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상과 내 신앙
트로츠키는 공산주의자입니다
스탈린에 의해 사회주의를 신봉하지 않는 항복주의라는 딱지가 붙여지고
혁명 수출을 꾀하는 모험주의자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항복주의자가 아니었고,
소련의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의 단계적인 집단화를 추진시킴으로써
혁명을 지키고 코민테른에 의해 세계혁명을 촉진시키도록 역설했고
무력에 의한 혁명수출에는 반대했지요.
그런 그가 권력투쟁에서 실패하므로 스탈린에게 쫓겨서 멕시코까지 왔다가
그곳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등산용 도끼에 맞아 죽었습니다.
세상에는 2인 자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언제 등을 쪼개고 나타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트로츠키가 1920년대 주장했던 신경제정책은
고르바초프의 시장개혁의 역사적 선구로 평가되었고
그로 인해서 고르바초프는 트로츠키를 복권시킵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을 이야기 합니다
" 내 인생의 경험에서
실패와 고통은 승리를 압도한다고
이것으로 이성 진실 결속 안의 내 신념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이로 인해 내 신념은 더욱 굳건해 졌습니다.
그대들에게서 세상의 희망을 봅니다"
비록 볼세비키에게 당해서 하찮은 등산용 도끼로 맞아 죽을지언정
그는 볼세비키(다수당)에게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야비한 숙청만 뺀다면 재림교회는 공산주의입니다
일사불란하게 나가야 만이 된다는 공산주의 사상입니다
공산주의가 칼 막스의 사상이듯이
그의 사상의 근저에는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유대인의 피가 바로 야훼에 대한 절대복종입니다
그런 사상의 근저를 배경으로 재림교회가 만들어 졌다고 나는 봅니다.
중앙 집권제, 교리의 일관화, 종말론에 대한 집단 폭거 등등
교단의 세력에 반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은근히 몰아내는 것입니다
종교가 그럴 수 없다고 하지만 그 종교가 구악의 대명사가 되면
모세가 아니라도 모세의 자리에 앉고
다윗이 아니라도 다윗의 깃발을 펄럭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성경이라는 거룩한 말씀과 마지막 백성에게 주었다는 증언의 말씀으로
우리는 난도질을 예사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대상이 장로라면 더 쉽게 난도질합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그 말씀에 의한 치외 법권을 주장합니다.
도전을 모르는 지도자는 불쌍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다보면 자신의 죽음의 행렬조차 구별 못합니다
자기가 죽어서 상여를 매고 가는데 자기가 따라가면서 울고 있는 모습이 됩니다
전에 U.C에 목을 맬 때
죽어도 한 번 움직여 보고 죽자 하고 시작한 겁니다
그냥 앉아서 죽으려니 너무 원통한 겁니다
우리 선구자들이 가슴 조이며 못 먹고 못 입고해도
의지 하나로 참고 만든 것이
역삼각형 교단으로 변모한 것을 볼 때 이건 아니다 싶어서 움직인 겁니다
그런데 그 긴 시간표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
우리가 그토록 존경하는 대총회였습니다
그 대총회는 회의 하나로 우리의 의지를 짓밟았는데
전에는 이 교단의 선지자도 상거가 먼 호주로 쫒아 낸 경험을 가진
그런 집단이 바로 대총회였다는 것을 기억나게 했습니다
그래서 대총회의 결의가 만능은 절대로 아니라고 다짐했는데
그게 한국 현실에서도 나타난 것입니다
서두에 기록한 트로츠키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내 인생의 경험에서
실패와 고통은 승리를 압도한다고
이것으로 이성 진실 결속 안의 내 신념을 파괴할 수 없습니다.“
트로츠키는 신념의 사나이였습니다.
새로운 세계를 정착하는 일에 공산화된 정형보다
그는 사회주의적 정령이 옳아 보인 것 아닐까요?
가슴대신 피가 뛰어도
살아있다는 감각조차 잃어버립니다.
트로츠키처럼 우리는 우리 중의 누구를 보면서
세상의 희망을 본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세상은 아무도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데
그 알아주지 않는 것이 자신감이라고 스스로 속이면서 우린 신앙을 하고 있습니다.
실패는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래서 그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면 고통도 없습니다.
독일의 시성이라는 궤테가 말했다고 하던가요?
"하룻밤 빵과 인생을 생각하면서 울어보지 않은 사람과 친구하지 말라"
아마 그럴 겁니다.
인생의 실패와 고통을 맛보지 못한 우물 안 개구리들이
아무리 멋진 합창을 한다 해도 밖에서는 눈 하나 까닥거리지 않습니다.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현실인데요.
우린 아직도 남은 자라고 자기에게 최면 걸고 살아갑니다.
우리와 고통을 함께 할 우리의 지도자가 얼마나 될까요?
예루살렘에서 슬피 우는 자는 얼마나 될까요?
통곡의 벽을 아무리 두들기고 억울해 하며 울어도
고통의 쓴 잔은 평신도에게 맡기고 구경이나 하고 있지나 않을까요?
현대의 재림교회는 실패를 딛고 서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 고통의 눈물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은 절대로 공짜가 없습니다.
언제나 대가를 지불해야만 승리의 발판을 마련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실패를 고통으로 울어본 사람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칼질에 능한 선수들은 제사장이 되기 전에 백정이 됩니다.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눈물과 사랑이 아니라
푸줏간의 칼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재림교단이 진정한 자유를 얻는 단체가 되려면
거룩한 제사장의 무리가 이 교단을 지도해야 합니다
옳지 못한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일은 여간해서 도전하지 않으려 하고
기어가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데도
정작 자기를 바라보는 눈길조차 이해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실패와 고통 그리고 진정한 자유는 투쟁으로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투쟁이라니까 머리에 띠를 매는 것으로 오해합니다만
투쟁은 영적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내면의 삶을 살찌우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자유를 누리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하늘의 자유를 이야기 못합니다
그럼 내 신앙과 내 사상의 근저에는 무엇이 존재할까요?
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살맛나는 로산의 집
http://kim3004.hompy.com
인터넷 안식일학교교과해설
눈물의 젖은 빵을 먹어본적 없는 사람이 어찌 인간의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며 쓰디쓴 인생의 슬픔의 잔을 맛보지 못한사람이
어찌 제대로된 인생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힘겹게 투쟁하시는 로산님의 교회에 대한 진실된 사랑이
느껴지는것 같아 한편으론 가슴이 아파옵니다
님의 이런 힘든 싸움이 언젠가는 결실을 맺게 되기를 꿈꾸며
힘내시고 건강하시고 영원히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