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23일 / 주현절 여덟 번째 주일
인생은 리허설이 아니다!
마태 6:9-10
곽건용 목사
턱없이 부족한 물로 세수한 사람들
2차 세계대전 시기 아우슈비츠 등 유대인 수용소에서 그들이 겪은 참상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쓴 자서전이나 수기, 소설 등의 덕분이지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매체는 영화일 겁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수용소 실상은 대부분 지난 수십 년 동안 제작된 수많은 영화들에서 얻은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영화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벌어진 일을 그대로 묘사하는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절대 재현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게 뭔지 아십니까? 글이 됐든 그림이 됐든 음악이나 영화가 됐든 절대 재현하지 못하는 게 있는데 그것은 ‘냄새’라고 합니다. 그렇지요? 아무리 잘 만든 다큐멘터리도 냄새만큼은 재생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 사람은 다름 아니라 수용소에서 살아나온 한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수용소가 가두고 혹사하며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나치는 그들에게 물을 거의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가장 기본적인 생리현상인 대소변을 볼 시간과 장소도 주지 않았답니다. 그러니 수용소 안이 어땠겠습니까. ‘분뇨와 동거하는 생활’이었겠지요. 그들은 자기들이 본 대소변 위에서 먹고 자고 했던 겁니다.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 아주 작은 양밖에 주지 않는 물의 일부를 세수하는 데 쓴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여러 사람들이 남긴 얘기에서 드러납니다. 이때 나치가 그들에게 준 물은 깨끗한 물도 아니었습니다. 더러워서 마시면 대개 배탈이 날 정도였지만 그래도 마실 물도 부족한 상황에서 그걸로 세수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그렇게 귀한 물로 세수를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 물로 세수를 했던 사람들이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생존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물로 세수했던 사람들은 사람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감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썼고 결국 그런 사람들이 살아남더라는 겁니다.
그 가운데 프리모 레비라는 화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훗날 거기서 겪었던 일을 책으로 썼습니다. 그런데 제게 충격적인 일은 레비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읽고 정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우슈비츠 같이 극한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는데 대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요?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그런데 알고 보니 레비처럼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는데 나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고 하네요. 심각하게 깊이 생각할 물음을 던져주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오늘 그 얘기를 할 준비는 되어 있지 않습니다. 훗날 언젠가는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좌우간 산다는 게 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진정 사람이 살고 죽는 일은 영원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일까요?
현세가 전부가 아니라고 가르치는 종교들
많은 종교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말하고 그것을 준비하라고 가르칩니다. 기독교뿐 아니라 힌두교와 회교에서도 내세를 말하고 그리로 가는 길을 가르칩니다. 불교는 이와는 좀 달리 윤회를 말하긴 하지만 말입니다.
기독교가 내세에 대해 가르친다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신자에게든 불신자에게든 현세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내세가 있는데 불신자는 지옥의 뜨거운 불속에서 영원히 살고 신자는 온갖 좋은 것이 넘쳐나는 천국에서 영원히 산다고 가르칩니다. 물론 기독교만 이렇게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힌두교와 회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는 이와는 조금 달리 해탈하기 전까지는 윤회가 계속된다고 가르칩니다. 현세에서 바르게 잘 살면 그 다음 생에서는 더 높은 존재로 태어나고 바르지 않게 살면 더 낮은 존재로 태어난다는 겁니다. 이렇듯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종교마다 차이가 있지만 현세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고 가르친다는 점에서는 위의 종교들이 공통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이상의 종교들이 가르치는 바와는 크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것과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내세와 관련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것을 가르친다는 얘기가 되겠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기독교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종교는 현세와 내세의 불연속성을 강조합니다. 현세에서의 삶과 내세에서의 삶이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현세에서는 고생하고 고난을 당하지만 다음 생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거기서는 현세에서의 고통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복을 누리게 될 거라고 가르칩니다. 반대로 현세에서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복을 누리고 산다면 내세에서는 그 반대가 될 거라고 가르치지요. 현세에서 고통을 겪으면 겪을수록 내세에서는 복락을 누리고 현세에서 복을 누리면 누릴수록 내세에서는 고통을 당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현세에서의 삶은 길어야 1백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반면 내세에서의 삶은 영원하다고 말하지요. 더욱이 현세에서의 삶이 고통스럽고 괴롭고 내세에서는 복락을 누린다면, 그리고 현세에서의 삶은 짧고 내세에서의 삶이 영원하다면 신앙의 최종 목적이, 그것이 구원이 됐든 열반이 됐든 뭐가 됐든 고통스럽고 짧은 현세에서의 삶은 복되고 영원한 내세에서의 삶을 위한 수단으로 떨어지고 따라서 현세에서의 삶은 무가치하게 여길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현세에서의 삶은 ‘리허설’에 그치게 되겠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이들 종교의 가르침의 중요한 차이는 현세와 내세의 관련성에 있습니다. 현세와 내세 사이에 관련성이 있나 없나, 단절인가 연속인가, 만일 연속성이 있다면 그게 어떤 성격인가, 이것이 문제라는 얘기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삶을 지금 여기로 끌어들여라!
