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교인들의 똥 같은 머리에는/계명을 님
어제 안식일 우리 교회에서는 성만찬 예식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는 생각지 않던 십자가상의 강도가 왜 그리도 보고 싶은지
그 친구 정말 복 받았다 하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더군요
그렇게 험하게 살다가 한 마디의 구원 요청에 복을 바가지로 받은 녀석
그 강도가 얼마나 부러운지요
안식교인들의 똥 같은 머리에는
우리 교인들의 똥만 찬 머리에는
율법이라 하면 십계명이란 등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모세가 말하는 율법 즉 토라를 이스라엘이 어떻게 우려먹었는지
오늘 우리는 또 어떻게 우려먹고 있는지
그것 생각이나 하고 글을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로마서7장은 십계명을 설명하는 장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도
아니요 십계명이 맞아요 하는 근거 한 구절도 못 대면서
주구장창 다른 소리만 하고 있네요
내가 말하는 율법은 십계명을 말하고
졸업하는 율법은 탈무드와 장로의 유전과 이스라엘이 가졌던 율법에 대한 편향된 사상을 말한다 해도
무슨 말인지 감도 못 잡으니 답답하기 짝이 없군요
율법 없이 은혜를 논하자구요?
그건 안 된다는 말을 뒤에 설명하는데
머리 둔한 사람들은 못 알아들으니 다시 반복해 드리죠
“율법은 근간이 되는 겁니다” 여기까지는 십계명 이야깁니다
“없는 듯이 졸업하자” 이건 현대판 탈무드라고 말했습니다
손에 잡혀 줘야 말귀를 알아듣습니까?
“그러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정말 그렇습니까?
붉은 글씨는 내가 설명하면서 글을 쓴 부분입니다
율법 없이는 은혜가 없다구요?
그건 도의 초보를 걷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예수를 발견하는데 그 예수가 내 죄를 위해 돌아가셨는데
그것 깨닫는 사람은 법 없이도 산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그 말을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표현했는데
그런데 율법이 언제까지 우리를 억누르고 있어야 한단 말이요?
율법이 몽학 선생일 때는 은혜로 가는 길잡이를 했습니다
은혜로 간 다음은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 것 보다 은혜 아래 살았던 양심이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에 심어진 법을 가진다고 바울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돌에 새긴 율법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그럼 마음에 새겨진 그 법은 어찌하렵니까?
아직도 돌비에 정신 팔려서 잣대질 하고 계실 겁니까?
오늘 우리가 가진 마음의 빚은 은혜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갚지 못한
양심의 가책입니다
그런 것도 아니고 아직도 십계명 문자 자락이 문지방에 걸려서 해매이고 있다면
몽학선생에게서 더 배워야 한다는 겁니다
매일 죄 용서만 받을 거라고 은혜를 구한다면 아직도 몽학선생의 슬하에서 자란다고 봅니다
더 크고 높은 이상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우리가 아직도 율법을 자구에 얽매어서
죄 용서만 바라고 있다면 무한한 은혜와 사랑은 언제 맛보는데요?
매 안식일마다 교회라는 거대한 무덤 속에서 죄 타령만 하고 산다면
우리의 신앙에 대한 기쁨은 다른 이에게 어떻게 전할 건데요?
아직도 율법 없이 은혜 받는 법도 못 배웠다면 매일 죄 타령이나 하고 산다면
그게 무슨 은혜 가운데 사는 모습일까요?
죄가 없으면 은혜가 없습니다
그 말 맞습니다
바울이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매일 죄 가운데서 은혜를 구하면 “은혜 중의 은혜”란 예수를 닮는 일은 언제하나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정죄함을 받지 않으면 없는 듯이 졸업이 가능합니다
그런 막대기 같은 율법은 졸업이 가능합니다
아직도 내가 졸업하자는 법을 십계명이라 우기려면 졸업하지 마십시오
시편에는 율법이 6개
말씀이 90개
율례가 31개
도가 11대
법도가 25개
계명이 27개
증거가 33개
법이 9개 등 230개의 법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것이 십계명을 지칭하며 어떤 것이 일반법을 지칭하는지 연구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건 모두 십계명을 지칭한 건가요?
한 번 설명해 보실래요?
율법을 졸업하면"남편이 죽는 것" 입니까?
