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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카스다에서 최병기 목사님이 퍼 오신 글입니다



정치인은 반드시 정적을 가진다는 면에서 모든 정치인에게는 정치적으로 승리해야 하는 적이 존재한다. 그 속에서도 김대중처럼 적들이 많았던 경우는 한국 현대사에서 없었다고 할 것이다.

 

김대중을 비난하는 책들에는 동교동24시부터 해서 손충무의 김대중 X파일, 조갑제의 김대중의 정체 등 다양하다. 초기 신변잡기에 관한 것에서 출발해서 최근에는 김대중은 빨갱이다라는데 촛점이 맞춰지고 있는게 유행이다.

 

신기한 일일 뿐이다. 김대중이 더 이상 정치인이 아니어도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공격은 멈추지 않고 있다. 마치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잡는 격으로 아직도 김대중의 후광이 두려운 사람들이 많다고 봐야 할 것인가?

 

숨겨진, 감춰진, 극비 등등 온갖 수식어가 동원되어 김대중은 빨갱이라고 비난한다. 막상 그 외침들은 공허할 정도로 빨갱이라는 증거가 첨부되어 있지 않았다.

 

김대중의 친북좌파성에 대한 논란거리가 있다면 딱 하나다.  6.15 남북공동선언은 박정희의 7.4 남북공동성명과 내용이 경제협력확대 외에는 모두 같음에도 6.15 선언 관련해서 2항이 헌법을 위배했는지에 대한 작은 논란은 있을 수 있다.

 

김대중이 빨갱이라는 주장의 거의 대부분은 80년 김대중 내란음모혐의 사건에서 나온 김대중의 자필 진술서에 기인하고 있을 뿐이다. 이 외에 일본에서 흘러나온 가쉽성 기사와 북한에서 흘러나온 단편적 내용이다. 심지어는 북한의 한국민족민주전선에서 나왔다면서 대남공작부서의 주장을 신뢰하기까지 한다.

 

1. 1950년대 김대중의 친북좌파 활동에 대한 논란

 

반김대중편에 선 사람들 가운데 지만원과 함께 가장 글에 대한 신뢰성이 떨어지는 손충무가 김대중에게서 돌아 선 계기는 79년과 80년 중앙정보부가 보여 줬다는 자료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박정희 때부터 반김대중 자료를 축적해 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박정희가 김대중에게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사건(명동사건)으로 실형을 선고했음에도 친북좌파나 간첩으로 몰지 않았기에 전두환 때 김대중을 빨갱이로 몰기 위한 자료들을 급작스럽게 보강했을 것으로 보인다.

 

(명동사건은 1976년 3월 10일에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전복선동사건'으로 규정지었을 뿐 간첩이나 친북사건으로 규정하지 않았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사건'으로 김대중은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을 선고 받았다가 1978년 12월 27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나 가택연금 됐다.

 

흔히 박정희가 간첩사건을 많이 조작했을 거라고 믿지만, 통치기간에 따른 간첩체포 건수를 보면 간첩사건에서 실제사건과 조작사건을 퍼센트 테이지로 따졌을 경우 조작사건은 극히 적다. 그나마 조작사건일지라도 박정희가 직접 지시한 경우는 없었다. 세계 정상적인 국가들에서 발생했던 극히 작은 간첩색출에서의 오류보다 더 적다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몇몇 소수의 사건들은 조작을 벗을 수 없다. 

 

그래도 인혁당 사건은 확실한 간첩사건이었음으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인혁당 사건으로 간첩죄로 살다 나온 자들이 인혁당 재건 활동이라고 불릴만큼 다른 영역에서 주축이 되다보니 다시 간첩단이라고 오해받도록 의심스러운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만큼 어떻게 보면 상당히 공정하게 대공사건을 처리했던 박정희 때문에 김대중이 박정희 당시에는 빨갱이로 몰려 희생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에게 있어서 김대중은 빨갱이던 아니던 간에 상관없이 죽여야 할 대상이었기에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명분이 서도록 빨갱이로 몰아야 했던 것이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결은 (현대 정치적 지역감정 효시자 악인 이효상을 빼면) 멋진 맞수 간의 대결이었지만 김대중과 전두환의 대결은 김대중이 김두한이라고 한다면 하야시와의 대결이었다고 할 것이다. 문제는 결과적으로 김대중이 하야시에게 졌다는 것이다.

 

이후 김대중이 재판 받는 계엄군사재판 현장에까지 나가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구해 김대중의 옳음을 인정한 미국의 압력에 의해 전두환은 끝내 김두한인 김대중을 죽이지 못했다. 실제로 전두환은 미국 방문 직전에 사형에서 무기로 물러섰으며, 미국 방문후 귀국 직후에는 20년형으로 감해 줘야만 했다. 그러다 결국 민주화 운동에 밀린 군사반란 동료 노태우에게서 마저 심판당했다.)

 

김대중이 빨갱이라는 논리는 1980년에 극대화 됐다.

 

광주학살 만행을 저지른 전두환은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립하더니 7월 9일 공화당 정권의 고위공무원 232명을 숙청하고 나서 8월 16일에는 대통령 최규하를 하야시켰다. 직후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이름의 체육관 선거에서 99.9%의 지지로(총투표자 2525명, 찬성 2524명, 기권 1표) 9월 1일에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김대중은 이 과정에서 1980년 5월 내란죄도 아닌 내란음모죄로 전두환 신군부에게 강제로 끌려 갔다. 이 때 김대중은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으로 끌려가 지하실에 갇혀 옆 방에서 흘러나오는 고문에 내지르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자필 진술서를 쓰게 된다. 이 자필 진술서는 지금도 유령이 되어 김대중은 빨갱이다라는 자료로 왜곡되어 활용되고 있다.