예수님은 어떠셨을까요? 예수도 내세를 믿으셨을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내세를 믿으셨습니다. 지난 주일에 얘기했듯이 예수님도 ‘시대의 아들’이었고 당시 사람들 대부분이 내세를 믿었으며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현세와 내세의 연속성도 믿으셨을까요? 그렇습니다. 예수님도 둘 사이에 연속성을 믿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현세와 내세의 연속성은 현세에 바르게 살면 내세에 복을 누린다는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현세와 내세의 연속성은 전혀 다른 성격이었습니다. 그 차이의 중심에 예수님의 하나님나라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현세에서 바르게 살면 내세에서 복을 누리고 현세에서 바르지 않게 살면 내세에서 고통을 겪는다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는 그런 게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세에서 복 받고 살려면 지금 바르게 살아야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그대는 영원히 살고 싶은 그 방식대로 지금 여기서 살고 있습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천국 또는 하나님나라로 보내는 것보다는 하나님나라를 지금 여기 이 세상에서의 일상의 삶 속으로 가져오시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첫 외침은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였던 것입니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지금 여기 가까이 왔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사람에게 저 멀리 까마득한 어딘가에 있는 하나님나라로 가는 길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저 멀리 까마득히 먼 어딘가에 있고 먼 미래에나 갈 수 있다고 믿었던 하나님나라를 지금 여기로 불러오셨습니다.
기독교인은 이중국적을 갖고 있는 사람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싶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영원히 살게 된다면 그 삶은 어떤 것이면 좋겠습니까? 여러분이 영원히 살고 싶은 삶의 모습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계시록에는 하나님나라가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가득한 세상이라고 말하는데 만일 하나님나라가 그런 곳이라면 저는 거기서 살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보석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맛난 음식으로 가득한 세상이었으면 더 좋겠습니다. 이건 심각한 얘기는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하나님나라는 죽은 다음에 가는 세상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그 나라의 삶을 지금 여기로 끌어당겨서 살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복음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냐, 어떤 모습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달리 표현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정의를 강조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유를 강조하며 또 평화를 강조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 모든 것들을 뭉뚱그려서 ‘샬롬’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에 못지않게, 아니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게 먼 미래의 일도 아니고 가까운 미래의 일도 아닌 지금 당장 여기서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이란 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나라를 살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지금 하나님나라를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원한 나라의 삶을 우리가 지금 여기서 살 때 하나님나라는 이루어진 거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하나님나라는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현재 우리가 선택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라가 임하옵시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은 “평화는 단지 우리가 찾는 머나먼 목표가 아니라 그 목표에 이르는 수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하나님나라도 이와 비슷하다고 믿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우리가 추구하는 머나먼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인 구원의 삶이기도 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은 지금 여기서 실현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뜻에 기쁨으로 순종하며 완전히 새로운 삶에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삶에로 당당히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골고루 아낌없이 선물로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를 지금 여기로 끌어당겨 사는 삶이 되겠습니다.
얼마 전에 한인들의 이중국적 허용 여부가 관심사였던 적이 있습니다. 이중국적이란 말 그대로 두 가지 국적을 동시에 갖고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미주 한인의 경우에는 한국국적과 미국국적으로 동시에 갖는 것이 이중국적이 되겠습니다. 이미 여러 나라가 이중국적을 허용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도 이중국적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 또는 미국국적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나라 국적입니다. 이 세상 나라는 우리에게 세금을 내라고 하지만 하나님나라는 가난한 사람 돌보라고 합니다. 세상 나라는 우리를 전쟁에 동원해서 서로 싸우고 죽이게 하지만 하나님나라는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고 원수를 사랑하고 축복하라고 합니다. 세상 나라는 우리더러 그 안에서 정의, 자비, 사랑, 평등과 평화를 포기하고 살라고 하지만 하나님나라는 정의, 자비, 사랑, 평등, 평화를 지금 여기서 이루라고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인생은 리허설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절대로 리허설이 아닙니다. 인생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살기 위해서 건너야 할 강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영원한 구원의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적으로 표를 구하려고 뛰어든 전쟁터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끌어당겨서 실현해야 하는 무대입니다. 그것은 리허설이 이루어지는 연습실이 아니라 실제 연극이 공연되는 무대입니다. 지금 여기 이외에 하나님나라를 살 수 있는 무대는 없습니다. 다시 말씀하지만 인생은 리허설이 행해지는 연습실이 아니라 공연이 벌어지는 실제 무대입니다. 우리는 이 무대에서 리허설이 아니라 실연(實演)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의 실연 말입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실연을 한 사람들에게 무엇이 준비되어 있을까요? 저도 아직 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우리가 기대하고 상상할 수도 없는 멋진 세상을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으시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그 세상에 가서 놀라 기절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현세를 하나님나라로 살아야겠습니다. ♣
오늘저녁의 성경공부에서
인용하려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