율법을 졸업하면 남편이 죽습니까?
오히려 내가 물어 봐야 할 말이군요
바울이 말하는 남편이 누군데요?
누군지 알기나 합니까?
함부로 죽이지 말고 답해 보세요
하나님의 율법을 탈무드나 일반 사회법으로 보는 시각이
아주 잘 못된 시각입니다.
그래서 율법에 대힌 오해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누차에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법을 탈무드로 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님들이 잘못 읽어서 그렇게 각인되어 아무리 설명해도 못 알아들은 것뿐입니다
사회법이나 유대인들의 일반법이나 뭐가 다르지요?
오늘 우리는 유대인들의 일반법 즉 사회법을 일부는 계명이라 포장하여 지키고
일부는 폐지된 법이라고 안 지키지요
섞어 짠 베, 눈썹 사이의 털 미는 것, 사생자는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말아라
등등 수많은 것 폐했다고 스스로 장담하지요
그러면서 내가 이런 법들이 일반 오늘의 사회법과 같다고 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어쩌고 하면서 헛다리짚고 있지요
바울이 말했듯이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역활을 합니다.
세상 어느 법이 그리스도에게 이끌어 주는 법이 있나요?
세상 많은 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끌지요
세상 법이 오늘 우리의 육비에 새긴 법과 동일 할 경우가 얼마나 많은데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부모에게 효도해라
그게 하나님의 법에만 존재하던가요?
세상 법에도 그것 세분해서 존재하거든요
우리는 두 법을 적절히 혼합해서 양심껏 지키지요 안 그래요?
종말로 내가 말합니다
하나님의 법도 우리가 양심에 따라 행하지 않고 법에 따라 행하면
졸업하셔야 합니다
안식일이 계명으로 존재하게 되면 졸업하셔야 합니다
마음으로 감사하고 그 날이 다가옴을 환영하고 감을 아쉬워하는
그런 신앙이 안 되면 평생 율법 붙잡고 살으셔야 합니다
어떻게 일반사회법과 감히 비교를 하다니요.
정말 몰라도 너무 모르십니다.
님도 매우 감정을 앞세우는군요
정말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말은 내가 할 말인데요?
막가파 식의 대답을 하시는 군요.
몽학선생 밑에서 빨리 해방되십시오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율법과 은혜의 관계
어떤 인간도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온 인류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고 이것을 바꾸거나 취소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5:12에는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전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율법은 『네가 죽을 네 날들이 가까우니』(신 31:14)라고 말씀하고 있고, 로마서 6:23에서는 『이는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씀한다. 율법은 생명의 직분이 아니라 돌판에 기록되고 새겨진 죽음의 직분(고후 3:7)인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허물과 죄들 가운데 죽은(엡 2:1) 그 어떤 죄인도 구원해 줄 수 없으며 구원을 도와줄 수도 없다.
아무도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구원은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9).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분 앞에 의롭게 될 육체가 없나니』(롬 3:20a). 『우리가 행한 의로운 행위에 의하지 않고』(딛 3:5). 『우리의 행위에 따라 하신 것이 아니라』(딤후 1:9). 『그러나 우리는 다 불결한 것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걸레 같으며』(사 64:6a).
이러한 구절들은 행위로 규정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즉 십계명이나 황금률을 지키는 것, 교회 출석, 미사 참석, 침례, 기도, 금식, 고백 성사, 자기 부정, 또 그 밖에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 애써 추구하는 다른 모든 형태의 공로들을 구원의 방법으로서는 매우 분명하게 배격하고 있다.
구원은 행위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구원은 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은혜로 된 것이면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 그렇지 아니하면 은혜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라. 그러나 행위로 된 것이면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니 그렇지 아니하면 행위는 더 이상 행위가 아니니라』(롬 11:6).