 

첨부한 파일, 1980년 5월 20일 김대중 진술서 1,2회를 읽어보면 그 동안 김대중은 빨갱이다라는 주장의 대부분이 여기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역으로 김대중은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것 또한 알게 된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는 길게 쓸 필요가 없다.

 

즉 김대중이 빨갱이다라고 주장한 근거로 김대중의 자필 진술서를 내세웠다면 아니다라는 근거도 역시 같은 자필 진술서에서 찾아야 맞다.

 

전두환 치하에서 중정 지하실로 끌려가 공포에 떨며 자필로 쓴 진술서 치고는 아주 잘 썼다. 자신이 왜 반공주의자인지도 밝혔다.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의 당당함은 오히려 이제는 전두환 자신을 죽이는 칼날이 될 것으로 여겨 등골이 오싹 했을 것이다.

 

어차피 제거 대상으로 선정된 김대중이 아무리 구구절절히 빨갱이가 아니라고 해봐야 죽을 목숨인 상황에서 다부지게 유신체제를 비판함으로써 더욱 죽음을 재촉한 결과가 됐을 뿐이다.

 

1945년 9월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의 선전부장 (인민위원회로 1945년 11월에 바뀜) -> 1946년 1월 자진탈퇴 (건준위는 8월 7일 박헌영과 친북좌파들에 의해 해체되고 장악되어 인민공화국으로 바뀌었다. 미군정청은 1945년 10월 10일 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1945년 9월 청년동맹 가입 -> 활동경력 없음.

 

1945년 말 조선독립동맹 목포지부 조직부장 (1946년 2월 26일 남조선신민당으로 바뀜)-> 1946년 5월경 탈퇴 (1946년 2월 26일 백남운이 세운 남조선신민당은 모택동 노선을 따랐으며, 1946년 11월 남노당에 흡수됐다.)

 

1947년 여름 한국민주당에 가입 -> 확실하게 우익 선택

 

1950년 8월 북한군 6사단 13연대에 체포되어 투옥 -> 탈옥

 

1950년 10월부터 해상경비대 부단장으로 공비소탕

 

김대중이 공산좌익과 결별하게 된 원인은 우익으로 한국민주당 목포시 부위원장이었던 장인 차보윤의 '공산좌익은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고, 좌익은 일제시대 반민족 행위를 저지른 자들이다'라는 설득이었다고 한다.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는 자는 칼로 배를 갈라놓겠다"고 하면서 1946년 7~8월경 좌익과 결별했다.

 

1946년 발생해 전국을 휩쓴 대구 10.1 좌익농민폭동 사태에 맞춰 1946년 10월 31일에 발생한 민애청의 목포시내 4개 파출소 습격사건에 관련해서도 10일간 유치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습격한 범인들이 모두 체포됨으로써 '무혐의' 처분됐다.

 

1949년 2월 21일 친구(유재식)의 형(조선노동당 섭외부장, 민전부위원장)이 여비를 부탁해 신분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돈을 조금 준 것이 좌익분자에게 자금을 제공한 혐의가 되어 체포되었다. 수사 끝에 단순여비보조에 불과하고, 해군 목포경비소 정보대장 중위 오세동과 지역 헌병대장 박성철 등의 신원보증으로 '무혐의' 처리됐다.

 

1949년 친북좌파들을 사상적 전향 교육을 통해 대한민국 국민으로 만든다는 보도연맹이 실시되자, 보도연맹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지역유지들과 함께 지원했다.

 

(보도연맹원 사건의 경우 반대로 김대중이 보도연맹원이었고 처형직전 살아 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경찰 문서 보존 연한이 30년으로 박정희 때 뿐만 아니라 전두환 때도 (처형자 명단이 아닌) 보도연맹 가입자 혹은 처형대상자 명단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도연맹 건으로는 몰아 부치지 못했다는 사실에서 보도연맹원이 아니었다는 것이 더 바른 판단이다.)

 

6.25 남침일에 선박 운송료를 받기 위해 서울에 있다가 목포로 귀향해서 보니 북한군에게 집안 재산이 몰수되어 있었고 친동생 김대의는 잡혀가 있었다. 회사 소속 선장 박동운 집에 숨어 있다 2일만에 북한군에게 체포됐다.

 

죄수번호 202호로 목포형무소에 1개월 정도 수감되어 있다가 1950년 9월 28일 (총살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대기하던) 형무소 강당으로 한일수와 2인1조가 되어 수갑을 차고 옮겨졌다. 그 날 저녁 북한군은 간수 몇을 남기고 사라졌으며, 김대중은 다시 형무소로 이동 구금됐다가 탈옥했다.

 

(7월 24일 목포를 점령했던 북한군 6사단 13연대 역시 부산을 목표로 하동-진주까지 진출했으나 8월 마산 전투에서 패하고 9월말에는 하동에서마저 미 24 사단에게 대패해 이미 퇴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은 9월 15일 아침 6시에 전개되었고, 9월 28일 최종적으로 서울을 수복했다.) 

 

탈옥한 김대중은 해상경비대 부단장이 되어 물자보급과 소속원들을 지휘하며 인근 출몰 해상 공비소탕에도 나서면서 행동으로 반공을 실천한다. 형제 셋도 모두 북한군에게 끌려갔다 탈출했다.

 

이렇게 되자 치졸한 조갑제는 김대중의 해상경비대는 정규군이 아니라고 트집을 잡았다.

