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음이 온이유 <펌글>
신적인 어떤 대상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어떤 능력자의 힘을 빌어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발판을 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오히려 자기 존재를 버리기 위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그 용어가 왜 생겨났으며
왜 그토록 믿음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해 알지 못하면
전혀 엉뚱한 믿음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믿음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하나님이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은 후에
눈이 밝아져 자신들이 벗은 줄을 알고 나뭇잎으로 가렸습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무엇이 자신에게 이득을 가져다주고
해가 되는지에 따른 행동을 하게 합니다.
그 지식은 철저히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에 사용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성향이 철저히 이기적인 것은
모두 아담의 타락한 생명을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따라 희생적인 사람과 이기적인 사람이 있어서
사람들은 희생적인 사람을 높이지만
희생이나 헌신도 이기적인 삶의 다른 표현임을 안다면
사람이 철저히 이기적이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이기적으로 살면 죄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 증거로 아담이 살던 시대의 사람들의 죄의 삶은
하나님을 자극했고 그 결과 대홍수의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했던 노아와 그 가족만이 살아남았습니다.
다시 사람들이 지면에 번성하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한 사람을 불러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우는
아브라함이라는 인물로서
하나님은 그를 통해 처음으로 믿음을 계시하셨습니다.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타락한 사람이
처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죄인이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는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믿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사람이 우선 알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선을 추구한다는 사실로써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 믿음을 계시하시고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을 드러내기로 하셨습니다.
그것은 죄로 오염된 사람들이 선을 추구한다고 해서
결코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번성케 하여 한 민족이 되게 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전 인류를 믿음으로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시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기준을 제시 하고
그것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지켜야 할 말씀이기 때문에 율법으로 불리웠습니다.
율법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 데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그것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인의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라
결코 의인의 삶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
의인의 삶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함을 알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 후에 그 믿음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로 영접하여
죄인의 상태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영원히 하나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의 믿음이란,
타락한 자신의 생명을 버리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죄인인 자신의 생명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히 여겨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알고 버려서 믿음에 이르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으로 살기를 거부하고
오직 성령(하나님의 영)으로 사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믿음은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이나 보람된 삶을 이루기 위해 도움을,
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능력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삶이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힘쓰거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그분의 도우심이나
능력을 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질이나 건강, 진로 등과 같은 자신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그리스도께 기도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믿으면 구원'이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믿음이란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죄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버려졌다는 사실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인데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믿음이 강조되는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선한 일을 하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선한 일을 해도 죄의 생명은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여전히 죄인입니다.
또한 그 선한 일 마저도 자기 만족과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떠난 죄인은 선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에 나가 세상 일을 멀리하고
예배와 기도, 말씀, 봉사, 전도, 선교와 같은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고 신실한 삶을 산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의인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선하고 의로운 행위로는 죄의 생명이 바뀌어지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믿음에 대한 잘못된 개념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행한 것으로 의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향 때문에
믿음이라는 용어가 생겨난 것입니다.
사람이 의인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의로운 일을 행함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기독교는 그처럼 믿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살기위해 먼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믿음이 강조되는 것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는 죄인이
선하고 의로운 행실로 의인이 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죽음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생명을 받을 때에만
의인으로서의 삶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선하고 의로운 행위를 통해
의인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하고 의로운 행위를 강조합니다.
그같은 개념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온 후에도
여전히 선하고 의롭게 살려하는 의도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믿음에 서있지 않고 행위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이 나타난 배경에는
사람이 아무리 선하게 살지라도 선해질 수 없으며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인으로 주장할 수 없고
오직 믿음을 통해 자신의 죄의 생명이 실제로 죽어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으로 받을 때에만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의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믿음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단순히 그가 계신 것과
사람들을 대신해 죽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신 것에 대한 동의가 아닙니다.
그 믿음은 죄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자신의 존재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는
죄인의 생명에 속한 미움이나 증오, 원망, 불평, 살인, 간음, 시기
정욕, 이기심, 명예심, 자기 자랑, 자기 사랑등도 함께 죽어
나타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같은 것들은 자신의 죽음을 믿고 그리스도를 생명 삼아 살기 때문에
죄인의 삶이 종결되고 의인의 삶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믿음이란
좀 더 나은 삶이나 좀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종결함과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통해 사시도록 허락해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는 삶, 그것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며
오직 믿음으로만 의인이신 그리스도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