『이제 일하는 사람에게는 그 보수가 은혜로 여겨지지 않고 빚으로 여겨지지만, 행함이 없어도 불경건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롬 4:4,5). 행위라는 체계 아래서는 죄인이 모든 것들을 책임져야 한다. 그러나 은혜 아래서는 모든 것이 구세주께 달려 있다. 행위 아래서는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재판하시지만 은혜 아래서는 완전하게 용서해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불경건한 자들만 의롭게 여겨 주신다. 즉 거룩한 자일 때가 아니라 죄인인 자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다. 앞서 제시한 구절들이 가르쳐 주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만약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스스로의 행위로 의를 이뤄낸다면 당신은 하늘 나라에 가기 위해 혼자 애써 노력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빚을 지신 것이 되고 당신을 하늘 나라에 보내 주심으로 그 빚을 갚으셔야만 한다. 이 가정대로 정말 선행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이 전해 주는 진리가 아니다.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지는 것이다.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잃어버린 인간의 구원을 위해 드려지셨기 때문이다. 『그가 친히 나무에 달린 자신의 몸으로 우리의 죄들을 담당하셨으니』(벧전 2:24). 『그리스도께서도 죄들로 인하여 한 번 고난을 받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벧전 3:18a). 『예수께서는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드려지셨고 우리의 의롭게 하심을 위하여 다시 일으켜지셨느니라』(롬 4:25).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고전 15:3b). 『그때 예수께서 그 식초를 받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다 이루었다."고 하시더니 고개를 떨구시고 숨을 거두시더라』(요 19:30).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8,9).
인간이 해야 할 부분은 오직 하나님께서 수행하시도록 그분만을 신뢰하고 또 그분께서 값없이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이 자랑할 수 있을 만한 우리의 행위의 결과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믿음으로"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다. 회개한 죄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믿음뿐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믿음이면 충분하다고 정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믿음은 인간의 공로를 요구하지 않는다. 『은혜를 따라 되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되거니와』(롬 4:16). 만일 믿음에 어떤 공로가 있다면 그 믿음은 은혜가 일할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올린 것같이 인자도 그렇게 들려올려져야만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3:14,15).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대에 걸린 놋뱀을 보는 것으로 그들의 믿음을 보여 주었다(민 21:5-9). 이와 같이 우리도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피흘려 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 누구도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서들을 통해 증거된 것이니라. 곧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것으로 모든 자와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 22).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율법의 행위들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단정하노라』(롬 3:28). 성령님께서는 로마서 3:28에서 우리가 율법과 은혜를 혼동하지 않도록 명확히 보여 주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에는 혼잡한 믿음이 만연하고 있다. 어떤 누구도 그 자신의 행위로는 하늘 나라에 갈 수 없고,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행위도 갈보리 십자가에서 온전히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더해질 수 없다.
4.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해 놓으심
구원 계획에 있어서 율법과 은혜와의 관계는 초대 교회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율법 시대가 갈보리에서 종결되면서 은혜 시대로 전환되었지만, 이 갑작스런 변화는 물 흐르듯 아무런 일 없이 진행된 것이 아니라 엄청난 고투가 치러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회에서 그 해결점을 찾았다. 즉 이방인들은 할례받을 필요가 없고, 모세의 율법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바울은 11절에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가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믿으며 그들도 마찬가지니라』(행 15:11). 또 이 공회는 24절에서 이방인들을 유대화하려는 잘못된 선생들의 그릇된 가르침에 대해 책망하고 있다. 『우리가 듣기로는 우리 가운데서 나간 몇몇 사람이 말로 너희를 괴롭히고 너희의 혼을 파멸시키며 말하기를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라고 하는데 우리는 그들에게 그러한 지침을 준 적이 없노라』(행 15:24).
그러나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 문제의 결론을 확정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에 있던 유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복음을 다른 각도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즉 우리가 은혜로 구원은 받았지만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유지할 수 있고 그래서 할례는 행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나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으로부터 그렇게 빨리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됨을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너희를 교란시키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개시키려는 것이라』(갈 1:6,7).
