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3일 / 성탄 후 셋째 주일
알곡은 곳간에, 쭉정이는 타는 불에
누가 3:15-22
곽건용 목사
죄 사함은 신앙의 출발
세례자 요한이 요단강에서 죄 사함의 세례를 베푼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죄를 사해준다는
데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죄 사함의 종교’라고 부릅니다. 예수는 죄를 사함 받는 길을 열어준 분이고 죄를 사함
받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 복음이라는 겁니다. 기독교가 죄 사함의 종교라는 말은 틀린 말이 아닙니다. 죄를 사함 받는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없애야 할 두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 사함을 ‘공짜’로 얻는다고 여기는 오해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돈을 빌려준 채권자이고 나는 돈을 빌린 채무자인데 내겐 그걸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용불량자가 될 처지에 놓였는데
하나님이 통 크게 은전을 베풀어 조건 없이 모든 빚을 탕감해주고 끝냈다는 겁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당장 죄 사함의 세례를 베푼 요한의 메시지만 읽어봐도 그게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무뿌리에 놓여있는 도끼로 다 찍어
불구덩이로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공짜일 수 있겠나 말입니다.
둘째 오해는 그것을 기독교 신앙의 최종목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 받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목적을 다
이루었다고 믿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심각한 오해입니다. 죄 사함은 중요한 신앙의 주제이지만 그것은 신앙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입니다.
죄를 사함 받고 그에 대한 확신이 서면 거기서부터 ‘예수 따르미’(‘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란 뜻으로 사용합니다)의 길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죄
사함의 세례를 베푼 요한이 예수님에 ‘앞서’ 와서 길을 닦았던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요한도 자신을 가리켜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는 자”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은 요한의 말을 듣고 회개하고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이 메시지가 추상같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메시지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정작 중요한 메시지는 그 다음에 나오는데 그것은 이랬습니다. 요한의 활동을 지켜본 사람들 중에 그가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이에 요한은 딱 잘라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줍니다. 그러나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 오십니다. 나는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으니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
채찍과 당근을 번갈아 쓴다는 말이 있지요. 매를 때렸다가 좋은 말로 달래기를 반복할 때 쓰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요한은 채찍을 줬고 예수님은 당근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곧 요한은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고 예수님은 구원의 복음을 전했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정작 요한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채찍으로 매질을 하겠지만 예수님은 위로와 구원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어루만져 줄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자기보다 더 추상같을 거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거란
말입니다. 곡식을 추수해 오면 알곡과 쭉정이가 섞여 있어서 그 중 알곡을 골라내야 합니다. 예수님은 손에 키를 들고 곡식을 탈탈 털어서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울 거라고 요한은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꺼지지 않는 불’은 영원한 심판의 지옥 불을 가리킵니다.
곧 쭉정이는 영원한 심판의 지옥 불 속으로 던져질 거란 얘기입니다.
이래서야 그 누가 예수를 믿고 교회에 올까 싶습니다. 예수 믿는 게 이렇게 어려워서야 예수 믿겠다고 기독교 신앙에 발을
담글 사람이 얼마나 될지 심히 의심스럽습니다. 물론 이것이 신앙의 전부는 결코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예수 따르미의 길을 걷다 보면 의미
있고 보람 있고 행복을 주는 일들도 많이 일어납니다. 다른 어디서도 느낄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과 은혜, 은총을 경험합니다.
곳간에 들어갈 것인가 지옥 불에 떨어질 것인가 사이에서 늘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것만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수 믿는 게
거저먹는 것은 결코 아니란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예수 따르미, 그들은 ‘야훼의 남은 자들’
예수 믿는 데서 오는 최고의 기쁨과 보람은 무엇일까요? ‘예수 믿기 정말 잘 했다!’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 일을 어떤
걸까요? 예수 믿으면서 누리는 최고의 은혜와 은총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건강과 재물의 복을 누리고 죽은 다음에는 천당에 가는
영적 축복까지 누리는 걸까요? 예수 믿으면 이런 축복을 받는데 왜 예수를 안 믿겠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정말 그렇습니까? 과연 이것이 예수
믿는 데서 누리는 최고의 보람이고 기쁨이고 행복입니까?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예수 따르미가 겪어야 하는 고통과 고난은 생각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예수께서는 분명히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일방적으로 기쁨, 행복,
축복만 말하는 것은 이 말씀을 무시하는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예수 따르미의 진정한 보람과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그것을 ‘야훼의 남은
자들’이 갖는 자부심이라고 불러 봅니다.
‘야훼의 남은 자’(the Remnant of YHWH)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중요한 신학
사상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고 멸망시킨다 해도 그 중 소수의 의로운 사람들은 남겨두어 그들로 하여금 새로운
출발을 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명맥을 잇게 하신다는 사상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백성을 재건하기 위해 하나님이 남겨놓은 소수의
사람들을 ‘야훼의 남은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오늘 예수 따르미의 보람과 행복은 그들이 야훼의 남은 자들이라는 자부심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서 야훼의 남은 자들이 하는 역할에 있다고 믿습니다.
