워하며 후회한다. 자기 동네 청년
모르게 그 처녀는 편지를 쓸까 말까 망설이다 늦게서야 잠자리에 든다. 등잔에 기름이 졸아
붙어서 사그러질듯 조는 불꽃을 휙 불어 끈다. 부모님 코 고는 소리가 무심하다.
다시 여름방학이 되어 농촌 일손 돕기를 위해 처녀네 모심기에 그 청년이 발 벗고 도와주다
보니 그 동네 다른 청년과 자연스럽게 비교하던 처녀 부모의 안목에도 드니 처녀를 둔 부모
는 그 청년에 유별나다. 그 대학생이 자기 딸에게는 과분하다고 생각도 하나 이번 기회를
이용하여 처녀가 적극적이다. 부모 욕심도 알겠다 처녀는 청년을 위하여 정성을 다한다. 이
미 처녀는 그 청년에게 온 힘을 다 하는 처지가 된다. 그럭저럭 하다 보니 남녀가 동체가 된
다. 처녀에게는 그 청년이 자기 인생의 전부라는 확신을 가진다.
이렇게까지 되기에 그 처녀는 정신적 굴곡이 심했으리라. 처녀가 그 청년을 향한 사랑은 하
늘과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청년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다. 이 소식을 듣
자 이 처녀는 혼수상태에 빠진다. 주변 특히 그 처녀네 부모도 실신한다. 무엇보다 처녀가
실성통곡하더니 집에서 자취를 감추자 부모가 초롱불을 들고 찾아 나섰으나 행방이 묘연하
다. 같은 동네 처녀 친구를 찾았으나 그 친구도 처녀 행방을 모른다. 그러다 날이 환해지면
서 그 동네 나무꾼이 동네 산에 오르자 소나무에 걸린 시체를 결국 발견한다. 온 동내가 삽
시간에 이 사건으로 요란하게 법석인다.
근대 애정 소설의 주제처럼 목숨으로 사랑을 지키고자 한 처녀의 청순가련한 무한한 사랑
을 터득하기에는 여생이 짧은가? 아내를 향한 구원(久遠)의 사랑이 그렇게 풋풋할 수 있을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