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탕님 답이 늦어 미안합니다.
제가 필두에 서야 할 입장이 아니라 생각하지만 소신을 감추지는 않겠습니다.
이곳의 많은 분들과 예수라는 믿음의 바운더리를 공유하고 있지만
저하고는 많은 이질감이 있습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아는 것’의 차이라고 여겨집니다.
“어떻게 아느냐” 이지요.
저 자신도 교회주의에 대한 당위에 대하여 의당 지당하다 여깁니다.
저도 예외 없이 맹목적인, 단순하고 철없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지금 제가 교회의 상태를 바라보는 시각은 상당히 부정적입니다.
기성교회가 죄와 부정과 알력이 많고 구성원의 저급한 수준,
이러한 도덕과 교양 차원의 적대와 반감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그 방향과 기초가 크게 어긋나있다고 여깁니다.
당연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라 가르치고 믿고 있습니다.
교회출입자라면 누구도 불문하는 만고불변의, 교회의 초석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예수란 한낱 종이에 그린 그림과 같다고 여깁니다.
예수 중심, 오직 예수는 서툰 시늉과 미사여구로 보입니다.
예배에도 설교에도 공부와 각종 훈련에도 허상 예수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예수라는 실체를 붙잡지 못할 때에 교회공동체는 잘 봐주어야 도덕공동체일 뿐입니다.
교회의 방향은 크게 빗나가있고 복음은 크게 오해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로서의 바른 행실 위주와 주일, 안식일 준수, 성경지식 쌓기,
헌금 장려 봉사활동등이 교회의 사명이자 주기능처럼 되어있습니다.
‘믿음’이란 극히 추상적 정의에 머물러 있습니다.
‘믿음’이란 그 다양성과 난해함은 그야말로 오만가지 유형으로 나타납니다.
예수에 대한 이해는 거의 감상에 머물러있습니다.
사람들이 역사적 예수를 인정할지는 몰라도 현존, 현재의 예수에 대해
거의 눈을 감고 있습니다. 그 실체에 대한 접근은 그야말로 맹탕수준입니다.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니라 동의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성경절을 잘 암송하고 교리를 잘 알아도 예수를 아는 것과는 별개라 여깁니다.
교회재정에 큰 역할을 하고 교회모임에 열렬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살아있는 자들의 나라를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세상은 죽은 것에 반해 예수가 있는 세상은 영원한 것들이겠지요.
사람들이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가시권 밖의 실체에 대해 저는 그 이해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신념을 넘어 실제의 과학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이 피상적인 것에 머물 때 신자의 회개도 역시 미완에 그치고 맙니다.
회개는 교정과 수정에 그치고 매너의 세련됨으로 국한되고 말 것입니다.
신자의 회개가 따르지 않을 때 그 결과는 극히 자명하다 여깁니다.
또 다른 차이점을 말하자면 목표점을 아는 차이라 여깁니다.
목표물을 보고 가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는 현저할 것입니다.
저는 성서에 왜 출애굽의 여정과 가나안 입성이 기록되어 있는 이유를
저의 내면의 경험에 비추어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도덕과 성일 준수의 강조는 그 뒷전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촉매로 하여 그 실물에 대한 추적과 발견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인간의 완벽으로 채운다 하여도 위의 것으로 채색되어지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은 허접한 미완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저는 사람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위를 향하여 접근하고 있습니다.
위라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극히 모호한 추상이지만 저에게는 실제의 포착입니다.
저는 성경을 들여다보며 하늘 가나안과 그 주인을 주목합니다.
굳이 율법과 규례의 조항을 세세히 암기하지 않을지라도 저는 서서히
위의 분위기에 동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예수는 살아있다.‘고 부르짖었던 여자들의 외침은 지금도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의 믿음은 일개 관념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실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다 결과 없는 허망한 교양 생활로 그치고 말 것이라 여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