 

군대를 가지 않았으며, 북한군과 싸우지도 않았으면서 (반공노선을 지향하는 것은 맞지만) 무대포로만 너무 극우적인 조갑제는 자기변명에 급급해서 문제의 핵심을 놓쳐 버렸다.

 

김대중은 친북좌파였다고 해놨는데 김대중이 그만 북한군과 싸워 버린 것이다. 그래서 김대중이 해상경비대가 정규부대가 아닌데도 정규군인냥 행세하며 군입대를 기피했다고 부각시켰다.(미공개 자료를 중심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2-1, 조갑제)

 

(사실 해상경비대는 엄연히 국방부에서 마련한 계획 중 하나였다. 당시 국방부는 후방방어를 위해 경찰을 위시해 청년단, 해상경비대 등을 조직할 것을 명령했었다.)

 

정규군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공산침략을 당해 대한의 젊은이가 총을 들고 공산군과 싸웠느냐가 공산주의냐 아니냐의 핵심이 돼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조갑제처럼 극우적 입장이라면 더욱 당연하게 받아 들여야 한다. 공산군과 직접 싸우지도 않은 조갑제의 열등감으로 비춰질 뿐이다.

 

김대중이 공산군과 싸웠다는 내용은 1950년 12월부터 2년 7개월간 해군 목포경비부 사령관으로 근무하다 해군 준장으로 예편해 미국에서 살고 있는 송인명의 1997년 8월 14일의 증언으로 증명됐다.

그러므로 김대중은 짧은 기간동안 한 때 좌익이었지만 '일찍 전향해서' 반공주의자가 됐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결론인 것이다.

 

(역시 같은 논리로 박정희는 빨갱이다는 주장도 어거지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는 항일운동을 하다 공산좌익이 되어 대구 10.1 좌익농민폭동을 주도하다 국군의 총탄에 사살된 형 박상희의 죽음 앞에서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남에게 내색도 하지 않고 슬픔을 버텼다.

 

나중에 고향을 찾아가보니 남노당 군사부 총책임자였던 이재복이 집안에 경제적 도움도 주면서 보살피고 있었다. 박정희는 흔들렸고, 이재복은 그 틈에 형의 복수를 내세워 남노당에 가입시켰다. 흔히 알려진 것과 다르게 박정희는 남노당 군사총책이 아니라 일개 당원에 불과했지만 국군장교였기에 형벌은 가혹했다.

 

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다 사고사가 발생해 보직해임 중에 여순군사반란이 발생하자 토벌사령부에 배속되어 광주까지 내려 갈 정도였지만 여순군사반란진압 이후 대대적인 군부 공산좌익 척결과정에서 체포되고 만다.

 

박정희는 육군 (조사를 피해 달아난 좌익탈영병 포함) 10%가 숙청당하는 과정에서 (실제로는 만주군 출신 인맥의 도움이었지만) 박정희는 형의 복수를 위해 남노당에 가입했을 뿐이라는 것이 인정되고, 군부내 남노당 조직원 명단을 작성해서 넘겼기에 전향자로 판정되어 최종적으로 이승만과 미군의 승인을 받아 반공전향자로 분류되어 형을 면하고 군복을 벗게 된다.

 

여기에 비하면 김대중은 더 철저한 반공인사였다고 할 것이다. 물론 박정희도 6.25 남침 격퇴에서 정보장교로서 많은 성과를 냈다.)


2. 1960년대 김대중의 친북좌파 활동에 대한 논란

 

1967년 임자도 간첩사건

1968년 7월 20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전남 목포 앞 임자도를 거점으로 암약해온 북괴 간첩단을 적발해 118명을 조사해 간첩 27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지하당 전남도책인 정태묵 등 간첩단은 1962년~1967년 사이 북한을 오가며 1,845만원의 공작금을 받아 지하당을 조직 활동해 왔다고 발표했다.

 

정태묵은 남로당원으로 국가보안법위반으로 복역중 6.25남침 때 탈옥하여 4회 월북하여 노동당에 입당하고 공작금 800만원을 수령하여 지하당원 포섭에 나섰다.

 

정태묵과 만났다는 이유로 중정부장 김형욱이 김대중에게 참고인 조사를 받을 것을 요청해 참고인 조사를 받았으나 간첩혐의없음이라고 결론이 났다. 여기에 대해 임자도 간첩사건을 담당했던 당시 주임판사 이택돈도 1980년 8월 29일 육군본부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김대중을 의심해 보았느냐는 질문에 정태묵에게 당할뻔한 사람이었다라고만 진술했다.

 

3. 1970년대 김대중의 친북좌파 활동에 대한 논란

 

없다. 1970년대 초반의 일본 한민통 결성시도 사건은 80년에 뒤늦게 다뤄졌다. (미국 한민통은 문제가 전혀 되지 않았다.)

 

4. 1980년대 김대중의 친북좌파 활동에 대한 논란

 

전두환이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혐의

 

김대중을 직접체포했고 김대중을 직접 심문했던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관이었던 이기동은 실제 상황을 밝혔다.

 

이기동은 헌병대 장교 1명과 헌병대 병사 18명을 지휘하여 1980년 5월 17일 밤 11시30분에 김대중 자택에서 체포작전을 전개해 5월 18일 새벽 0시15분에 작전을 완료했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의 아내 이휘호가 휴대가방에 넣어 나가려던 예비내각 명단을 압수하고, 집안을 수색해 현금과 수표가 섞인 3,000만원을 압수했다.

 

5월18일 새벽 2시, 중앙정보부 남산 대공수사국 지하실 303호에서 김대중 취조를 시작했다.

