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
뱀의 허물
곤충의 허물
사람의 허물
식물의 허물
허물이 무엇인가?
자신의 몸을 보호하던 물질이다.
내 고향에서는 대파농사가 지역 소득 작물이다.
그런데 파밤나방이라는 벌레가 지독히도 괴롭힌다.
아무리 농약을 쳐도 잘 죽지 않는다.
처음에는 파의 겉껍질과 속살사이에서 파를 갉아 먹다가 점점 성장하면서 파 대롱 안에서 겉껍질만 남겨놓고 갉아먹으니 파밤나방의 피부에 닿지가 않아 농약으로 죽일 수가 없다
정말 골치 아픈 나방이다
순식간에 온 밭에 퍼져서 폐농하는 농가가 많았다
그래서 벌레가 들어있는 파 잎을 일일이 손으로 뜯어서 길에 버리는 방법으로 퇴치하는 원시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그런데 획기적이 농약이 개발되었다
농약이 파 잎에 흡수되고 그 파를 갉아먹는 벌레가 그 파 잎을 먹게 되면 바로 죽지를 않지만 허물을 탈피 할 수 없어서 죽게 된다.
자신의 허물이 성장하면서 자연히 찢어지고
새로운 허물이 대체되어야 세균이나 각종외부 질병에서 보호를 받을 텐데
허물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서 허물을 벗어버리기 전까지는 훨씬 강할 수가 있으나
몸이 성장하는데 허물이 벗어지지 않아 허물에 갇혀서 결국은 죽게 만드는 허물 강화 젭니다
모든 생물은 자신을 보호하는 허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허물을 벗겨보면 추합니다.
그러나 벗어버리기 전의 허물은 자신을 보호하던 보호막입니다.
나를 보호하던 보호막이 아깝다고 끝까지 보호막을 강화하고 아까워하면 결국은 죽습니다.
이미 몸속에서 새보호막이 형성되어있으니 고통스러워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허물을 벗어버리는 순간 성큼 성장한 몸을 갖게 되고 더욱 자유스럽습니다.
그러나 성장한 만큼 더욱 큰 허물이 몸을 보호합니다.
성장할수록 허물이 커지고 그런 만큼 허물의 모양도 더욱 징그러워집니다.
산이나 들에서 종종 허물을 벗다가 마저 다 못 벗고 죽어있는 뱀을 볼 때가 있습니다.
곤충의 허물은 여러 번 탈피 후엔 마지막 가장강한 허물을 준비합니다.
마지막 허물을 벗어나면 화려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뀝니다.
저주스럽던 모양의 배추벌레에서 하얀 나비 흰나비로 탈바꿈합니다.
보기만 하면 배추를 순식간에 먹어치우는 벌레라고 저주하고 죽이지만
하얀 나비로 변신한 배추벌레는 아이들이 예쁘다고 같이 놀자고 따라 가고 흉측한 옛 모습은 잊은 체 노래하고 시를 짓습니다.
온몸을 쐐기 털로 감싸고 접근하면 사람과 짐승에게 고통을 주던 애벌레도 마지막 허물을 탈피하면 아름다운 나비나 나방이 되어서 날아갑니다.
우리삶에서도 누군가 자신을 자랑삼아 보여주던 나의 모습이 얼마나 위선적인 볼품없는 허물에 둘러싸여있었는지 성장하고 되돌아보면 부끄러워집니다.
그러나 성장한 내 모습은 더욱더 큰 허물이 감싸고 있습니다.
통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찬양한 알렉산더 대왕이 있는가하면
모든 재산을 다 가난한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오직 낡은 통한만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그를 향하여
아테네의 가장 큰 위선자라고 호통 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인생의 자랑거리가 무엇입니까?
뒤 돌아보면 모두가 허물에 가려진 표리부동한 위선 아니던가요?
선을 가장할수록 더욱 커다란 허물로 자신을 보호하고 있잖아요?
끊임없이 성장하지만 항상 우린 자신의 허물에 숨어있는 추악한 모습과 위선자일 뿐입니다.
자신의 가장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무방비상태의 번데기 시절을 지난 후에야 아름다운 나비가 되듯이
내 모든 자랑을 멈추고 나의 가장 흉악한 모습을 만 천하에 무방비로 내놓고 죽은 듯이 번데기로 살고 나서야 참다운 자유의 삶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허물이 보기 싫다고 허물먼저 벗어버리면 죽습니다.
그런데 성장하고도 허물을 벗지 않겠다고 하면 또한 죽습니다.
송충인 솔잎을 주야장창 씹어 먹고
배주벌레는 배추를 파밤나방은 파 잎을 담배나방은 고추를 씹어 먹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나의삶이 아름답다 우겨도 누군가 나로 인하여 피해를 입습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그렇습니다.
나의 허물이 적으면 작은 나비로 호랑나비처럼 커다란 허물을 간직한다면 멋진 호랑나비로 변신합니다.
곤충은 보이는 애벌레의 크기에서 차이가 나고
사람은 그 생각하는 크기에서 차이가나니
안다고 크게 떠벌일수록 더욱 큰 허물에 가려진 커다란 위선자입니다.
그래서 온갖 수사로 의로운척하는 사람의 허물은 더욱더 잘 보이고 더욱 흉하고 쐐기처럼 아프고 가렵고 괴롭습니다.
다행이 허물은 벗어나면 호랑나비로 변신하겠으나
자신을 변호하고 자랑으로 일관한다면 그 안에 갇혀 죽겠죠.
우리교회를 또 여기에 대입해봅시다.
1844년 대실망후에 변신했습니다.
1860년대 또 변신했습니다.
1888년 변신을 했습니다.
우린 과감하게 우리를 보호하던 것들 허물들을 버리고
새롭게 변신했습니다.
변신할수록 더욱 성장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허물에 갇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직은 번데기 과정은 아닌 것 같은데
허물벗기를 두려워합니다.
허물 벗을 때 마다 죽을 고통을 맛봤지만 벗고나 선 더욱 크게 성장했습니다.
이제 다시 허물을 벗어야합니다.
율법 주의적 안식일에서 이웃 사랑 하나님 사랑의 안식일로 변해야합니다
시한 벗어난 일요일 휴업령변해야 합니다.
우린 남은 무리고 너흰 바벨론이라 정죄하는 세천사의 기별이 변해야합니다.
28개 교리가 56개로 늘어서 더욱 강한 허물을 형성하던지 우린 변해야합니다
종교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 기가 막히게 적응했습니다.
변해야한다고 UC도하자고 했고
이미 공감대는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대론 안 된다.
우리의 허물을 벗자고요.
지경야인님 많은걸 생각하게하는 좋은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