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이 2 개월전에 출판된 "토마스 피케티(Thomas Piketty)"가 쓴
"21세기 자본"을 읽느라고 씨름하고있다.
장장 700 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다.
수량도 방대하거니와 그가 도입한 통계와 데이타가 방대하다.
그의 말 마따나 컴퓨터가 없던 과거의 경제학자들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던 정보와 통계를 도출 하였기 때문이다.
이 사실(컴퓨터 기술)에 대해 그는 과거의 학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 말했으나,
실은 과거의 거장들의 목소리를 일거에 잠 재우고자 하는 그의 복심이기도 한 것 같다.
지난 300년 인류 역사를 총집계하여 방대한 통계수치를 가지고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인류의 불평등을 없앨 수 있겠는 가?
하는 것이다.
요사이 글로발 경제구조가 부자와 가난한 자의 거리가 자꾸 벌어지는 것이
지구촌의 공통 관심사이다.
그래서 부를 어떻게 공평하게 나누느냐?가
각 나라의 정치 사회의 두통거리며 이슈인 것이다.
그는 책 서두에 자본론을 쓴 맑스의 이론을 부정하는 것 같이 했으나
결국 맑스는 불평등을 계급의 투쟁으로 해소하려 하였으나,
피케티는 세금으로 그 불평등을 해소 하자고 하는 것 같다.
결국은 그도 맑스와 그 궤를 같이 하는 것 같다.
그러던 중 이 아래 예언님이 옮겨 쓴 엘렌 화잇의 몇 문장을 읽고
나는 그만 맥이 풀려 버렸다.
"모든 사람이 균등하게 분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주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자들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증언보감 4, 455)
맔스나 피케티가 주장하고, 또 하여 왔지만
신의 복심은
"불평등이 세상 끝까지 있게 하신다"는 결론이 나왔으니,
책과 씨름 하고 고민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말이다.
이래서 김이 빠져 버린다.
순간 기분이 나빠진다.
계속,
"인류를 특징짓는 상태의 다양성은
하나님께서 품성을 시험하고 계발시키기 위하여
계획하신 수단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증언보감 4, 455)
"다양성" 또는 "불평등"은 민주주의 또는 민주 자본주의 의 토양이다.
불평등이 없으면 자본이 생기지 않는다.
동기가 안생기는 데 열심히 자본을 만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품성을 시험하고 계발...계획하신 수단들 중 하나"
참으로 기가막힌 말이 아닌가.
민주 자본주의를 유지하시는 분이 결국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나는 이러한 핵심을 찌르는 말을 예언의 신을 통하여
대할 때 마다 할 말을 잃는다.
엘렌 화잇의 거두절미하고 내 지르는 이러한
무식(^^)한 말들이 사실은 두렵다.
그녀가 이러한 용어와 사회, 정치 경제를 알아서 이러한
글을 썻을 까? 아닐 것이다.
투박하고 거침이없고 좀 무식하게 썼다고 해서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그녀의 글에는 신의 복심이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자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그분을 섬기지만"
결국 신은 가난한 자의 손을 들어 주심으로
불평등을 허락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참 신은 공평하신 분이시다.
엘렌 화잇의 글
기분 나쁘다고 해서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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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 님:
<교회증언 4, 552>
빈곤이
언제나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회의 계급은
결코 평등해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류를 특징짓는 상태의 다양성은
하나님께서 품성을 시험하고 계발시키기 위하여
계획하신 수단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큰 열심으로
하나님의 현세의 축복들을
모든 사람이 균등하게 분배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창조주의 목적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자들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들과 부자들은 다 같이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바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추종자로 주장하는 자들 가운데서
대부분의 경우,
가난한 자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그분을 섬기지만,
부자는
그들의 세속적인 보화에
그들의 애정을 끊임없이 붙들어매고
그리스도는 잊어버린 바 된다.
이생의 염려와
부에 대한 탐욕이
영원한 세계의 영광을 가리워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