 

- 당시 남산 지하실은 7층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층에 따라 고문의 강도가 달라졌는데 무장공비나 남파간첩들도 4층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모든 것을 실토할 정도였다. 정치인 중에서는 김영삼의 충복이었던 최형우만이 7층까지 통과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다 해도 최형우나 김대중이나 간첩들이 받는 심한 단계의 고문은 당하지 않았다. 이 내용은 이기동의 말이 아니라 오래 전 과거에 읽었던 다른 글들을 더듬은 것이다. -

 

김대중은 자신이 정치인이기에 모든 것은 자신에게 향해야 한다면서 가족들은 건들지 말 것을 부탁했지만 이미 몇 몇은 끌려 왔고 가족 모두가 연행대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과 일본에서 있었던 일명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70년대 초반사건에 대해 김대중은 자신이 박정희에게 납치된 이후에 결성 되었기에 자세한 사항을 모른다고 했다.

 

(이후 1988년 광주민주화 운동 청문회 때 민자당의 신경식이 물고 늘어지자 역으로 한민통 강령을 입수했으면서도 읽어보지 못했냐고 하면서 김대중은 자신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언론보도는 체포자 수가 김대중 김종필 등 26명이라고 했지만 김대중에 연관지어서만 100여명이 끌려와 있었다.

 

김대중과 관련해서 민주연합청년동지회, 서울대 복학생 이해찬 주도 시위, 민주헌정동지회, 한국정치문화연구소, 국민연합 등 광범위한 심문이 남산 지하 곳곳에서 진행됐다.

 

이제 심문수사가 5일째로 초기에 접어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엄사는 '김대중 수사 중간 발표'로 '김대중과 관련인들에 대한 수사과정서 드러난 범죄사실'이라는 부제목으로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이기동은 "조사중 김대중씨는 늘 진지한 자세로 수사관에게 예의를 갖추었고 조사가 없는 시간에는 언뜻 어두운 얼굴로 깊은 상념에 젖곤 했다. 그것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함인가, 아니면 자신의 불행한 앞날을 예측하고 있음인가? 어쩌면 과거 1973년 8월 일본에서 납치되었을 때 배 위에서 느낀 죽음의 공포가 되살아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라고 적었다. - 조사실에는 밖에서 관찰할 수 있는 일방불투명유리 뿐만 아니라 비밀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기동은 인간적 갈등을 겪다가 김대중 심문을 포기하고 다른 업무를 자청해서 맡아 떠났다.

 

다시 이기동에게는 김홍일 심문이 주어졌다. 김홍일이 환기통 위에 주차해 놓은 자동차에서 흘러 들어 온 라디오 소리를 통해 자신뿐만 아니라 아버지 김대중을 비롯해 가족 전부가 연행된 사실을 알아 버렸다는 것이었다. 이후 김홍일은 침묵으로 버텼다.

 

가까스로 달랜 김홍일 앞엔 새로운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6월 20일경 전두환은 김홍일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끼워 넣기로 결정하고 대학자금 지원 ― 학생 선동 ― 대중규합 ― 민중봉기 ― 정부전복 ― 과도정부수립이라는 각본을 전해 온 것이었다.

 

이 고리연결을 위해 당시 서울대생이었던 심재철이 선택됐다. 심재철은 서울시경 특수대에 감금되어 있었다. 시경을 방문해서 심재철을 심문했다. 김대중 집을 3회 방문했다고 하기에 집구조를 그려 보라고 했다. 정확하게 그렸지만 김대중이 체포되던 당시의 집구조가 아니라 옛날 집의 구조를 그린 것에 불과했다. 또한 김대중이 대학생들에게 자신의 흉상을 조형한 메달 수백개를 살포하며 투쟁을 선동했다는 경찰보고서를 확인하기 위해 메달을 그려보라고 했지만 심재철은 흉내도 내지 못해 끝내 그리지 못했다. 심재철과 김홍일의 대면조사에서 심재철은 김홍일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초기 수사도 마무리 되지 않은 형국에 이미 언론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죄 최종 수사결과 발표가 있었다.

 

이기동은 갈등 끝에 사표를 썼지만 유학성의 결재가 이미 났기에 국가유공표창을 받아야만 사표가 수리된다고 했다. 85년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전두환이 김대중에게 뒤집어 씌운 죄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내란음모죄, 계엄법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이다.

 

김대중에게 내려 진 죄는 1)형법 제90조 제1항, 제2항, 제 87조 2)계엄법 제15조, 제 13조, 계엄포고령 제1조 제1항 3)국가보안법 제1조 제1호 4)반공법 제5조 제1항 5)외국환 관리법 제35조, 제17조 제1항 6)형법 제37조, 제 38조로 엄청난 것이었다.

 

20년이 넘은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김대중에게 씌워진 전두환의 악의에 찬 빨갱이 굴레가 벗겨졌다. 지금도 전두환 추종자들은 김대중은 빨갱이라고 외치고 있다. 거기엔 조갑제, 지만원, 손충무도 포함되어 있다라고 의심된다.

 

김대중 내란음모죄 사건은 2004년에 내란음모죄, 계엄법 위반에 대해서 무죄 판결을 내렸다. 반국가단체 수괴혐의가 적용된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해서는 면소판결을 내렸다. 70년대 초반 한민통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에 관해서는 이미 오래 전에 사면복권됐고, 5.18 특별법과 관련한 재심범위가 아니므로 판결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란음모죄란 1980.5.22 민주화 촉진 집회를 열려고 했다(징역 15년)는 것이고, 계엄법 위반죄는 전국 대학의 학원 시위를 부추기다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 500만원을 주어 광주사태를 일으켰다는 것이고(사형), 국가보안법위반죄는 일본에서 반국가단체 한민통을 결성(사형)했다는 것이다.

