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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ser-by 님이 올려주신 엉터리 목사들의 헛소리를 보면, 그들에게는 "목사"라는 이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런 목사들과 대조를 이루는 목사님들도 많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가 student 님에게 댓글 달면서 언급한 목사 겸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에 대한 글을 올립니다.

제 책 <종교, 심층을 보다>에 소개된 심층 종교인들 중 한분입니다.

같은 이름의 "목사"이면서 이들과 틸리히 목사의 차이는 얼마만큼인가 놀라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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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폴 틸리히Paul Tillich(1886~1965년)

-종교의 '깊이'를 역설했던 조직신학자, 지성인을 위한 사도

“모든 종교의 심층에는 종교 자체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경지가 있다”

 

폴 틸리히는 루돌프 불트만과 함께 20세기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신학자였다. 1990년대 미국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신학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신학자로 틸리히를 꼽았다. 필자의 경우도 성서 이해나 해석학 분야에서는 불트만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신학 사상에 있어서는 틸리히의 영향이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대학교 저학년 때 사촌형의 책꽂이에 꽂힌 틸리히의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을 펼쳐보았다. 하얀 것은 종이고 까만 것은 글자라는 사실 이외에는 전혀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대학원 학생이 되었을 때 틸리히의 사상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캐나다에서 유학하며 불교를 전공할 때도 틸리히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틸리히 때문에 불교 사상을 더욱 친근하게, 더욱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유튜브에서 틸리히가 생전에 했던 두 시간 분량의 인터뷰를 다시 보았다. ‘과연’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틸리히는 1886년 8월 20일 독일 동부의 조그마한 도시 슈타르체델Starzeddel에서 보수적인 루터교 목사였던 아버지와 자유주의적이었던 어머니 사이의 첫째로 태어났다.

 

(독일에서의 생애는 생략)

 

 

1924년부터 2년간 마르부르크 대학 신학 교수로, 그 후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 등에서 가르쳤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가르치는 동안 전국을 다니며 한 그의 강연이 나치 운동과 갈등을 빚게 됐고,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그 후 라인홀드 니버의 초청으로 미국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대학원으로 옮겼다.

 

 

1933년 47세의 나이에 새롭게 영어를 배우고, 그 이후 모든 저작을 영어로만 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영어가 서툴러 고생을 했지만, 영어로 말하거나 글을 쓸 경우 독일어보다 쉽고 부드럽게 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1933년 종교철학을 가르치기 시작, 1955년까지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철학적 신학 교수’로 알려졌고, 그 가까이 있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도 방문 교수로 철학 강의를 할 정도로 명강의를 했다. 그가 유니온 대학에 있을 때 영어로 쓴 『프로테스탄트 시대』 등의 논문 모음집, 『흔들리는 터전』 등의 설교 모음집, 특히 그의 대표작인 『조직신학』 제1권 등의 저작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이에 힘입어 1953년에는 영예로운 스코틀랜드 기포드 강연 강사로 초대되고, 1955년에는 하버드 대학교 신학대학으로 초빙되어 강의에 구애받지 않는 최우대 특별 교수가 되었다. 1962년까지 하버드에 있으면서 『조직신학』 제2권과 그 유명한 『신앙의 역동성』 등을 출판하였다.

 

 

1962년 시카고 대학으로 옮겨가 2년 동안 그 당시 시카고 대학 종교학의 대가 미르체아 엘리아데와 공동 세미나를 이끌면서 그와 학문적 교분을 두텁게 했다. 여기서 『조직신학』 제3권이 완성되었다. 1965년 10월 12일 저녁 시카고 대학 종교사학회에서 그의 동료들의 요청으로 ‘조직신학자를 위한 종교학의 의의’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거기서 그는 그가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그의 조직신학을 동양 종교를 포함하여 세계종교들의 통찰과 대화하면서 다시 쓰고 싶다는 그의 염원을 말하고, 이런 식으로 세계종교의 맥락 속에서 쓰이어지는 신학이 “신학의 미래를 위한 나의 희망”이라고 했다. 강연이 끝나고 오랫동안 박수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날 새벽 4시에 심장마비를 일으킨 그는 그 후 10일 만인 10월 22일 79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유해는 미국 인디애나주 뉴하모니에 있는 폴 틸리히 공원에 안치되었다. 조지아 하크니스는 틸리히를 두고, “미국 철학을 위해 화이트헤드가 있었다면 미국 신학을 위해 틸리히가 있다”는 말로 틸리히의 신학적 공헌을 찬양했다.

