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고 한실 박사님을 처음 뵌 것은 72년도에 미국에 이민을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터이니 어언 39년 가까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당시 Columbia Union College 여자 기숙사 강당을 빌려 예배를 드리던 와싱톤
교회를 담임하셨던 김 선억 목사님께서 일본에서 사역을 하시고 미국으로 오신 것이
인연이 되셨는지, 고 박사님 내외분께서 자주 와싱톤 교회 안식일 예배에 참석 하셨습니다.
그 후, 1977년경에, 메릴랜드 실버스프링에 위치한 제일 한인 침례교회에서
"사이비 이단교회들 비판"이라는 주제로 강연회가 있다는 광고를 보고,
한국에서 목회사역을 하시던 조 창운 장노, 다른 장로 한분, 그리고 제가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천 여 명이 넘는 청중들이 모였는데, 뜻하지 않게 고 한실 박사님께서
강단 위에서 사회를 보시며, 그 집회를 주제하고 계신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첫 연사로, 제일 침례교회 담임이시던 김 현칠 목사님이 나오셔서,
통일교회 이단성에 대한 설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뒤를 이어,
와싱톤 한인 침례교회 담임이셨던 여 운세 목사님이 나오셔서,
여호와 증인 교회 교리의 이단성을 두루 설명하시면서, 마지막 부분에는,
여호와증인 교회 창시자가 본래는 안식일 교회 교인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교회 역시, 윌리암 밀러가, 성경을 잘 못 해석하여,
1844년에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거짓으로 가르치던 집단의 후예들이고,
지금도 거짓 으로 예언들을 해석하고 가르치고 있는 이단교회라는 요지로
강연을 하는 중에, 조 창운 장로가 손을 들고 일어나, 본인이 안식일 교인임을 밝히고,
안식일 교회가 이단이라는 근거를 성경적으로 말씀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이때 청중들의 분위기가 경직되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급변하기 시작하자,
사회를 보시던 고 한실 박사님께서, 본인이 성경적으로 더 연구하여
밝히시겠다는 약속을 하시고 폐회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90년도 후반 경에, 최 통련 목사님이 담임을 하시던
메릴랜드 중앙교회가, 버지니아에 있는 하트랜드 대학 시설을 빌려,
죠지아에 계신 여 병주 의사를 초청하여 건강 전도 회를 열었습니다.
그때, 뜻하지 않게 고 한실 박사님 내외분께서 참석을 하셨습니다.
여 병주 의사님의 건강기별의 말씀과 자연요법으로 치료하시던 정성 때문인지,
사모님의 오랜 지병이 짧은 기간이었지만 호전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뒤로, 두 분께서 안식일 마다 교회에 참석을 하시기 시작하셨고,
파트락 음식도 즐기시면서, 자연히 교우들과 친밀한 관계로 이어지게 되시고,
어느 해 1월 1일 안식일에, 사모님의 만류도 물리치시고,
홀로 침례를 받고 평생을 안식일 교우들과 지내고 싶다는
간증과 함께 단호한 선언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지루할 만큼 긴 글을 쓰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고 박사님의 개인 신상에 대한 의문들은 누구에게나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보통 한국인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경지의 세계를 섭렵하시고 두루 지나 오셨지만,
그분 과거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자신을 내 세우시지 않으실 만큼
소탈하시고 겸손의 그늘에서 기나 긴 세월을 지나 오셨기 때문이라고 생각 합니다.
박사님께서 일요일 교회에서 중책을 맡고 계실 때도, 엄청난,
오해의 격랑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신 일들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심지어, 미국 정부 정보 담담 부서에까지 조사를 의뢰하기도 하였으나,
오히려, 미국 정보 당국이 모든 사실들을 확인해 주고, 박사님의 개인 신상을
보호하려는 배려로, 모든 개인 정보들을 외부에 모두 차단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고 박사님의 신상에 대하여 전적으로 신뢰하는 이유둘 중에 하나는,
지난 40여 년 동안, 시종 일관, 단 한 점도 변함이 없으신 증언 그대로 이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가장 싫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안식일 교회에 처음 입교를 하시면서,
스스로 초등학생이라고 말씀하시던 겸손하신 인격이십니다.
이화대학 메이퀸 출신이신 사모님과, 고 박사님은,
일본 본국인들조차 꿈도 꾸기 어려운, 천황 황실 궁전을 자유롭게 출입하실 수 있는 신분이십니다.