 

5월 17일 밤 11시 30분경에 포위된 김대중이 설령 그 이전에 정동년에게 500만원을 줬다고 쳐도, 아에 그 돈이면 훨씬 많은 인원이 모였던 서울역 집회 주도 세력에게 주면서 서울역 10만 집회에 대한 불씨를 계속 살리는게 더 나았다.

 

반대로 김대중과 김영삼은 서울시내에 공수부대가 배치되어 있는 상태에서 비상계엄확대가 실시될수도 있다고 보고 서울지역 학생들과 시민들이 다칠 것을 염려해 예정된 민주화 촉진집회(1980.5.22)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조갑제는 "반국가단체 한민통 결성죄엔 무죄가 선고되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글로 김대중은 무죄가 아니라고 항변한다.

 

"이 재심선고로 인해 김대중 피고인에게 내려졌던 국가보안법 위반죄가 잘못된 것으로 결정되었음으로 한민통 가입이 정당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판결문을 왜곡한 것이다. 김대중씨가, 북한정권이 대한민국을 파괴하기 위해 설립추진한 한민통에 가입했었다는 사실은 이번 재심에도 불구하고 뒤집어지지 않았다"고 하면서 교묘하게 김대중이 국가보안법상 여전히 유죄인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한민통에 일방적으로 가입되어진 것이 정당했다고 주장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한민통에 어쨌든 가입되어 졌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조갑제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 내용(반국가단체 수괴 혐의)에 대해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지 않았다는 단순사실만을 내세워 거기에 담긴 실제적 판결내용의 의미를 언급하지 않고서 그저 유죄인듯한 느낌을 갖도록 유도했다.

 

대법원의 판결을 조갑제 혼자서만 왜곡하고 있는 꼴이다. 대법원은 분명하게 판결문에 '김대중이 한민통 결성에 깊히 관여한 바가 없다'라고 명시했다. 그럼에도 한민통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에 관한 건은 이미 사면복권 됐고, 5.18특별법이 규정하는 재심 범위에 들지 않기 때문에 면소(따로 판결을 내리지 않음)하겠다는 것이다.

 

재심 범위에 들어 갔다면 '한민통 조직결성에 깊히 관여한 바가 없다'라는 대법원의 판단에 의해 반국가단체 수괴라는 국가보안법 위반죄가 성립될 수 없음으로 재판결과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에 대해서도 무죄로 나올 것은 당연하다.)

 

1973년 8월 15일에 한민통이 결성됐고, 김대중은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에 중앙정보부에 의해 강제납치되어 한국으로 들어 왔다. 한민통은 1978년에야 대법원에 의해 반국가단체로 규정지어 졌다.

(간첩 윤호동이 78년 자수해 서울 기자회견에서 한민통은 북한의 사주를 받는 단체라고 밝혔다. 그의 증언만으로 한민통은 반국가단체라는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따라서 김대중이 납치당한 이후에 한민통과 지속적인 교류를 했느냐와 대법원이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1978년 이후에도 한민통 활동을 했느냐를 봐야 한다. 이 기간에 김대중이 한민통의 수괴로 활동을 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전두환은 제시하지 못했다.

 

(사실 김대중이 일본 한민통을 결성하지도 않았지만, 법리상으로도 국가보안법위반죄 적용을 할 수 없다. 이미 언급했듯이 일본 한민통을 반국가 단체라고 확정한 것은 1978년이기 때문이다.)

 

김대중은 진술서 제1회(1980년 5월 20일)에서 "본인은 이미 1972년 2월 본인이 일본에 들렀을 때 주일 대사관 직원으로부터 곽동의는 사상적으로 의심스러운 자이다. 그는 김재화의 사위인데 이북에 다녀온 것으로 본다는 말을 들은 바 있어 그의 말에 긴장이 된대다 좌중이 모두 침묵을 지키는데 기분이 상하여 본국 정부가 하는 것과 여러분이 하는 것이 다르다.


여기서 공동행사를 하면 민단본부가 해야지 왜 당신들이 해야 하느냐. 그러나 여러분이 공동행사 하는 것을 나는 막을 의도는 없다. 나는 일본서 한민통을 만들더라도 반드시 여러분과 같이 해야 한다는 이유도 없다. 여러분과 나는 견해가 다르니 이 이상 더 논하지 말고 그만두자. 나는 가겠다고 퇴장하였음.

 

그 후 8월 8일 본인이 돌연 납치되어 귀국함으로써 그 이상의 모임은 갖지 못한 채로 끝났는데 본인이 1973년 10월 26일 연금이 풀린 후 11월 초에 내방한 당시 서울 주재 일본 특파원들이 와서 일본서 한민통을 8월 15일에 결성했으며 본인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김재화를 의장대행으로 했다는 말을 들었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사건은 70년대 초반에 발생한 사건이었는데도 전두환은 7년여가 지나서야 다시 끄집어 내어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몰아 부쳤다. 역설적으로 그만큼 전두환으로서도 김대중을 빨갱이로 잡아 넣기 힘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5. 그 외 김대중의 친북좌파 활동에 대한 논란

 

1)김병식 편지 사건, 오익제 편지 사건

 

국민회의 김원길 앞으로 1997년 11월 11일자 북경우체국 소인이 찍히고 발신자가 김장수로 되어 있는 만년필로 쓴 편지 한 통이 날아 들었다. 국민회의는 괴편지가 도착했다며 즉시 공개적으로 안기부에 제출했다. 편지 내용에는 자신이 김병식이라고 하면서 김대중에게 자금이 든 트렁크를 전달했다는 것과 대통령이 되면 연방제 통일을 할 것으로 믿는다는 식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한국내에서 커다란 반응이 없자 다시 발신인이 강선생으로 된 1997년 12월 9일자로 북경에서 DHL로 최봉구(전 평민당 의원) 자택으로 배달됐다. 안기부는 최봉구를 설득해 스스로 개봉하도록 해서 제출토록 협조를 구했다.