성령님께서는 율법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 바울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율법으로 의롭게 된 너희는 누구든지 그리스도가 무용하게 되고 은혜로부터는 떨어져 나갔느니라』(갈 5:4). 『오 어리석은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가운데서 십자가에 처형되신 채로 너희의 눈 앞에 분명히 제시되었는데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도록 누가 너희를 미혹하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알고자 하는 것은 오직 이것이니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더냐? 아니면 믿음을 들음으로써냐?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성령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온전해지려 하느냐?』(갈 3:1-3)
실제로 할례받은 자들은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하는 속박 아래 놓여 있었다. 『내가 할례받은 모든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온 율법을 행할 의무가 있는 자라』(갈 5:3). 율법 아니면 은혜다. 당신이 유대인의 안식일과 같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순간 당신은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할 책임이 있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의로운 사람을 위하여 제정된 것이 아니라, 불법자들과, 순종하지 않는 자들과, 경건치 않은 자들과, 죄인들과...』(딤전 1:9a).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불경건하지도 않고 죄인들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의 의를 입었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것으로 모든 자와 믿는 모든 자에게 미치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혀 있다(갈 2:20)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고(골 3:1) 그분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천상에 함께 앉히셨으니』(엡 2:6).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경건한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율법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율법은 오직 아론의 제사장 직분(priesthood), 그의 자손들(family), 레위 지파, 유대 민족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은혜는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멜키세덱 제사장 직분과 직결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율법과 유대인의 안식일 아래 자신을 귀속시키는 순간 그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 직분에 속박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가게 되는 하늘 나라(heavenly place)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마태복음 5:17을 인용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을 폐기하거나 없애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이루려고 오셨다는 것에 동의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율법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지켜져야 하는데, 첫 번째는 율법에 완벽하게 복종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0:28에 나오는 율법사에게 "그것을 행하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고 말씀하셨다. 두 번째는 죄값으로 받게 된 사형 선고대로 죽어야 한다(골 2:14, 15). 우리 주님께서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지키셨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존중하셨고, 자신의 생애 동안 그것을 훌륭하고 명예롭게 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한 할례의 일꾼(롬 15:8)으로서 율법을 지키셨고, 요한복음 8:46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시며 유대인들에게 대답을 요구하셨다.『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에 대해서 힐책하겠느냐』
주님께서는 또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율법을 존중하셨다. 십자가에서 번제로 드려지시므로 율법이 요구하는 한 측면을 이루신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께 무한히 헌신하라는 율법의 기준을 완성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을 죄로 삼으시어 속죄제물로서 십자가에서 드려지게 하셨다(고후 5:21).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형벌을 판결받은 모든 죄와 죄인들을 대신하시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정당화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율법의 모든 요구 사항을 이루신 사실은 죽은 사람들로부터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보좌로 올라가심으로 드러났다.
갈라디아서 3:24은 율법주의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아래 있다고 주장하면서 들고 나오는 또 하나의 성경 구절이다. 『그리하여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우리의 지도교사가 되었으니』그러나 이어지는 25절 말씀에 주목하라.『믿음이 온 후로 우리는 더 이상 지도교사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요한 것은 할례나 무할례가 아니라 새로운 본성을 가진 피조물이다.『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으되 오직 새로운 피조물뿐이니라. 이 규례를 따라 행하는 자들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 위에 화평과 자비가 있을지어다』(갈 6:15,16).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이 신비는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요, 곧 영광의 소망이라』(골 1:27). 이 말씀의 의미는 믿는 자 안에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인의 날마다의 삶 가운데 잣대가 되시며 법과 규범이 되신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께서 자신 안에 사시도록 자신을 내어드리고 동시에 그분을 통해 산다면, 그 사람은 그의 몸과 혼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고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님 안에서 살고 그분 안에서 행하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한 것을 반대할 법이 없느니라』(갈 5:23).
율법과 은혜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쉽게 나타난다. 율법은 행하면 살게 된다고 말하지만, 은혜는 믿으면 산다고 말한다. 율법은 사람이 반드시 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말해 주지만, 은혜는 하나님께서 이미 다 이루어 놓이신 것을 말해 준다. 율법은 종의 멍에이고 그 끝은 죽음이다. 그러나 은혜는 생명의 기증자이고 영생의 능력을 선물로 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설교하고 가르치며 유대인들의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명령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그르치는 자들이다. 또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십자가에서 나타난 복음의 영광과 그 능력을 통한 은혜를 강탈하고, 우리에게 종의 멍에를 씌우며 날과 달과 절기와 해(갈 4:10)를 지키도록 만든다. 그들은 갈라디아서 1:6-9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나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부르신 분으로부터 그렇게 빨리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됨을 이상히 여기노라... 우리가 전에도 말한 것같이 지금도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으리라.』 "저주받다"라는 단어는 "anathema"이고 그 의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해서 그를 지옥에 가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믿는 자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고(롬 8:2), 율법에서 해방되었으며(롬 7:6), 율법에 대해 죽었다(롬 7:4). 구원은 100% 하나님께서 이루셨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B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