야훼의 남은 자가 갖는 선민의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선민의식이 세상 사람들은 다 망해도 자기들만은 하나님에게 구원받을
거라고 믿는 것이라면 남은 자 의식은 세상 사람이 모두 잠들었을 때 세상을 위해 깨어 기도하고 있다는 믿음, 세상의 유혹과 세상의 그릇된 가치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신앙으로 올바로 실천해야겠다는 분명한 의식입니다. 이런 바른 신앙과 의식을 갖고 야훼께서 벌이시는 구원사역에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바로 남은 자의 자부심입니다.
야훼의 남은 자들은 세상의 삐뚤어진 가치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물질의 신 맘몬에 굴복하지 않고 남아있는
무리입니다. 이들은 나만 잘 살면 그만이다,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다, 나만 구원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세상 모두가
복되고 행복하게 사는 길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기도하며 그것을 위해 분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성서의 시편과 예언서는 이런 자들을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도 불렀습니다. 이들은 물질적으로만 가난한 것이 아니라 영으로도 가난한 사람들, 영으로 주리고 정의에 목마른
사람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이요 남은 자들입니다. 오늘날 예수 따르미는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기대감으로 가득차서 교회에 오게 합시다
여러분은 왜 교회에 옵니까? 오늘은 어떤 기대를 갖고 교회에 왔습니까? 왜 우리는 ‘스포츠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TV만 켜면 온갖 흥미롭고 박진감 넘치는 운동경기를 볼 수 있는데 그 재미난 걸 보지 않고 어두침침한 교회에 왔습니까? 자동차 타고 몇 시간만
나가면 너른 바다와 눈 쌓인 산 등 기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는 남가주에 살면서 그걸 마음을 정화하지 않고 왜 사람들이 모여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회에 왔습니까? 일주일 동안 바쁘게 사느라고 못 만났던 친구도 만나고 쇼핑도 하고 나들이도 하고 영화구경도 할 수 있는
편안한 휴일에 왜 그런 것들을 다 뿌리치고 여기 왔습니까?
저는 깨지고 부서지러 교회에 온다고 믿습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가차 없이 깨지고 우리 심령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부서지기 위해서 교회에 온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일 주일에 하루 교회에 나와서 예수 따르미로 잘 살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세상에 나가지만 한 주간동안 세상에서 살다보면 알게 모르게 세상에 동화되고 세상의 가치를 온몸으로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자신을 바라보는
일이 고통스럽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오는 목적은 비슷한 아픔과 지향점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모여서 한 주간의 삶을 나누고 각자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서 나를 깨뜨리고 부서뜨리고 해체함으로써 새롭게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 나오는 목적은 깨지고
부서지기 위해서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지나칠 정도로 친절하고 모든 면에서 편안하며 필요 이상으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런
데 오면 편리하고 편안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체 이런 곳에서 어떻게 마음이 깨지고 영혼이 부서지겠습니까. 도대체 누가 이런 곳에서 아프고
쓰라린 현실의 고통을 체감하며 흐느껴 울겠습니까. 아, 세상이 지금 이대로 가면 어떻게 하나, 세상이 이대로 가다가 어떤 비극적인 결말을
맞으려고 이러나……. 이렇게 염려하고 탄식하며 기도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이런 세상에 살면서 취하고 마비된 감각을 일깨우는 각성제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우리 자신이 부서지고 깨지고 각성해서 그 깨어 있는 의식과 삶을 세상에 퍼뜨려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따르미는 남은 자들로서, 야훼의 가난한 사람들로서, 또는 영으로 가난하고 정의에 주린 사람들로서 세상이 섬기는 맘몬을
뿌리치고 진정한 자유와 정의와 평화, 평등이라는 소중한 생명가치를 세상에 퍼뜨려야 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영적(spiritual)이긴 하지만 종교적(religious)이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곧
교회를 비롯한 종교기관들을 절대자에게 나아가게 해주는 공동체로 여기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그것이 무엇이 됐든 종교기관을 통해서 믿음에 이르고
신앙이 자라는 걸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일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교회에 가고 싶다는 열망이 일어납니까?
오래된 습관이나 어린 시절에 주입된 죄의식 때문에 마지못해 억지로 교회로 향하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교회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무슨
일이 나를 놀라게 할까, 어떤 말씀이 나를 깨뜨리고 각성하게 할까 등등에 대한 갈망과 기대감을 갖고 집을 나섰습니까?
사람들로 하여금 기대감을 갖고 교회에 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저와 여러분 모두가 깊이 관심하고 해야 할
일입니다. 아마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종교와 정치에 대해서는 가급적 말을 하지 않는 게 이 사회에서의 예의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거기 구애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에 대해 더 많이 더 자주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신앙하는가, 우리는 왜 교회에 나오는가, 우리는 예수 따르미로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고 얘기해야 합니다. 2013년
향린교회는 교우들이 기대를 갖고 오는 교회, 교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마음 설레며 궁금해 하면서 오는 교회로 만듭시다.
물론 예수 따르미가 가야 하는 길은 어려운 길입니다. 하지만 그 어려운 길을 가면서 얻는 기쁨과 행복과 보람이
있습니다. 다른 데서는 경험하지 못하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을 서로 나누면서 2013년 한 해 열심히 살아봅시다. 이 길을 걸어가는 교우들
모두를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고 축복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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