 

수신자를 김상현(국민회의 소속)으로 썼다가 지우고 최봉구로 쓴 흔적이 발견됐다. 강선생은 북경에 파견나와 대남선거공작을 지휘하던 강덕순이었다. 이 번 편지는 타자로 쳐서 썼다.

 

"金大中 선생 귀하 
이번 대선의 큰 사업을 앞두고 분망하실 선생에게 따뜻한 인사를 보냅니다. 
그동안 어려운 길을 걸어온 선생의 오랜 소망과 뜻이 성공의 빛을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선생과 협력해 오던 지난 날이 회억되면서 감개무량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선생과 처음으로 상면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6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요즘 텔레비전 화면에서 선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1971년 가을 일본 도꾜 플라자 호텔에서 서로 뜨겁게 포옹하던 때가 생생히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는 물론 약소하였습니다. 선생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20만 딸라 밖에 보탬해 드리지 못한 것을 지금도 괴롭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을 오늘의 성공에로 이르도록 돕는데 밑거름이 되였다는 생각으로 보람을 찾습니다. 선생도 어느 회합에서 말씀하셨지만 조국통일의 앞길에는 의연히 많은 난관이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이남에서 자주적인 민주정권이 서야 하며 북과 남이 민족주체적 힘으로 통일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할 때이라고 간주합니다.

나는 선생이 대선에서 꼭 승리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선생과의 뜻깊은 상봉을 확약하면서 옥체만강을 기원합니다.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병식 
주체 86(1997)년 12월5일 평양

나는 이 편지를 평양에서 보내려고 하였으나 중도에서 차단될 것이 걱정되여 인편을 통해 해외에서 보내게 됨을 량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병식의 편지 사건이 한국내부에 크게 먹혀들지 않자 북한은 김병식 명의로 '김병식이 김대중에게 26년 전에 20만 달러를 줬다'는 내용으로 북경에 있는 금강산무역개발사장 박경윤에게 기자회견용 전송문을 보내 불씨를 살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20만 달러 수수설에 대해서는 오직 1980년 5월 20일 중정 남산 지하실에서 쓴 김대중 자필서 외에는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 없다. 자필서에는 1971년 11월 도쿄에 체류하고 있었지만 김병식을 접촉한 사실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지금까지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김대중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 일본체류 호텔 숙박비 30만엔을 배동호가 김대중 몰래 대신 내준 것이다. 배동호는 유진산, 양일동과 미리 알고 지낸 상태였고, 김대중은 양일동의 소개로 배동호와 처음으로 대면했다. 따라서 그저 접촉이 있었다는 논리로 친북좌파라고 따지면 유진산과 양일동이 먼저 더 친북활동 의심을 받아야 할 것이다.

 

조총련이 70년대 초반에 김대중에게 자금지원을 했다는 첩보 보고서는 주일 한국대사관 보고서가 유일하지만 이 보고서는 아무리 빨라도 1980년 2월 이후에 작성되어 계엄군법회의 증거물로 제출됐다는 점에서 신뢰성에 대한 의구심이 생긴다.

 

이 보고서 작성자는 당시 주일 영사였던 일등 서기관 정낙중으로 되어 있다. 통상적으로 그런 종류의 문서는 대사에게는 보고하지 않지만 정보부 공사가 정보부 본부와 직접 연락하여 처리한다 (김정렴-대통령 박정희 비서실장). 그런데도 막상 주일 한국대사관의 정보부 공사였던 이상구는 그 보고서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동안 축적된 자료에 김대중이라는 이름 하나만 추가하면 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11월 20일에는 서울국제우체국에서 10월 31일 평양 중구역에서 보낸 것으로 되어 있는 오익제가 김대중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됐다. 후에 오익제가 월북하기 이전 미국에서 보냈다는 편지도 추가됐다.

 

"이북에서는 후광 선생님의 대승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후광 선생님이 집권하면 금세기 안에 반드시 통일 성업을 성취할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라고 되어 있었다.

 

오익제는 8월에 월북한 천도교 교령이었다. (이후 귀순한 전 조선노동당 통일전선사업부 요원 장철현은 자신이 오익제를 강제 납치하는데 일부 참여했다고 밝혔다. 오익제의 편지는 대남선거공작차원이 아니라 납치한 오익제가 중요 인물이 아니기에 몸값을 높혀 김정일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한 공작이었다고 주장했다.)

 

안기부(권영해)는 오익제 편지 건을 가지고 중국을 오가며 국민회의가 북한과 연결되어 있다면서 북한 김정남과 선이 닿아 있을 정도였던 안기부 요원 유홍준까지 희생시켜 가며 3차례의 기자회견을 열었지만 대선에는 별 영향을 주지 못할 정도로 언론 자체에서 관심을 접어 버렸다.

 

이렇게 북한이 벌인 대남선거공작은 한국 대선에 다시 불어 온 북풍이었으나 과거와 다르게 별다른 영향도 끼치지 못했으며, 아무런 파문도 일으키지 못한채 무시됐다.