일본에서 변호사로 처음 맡은 사건만 해도, 일본 귀공자 엘리트 신분이며,
최고 관료의 관문을 막 시작한 젊은이가, 한 순간, 치명적인 실수로, 개인생활이나
공직에서 완전히 패망이 될 형편이 되었을 때, 고 박사님의 치밀한 기지로,
완전히 구제되어, 후에는, 훌륭한 정치인으로 자랄 수 있게 해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일본 천황을 비롯한 패전국 일본 제국주의 전범들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불과 20여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혈기로 하시지 않고, 폭 넓은 관용으로 대하시어,
수많은 엘리트 인제들이 일본 국가 전후 복구에 적극 참여 할 수 있게 길을 열어 주어
일본 정치인들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고 봅니다,
미군장교 대령이라는 부분을 의아해 하시는 분들에 대하여는,
보통 법무 장교들은 계급보다, 직속 지휘 사령관 장성 바로 아래 계급인
대령 대우를 받는 직급이 아니었나? 하고 이해를 하고 싶습니다.
실질적으로, 법무 장교들은 계급이 중위라도, 대령 급 장교들까지도
직접 수사를 할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급과 관계없이 직무를 수행합니다.
여러 해가 지나도록, 일본 정계에서, 보이지 않게 최고의 예우를 받으셨던 일들을 알게 되면,
이러한 오해들도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육이오 전쟁 전 제주도 4.3 사건 때,
고 박사님의 부모, 형제, 친척들이 모두 공산당으로 몰려 억울한 학살을 당하신 악몽이 있으십니다.
이처럼 뼈에 맺힌 복수를 실천에 옮기셨다면, 맥아더 사령관을 직접 모시고 다니셨기 때문에,
대한민국 역사가 달라졌을 순간들과 기회들이 여러 번 있었다고 술회하셨습니다.
그러나, 박사님의 냉철한 이성으로 극복하셨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
러한 일들은, 지금 상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 집니다.
고 박사님께서는, 개인적으로도 절대 절명의 위험의 극한 상황에서도,
극적으로 살아남게 되신 개인의 경험담들만 해도 다섯 손가락이 모자랄 만큼 여러 번 있었습니다.
어느 분이 기회가 되시면, 검색을 해 보실 수도 있습니다.
그 사건들이 당시 국가적이나 세계 역사적으로도 엄청난 사고들이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을 지낸 닉슨과의 관계에서도
고 박사님의 인품이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잘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닉슨이 대통령에 출마했으나, 젊은 케네디에게 패배하고,
칼리포니아 주지사 선거 마져 낙선하여, 아무런 보좌관도 없이 쓸쓸한
떠돌이 신세 정객이 되었을 때, 가까운 친구로 맞아 주신 일이 인연이 되어, 미국 백악관으로 오시게 되었습니다.
모국어인 한국말 보다 더 유창하신 일본어, 짧은 전쟁포로 기간 동안에 익히신
영어, 중국어까지 두루 통하시는 동양 통 대통령 자문 위원을 36년간 역임하시지만,
후임을 찾지 못해 오래 있게 되었다고 겸손해 하십니다.
고 박사님의 주소와 전화번호는, 교우 주소록 외에는 전혀 찾을 수 없을 만큼
아무에게나 절대로 알려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식일 교인들은 어느 집단들보다 더 신뢰하고 계십니다.
교회에 참석하는 젊은이들을 몹시 사랑하시며, 그들과의 대화를 즐기십니다.
채식으로 요리된 음식들로 교우들과 어울리는 시간을 가장 좋아 하십니다.
성경에 일요일을 지키라는 구절이 한 구절도 없다고 하시며, 안식일 교회가
하나님의 법을 잘 지키고 있는 교회라고 확신을 하고 계실 만큼 단순한 신앙의 소유자 이십니다,
그러나,
교단 기관장이 교회 강단에서 설교를 하면서, 박사님을 의식하는 내용의
권고적인 내용이 비치거나, 찬양대장이 찬양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박사님을 향해 꾸뻑 절을 하는 식의 허식들을 몹시 거북해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간절히 바라기는, 거친 풍랑들을 무사히 넘기시고,
노년에 찾아오신 안식일 교회가, 고 박사님 내외분이 평안하게 쉴수 있는
영원한 집이 되시기를 위해 기도드립니다.
제 글을 어느분이건 카스다에 올려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