 

물론 이런 편지가 김대중에게만 온 것은 아니었다. 북한은 당시 이인제 후보를 돕고 있던 전 의원 유성환에게도 보냈고, 유성환은 안기부 대구지부에 편지를 신고했다. 유성환 편지 사건은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

 

당시 안기부 일부 요원은 북한이 김대중의 당선보다는 젊은 이인제의 당선을 바라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기도 했다.(공작암호명 흑금성 박채서, -김정일이 자신보다 젊은 이인제씨가 남조선의 대통령에 당선되어야 한다고 발언했다고 안기부에 보고했다.)

 

(안기부 내에서는 반김대중 노선이었던 안기부장 권영해 선을 빼고는 대체로) 북풍 편지사건은 너무 노골적이고 일반적 상식을 넘어 김대중에게 불리한 내용이라서 안기부 정치공작으로 몰아가도록 해서 국민과 안기부, 김대중과 안기부를 이간질 시켜 대선 이후 정치혼란을 노린 대남선거공작으로 보고 있었다. (1997년 12월 10일경 안기부 언론 보도자료, - '북한의 김대중 후보에 대한 일련의 편지 공작과 관련하여')

 

2)김일성과 장기 뒀다는 사건

 

-〈박성범〉딱딱한 질문과 답변이 계속되는 것 같아 화제를 바꾸겠습니다. 金위원장이 감옥에 계실 때 김일성과 수천 번 장기를 두셨다고 나오셔서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 장기는 누가 이겼고 또 金위원장은 어떤 수를 주로 쓰셨고 김일성은 어떤 수를 주로 썼습니까.

 

-장기를 두었다고 얘기하고 바둑을 두었다고 하지 않은 것은 바둑을 둘 줄 몰라서 장기를 두었다고 얘기했습니다. 장기를 둬보니까 김일성이도 수가 세지만 내 수도 별로 지지 않는 수다, 이렇게 결론 얻었는데요.

 

1987년 관훈토론회에서 나온 발언이다. 김대중은 빨갱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사실로 받아들이기까지 한다. 유치함의 절정이라고 할 것이다.

 

이 발언은 김일성과 실제로 직접 장기를 뒀다는 것이 아니다. 전두환에 의해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북한 김일성이 어떤 대남정책으로 나올 것인가 각 상황들을 예측해 보면서 거기에 대응해서 한국은 어떤 대북정책을 펼쳐야 승리할 것인가 하고 고민했다는 의미다.

 

3) 김정일 면담시 리무진 안 단독대면에서의 대화

 

2000년 6월 13일과 15일 환영과 환송 과정에서 단 둘이 차 속에서 밀담을 나눠 적화통일을 약속했다는 주장이다.

 

심지어 "미 CIA는 양 김의 차내 밀담 90분간의 내용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포착하였다. 그 주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생전의 김일성 수령님을 만나 뵙지 못해서 유감입니다. 박통시절 납치사건에 있어서 여러 모로 힘을 써 주셔서 오늘 날의 제가 있었습니다. 광주사태로 인해서 사형판결을 받았을 때에도 생명을 구해 주셨습니다. 수령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김 총서기님과 협력하며 살고 싶습니다. 남북 평화협정을 조기에 체결하고 싶습니다. 국가보안법을 철폐시키고, 주한미군을 철수시켜, 민족을 자주적으로 통일하는데 매진하고 싶습니다. 북조선에 경제재건을 위해서 의욕적으로 협력하겠습니다. 클린턴 미 대통령과 일본 총리를 조속히 평양에 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남쪽의 국가정보원에 의하면 김정일이 김대중에게 남로당 입당서류와 1967년부터 김일성이 죽을 때까지 30여 년간의 김대중에게 제공한 자금원조에 관한 자료 등을 보이며 이들 자금이 도움이 되었습니까?'라고 김대중에게 귓속말을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근거 인용문으로 '김정일 파멸의 날, 미도 히로미찌 2004.12.4, 일신보도'를 내세우고 있다. 또한 CIA 감청설은 손충무가 미국에서 퍼트리고 있다.)

 

한나라당의 주공격이었던 자동차 동승 밀담에 대한 '방북시 김정일 위원장과 같은 차에 동승해 무슨 대화를 나누었느냐?'라는 질문에 김대중은 이렇게 대답했다.

 

"비행장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동안에 군중들의 환호에 일일이 답하고 회담을 앞둔 긴장감 때문에 특별한 얘기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다. 나를 불러 놓고 군중들이 '김정일'을 연호해 다소 우습기도 했다"며 밀담 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2003.6.12 KBS일요스페셜 대담 녹화)

 

"별말 없었다. 국빈으로 외국에 가면 그 곳에서 내준 차를 혼자 타는데, 옆에 누가 탁 앉기에 돌아보니 김위원장이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무슨 말을 나눴느냐고들 하는데 금수산에 안치된 김일성 주석의 시신을 참배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경직된 심정과 상대방하고 대화가 잘 될지도 몰라 무슨 말을 꺼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 도로 양쪽에 50만~60만명의 대군중이 꽃을 흔들고 환호하는데 둘이 고개 숙이고 얘기만 할 수 있겠느냐? 특별히 한 얘기는 없고 김위원장이 저 사람들이 다 대통령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자발적으로 나온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한 것이 전부다"라고 말했다.(2004.06.10 문화일보 인터뷰)

 

어느 쪽 주장이 더 현실적인지는 금방 드러난다. 미국이 그 정도로 정교하게 차 안의 대화를 녹취하는데 성공했다면 김대중은 당장 김정일 면담이 끝난지 며칠 후에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최초로 대통령이 간첩죄로 감옥에 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을 것이다. 지금 한나라당이 정권을 획득했지만 어느 누구도 김대중이 이런 역적행위의 말을 했소하고 밝히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이 빨갱이다라고 헤매면서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는 과연 김대중의 대북정책 혹은 통일정책이 친북인가를 찾아 보는 것이 더 빠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김대중이 빨갱이다라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또한 그의 대북정책과 통일정책도 친북좌파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김대중이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보여줬던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인 햇볕정책은 뜻은 좋았지만 현실에서는 실패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북한을 이롭게 해줬다고 판단한다. 왜 김대중의 통일정책이 실패했으며, 왜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결과로 작용했는지를 살펴 보는게 더 현명할 것이다.

  • ?
    전통矢 2012.12.12 09:28

    이 긴 걸 누거 읽는단 말이요?

    그냥 무시하고 내 글을 쓸 수 밖에

  • ?
    오늘황당 2012.12.12 15:34

    "다만 김대중이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보여줬던 대북정책과 통일정책인 햇볕정책은 뜻은 좋았지만 현실에서는 실패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북한을 이롭게 해줬다고 판단한다."

     

    이 부분도 잘못된 이해입니다.

    '햇볕정책' 절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mb정권에서 이를 제대로 받아 들이지 않고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청개구리 같이 무조건적으로 반대로만 하여

    얻을 수 있었던 열매들을 많이 손상시킨 것입니다.

    반면에 mb정권의 대북정책은 아무 것도 없으며 오로지 대결과 무책임으로 실패한 것입니다.

     

    그러나 '햇볕정책'의 성과는 아직도 살아 있어서

    굳게 닫쳤던 북한 주민의 사상을 조금씩 이라도 깨우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통시',  '전통(전두환)의 화살' 따위는 반드시 자신을 향할 것입니다.

    <26년> 보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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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4 천보산에서 석박산까지 달려봅시다. 1 지경야인 2012.12.11 978
4843 전통矢님 꼭 읽어보세요. (투표, 정치 문제에 관한 신자들의 태도에 대한 엘렌 화잇의 권면) 8 오두막 2012.12.11 1035
4842 그만들좀 합시다. 9 최인 2012.12.11 999
4841 대선 선거즈음에.... 2 심심이 2012.12.11 1006
4840 꿈꾸던 결혼... 같은 믿음의 사람과 file couple 2012.12.11 892
4839 스위스 비밀계좌의 주인은..... 1 로산 2012.12.11 858
4838 미국이 그랬다면 미국 디비진다 3 로산 2012.12.11 1150
4837 옥수수 뻥 하고 튀기기 1 로산 2012.12.11 967
4836 박노자에게 충고한다 강철호 2012.12.11 1236
4835 그리고 아무 말도 못하겠다: 대한민국의 "노땅"들이여...(나도 물론 노땅) 김원일 2012.12.11 1063
4834 고바우님 율법과사랑은 하나이거늘 어찌 사랑으로 율법을 범한다 하십니까? 7 전통矢 2012.12.11 1145
4833 <속보: 현장 생중계> 국정원 정치공작 개입 의혹 현장_역삼동 성우스타우스(2012년 12월 11일) 대통령선거 2012.12.11 1561
4832 윤봉길 의사 상하이 폭탄 의거 실제 동영상 ◆◆◆ 내 마음 속의 다이아몬드 'e-지식채널' LOVE CIRCLE 2012.12.11 1318
4831 모르면 배우자...한국 언론 왜 이지경까지 왔을까? 로산 2012.12.10 851
4830 파시스트 살인마가 한국을 좋아한 까닭: 선거를 앞두고 다시 한 번 읽어봄직한 글 김원일 2012.12.10 1040
4829 지하경제 로산 2012.12.10 762
4828 고바우님글 / 간음녀 끌고 온 자들이 모세 율법 지켰다구요? --> 바리새인들은 율법 안지키는 자들 5 전통矢 2012.12.10 1532
4827 Student님께 예수님의 절제를 본받읍시다. 님 제시하신 ( 잠언31:6,7 )의 독주 해설 8 전통矢 2012.12.10 1188
4826 고기도님깨 신정정치로 다시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이 가깝다( 고기도님 수정한 것 보십쇼 ) 8 전통矢 2012.12.10 1295
4825 대한민국의 좌파란? 당신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6 뻐러가이 2012.12.10 1072
4824 지경야인님 글 좋고, 나쁜 면 다 있으니, 좋은 것만 취하시지요, / 안식일은 목숨 걸고 지키는 것 전통矢 2012.12.10 972
4823 멈추지 않는 칼날... MBC, <2580> 기자 등 3명 징계...인터뷰, 지시불이행이 이유... "김재철 사장, 반대한 사람에게 가차없다" 아! MB씨 2012.12.10 1029
4822 일제 한국식민지가 축복'이라던 매국노 한승조,=유유상종한다네 로산 2012.12.10 1100
4821 26년 로산 2012.12.09 1313
4820 글장난풍자적인글을올려보고 1 풍자 2012.12.09 1824
4819 안식일의 참 의미를 이런 것이 아닐까? 1 지경야인 2012.12.09 1184
4818 새 정치와 정권교체 씨알 2012.12.09 813
4817 인체 건강에 대한 하나님의 암시( 곡식,과일,채소 ,견과 들의 여러 생긴 모양으로 ) 1 전통矢 2012.12.09 2276
4816 사자성어(24K) 2 lg2 2012.12.09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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