 

 

틸리히는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재해석하는데 일생을 바친 신학자였다. 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전통적 가르침은 모두 ‘상징symbol’이었다. 그의 주저인 『조직신학』 목차만 보아도 ‘타락의 상징’, ‘그리스도의 상징’, ‘십자가의 상징’, ‘천국의 상징’ 등등의 용어가 등장한다. 타락, 그리스도, 십자가, 천국 등의 개념이 그 자체로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상징은 “그 자체를 넘어서는 다른 무엇을 가리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상징적인 개념들을 대할 때 우리는 그런 것들 자체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그것들이 가리키는 그 너머에 있는 의미를 찾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적 용어로 하면 이런 상징들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그는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을 무시하고 어느 한때 인간의 필요에 부응하여 주어진 ‘과거’의 해석 자체를 붙들고 있겠다는 미국의 근본주의적 태도나 유럽의 정통주의적 자세는 ‘과거의 정황’에서 형성된 특수 해석 자체를 절대화하려 한다는 의미에서 ‘악마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각 세대를 위해 그때그때 새롭게 해석하는 이른바 ‘응답하는 신학’으로서의 신학적 소임을 망각한 신학은 신학의 역할을 방기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는 성경이나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에 나오는 이런 상징들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것은 무의미하고 무모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성경을 심각하게 읽으려면 문자적으로 읽을 수 없고, 문자적으로 읽으면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하였다. 틸리히가 영향을 받은 루돌프 불트만이 ‘비신화화’라는 용어로 신화의 재해석을 강조했다면 틸리히는 그 용어가 신화를 없애야 한다는 말로 오해될 소지가 있으므로 그 대신 ‘비문자화deliteraliz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한 셈이다. 신화나 상징은 호두가 깨어져야 그 속살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깨어져야’ 그 깊은 의미를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른바 “깨어진 신화broken myths”여야 신화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 셈이라는 뜻이다.

 

 

틸리히에 의하면, 종교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궁극 관심ultimate concern’이다. 그 궁극 관심의 대상은 결국 궁극적인 것, 곧 신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신’이라는 말도 상징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가 쓰는 ‘신’이라는 말 너머에 있는 궁극 실재로서의 신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신의 상징으로서의 신God as the symbol of God’이라든가 ‘신 너머에 있는 신God beyond God, God above God’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그는 궁극 실재로서의 신은 ‘상징적으로’ 표현하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틸리히는 물론 이런 상징들을 두고 ‘겨우 상징일 뿐인가?’ 하는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한다. 종교적 상징은 우리를 궁극 실재로 이끌어주는 필수 불가결의 신성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궁극 실재로서의 신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틸리히는 신God과 신성Godhead을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은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 경험에서 이해된 대로의 신이고 신성은 언어나 상징체계 너머에서 직접적으로 경험되는 궁극 실재라고 보았다. 이런 궁극 실재는 ‘하나의 존재a being’일 수가 없다. 궁극 실재가 ‘하나의 존재’라면 우리가 아무리 ‘위대하다’, ‘전능하다’, ‘전지하다’ 등의 현란한 수식어를 붙인다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존재들 중의 하나a being among others’로서 여전히 존재의 차원에 머물 수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 다른 존재와 특별하게 다르다고 할 수도 없다.

 

 

절대적이고 ‘조건 지워지지 않는’ 궁극 실재로서의 신은, ‘존재 자체Being-itself’라 하든가 ‘존재의 힘the Power of Being’ 혹은 ‘존재의 근거the Ground of Being’라 보아야 한다고 했다. 존재 자체 혹은 존재의 바탕으로서의 신은 ‘존재와 비존재’, ‘본질과 실존’ 등의 분별을 넘어서기 때문에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따라서 일반인들이 상식적으로 믿고 있는 신은 결국 우상숭배나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셈이다. ‘존재의 근거’라는 용어는 가히 화엄 불교에서 말하는 ‘법계法界․dharmadhātu’를 연상하게 하는 말이다.

 

 

틸리히는 스스로를 ‘경계인a man on the boundary’이라 하였다. 1960년 일본을 방문해서는 불교 사찰을 방문하고 선불교 스님들과 대화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때 받은 감명을 1961년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행한 『그리스도교와 세계종교들과의 만남Christianity and the Encounter of the World Religions』이라는 강연을 통해 발표하고 그 후 작은 책자로 출판했다.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나라’와 불교에서 가르치는 니르바나를 비교하고, 종교 간의 관계는 ‘개종conversion’이 아니라 ‘대화dialogue’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명언으로 끝을 맺었다.

 

 

<모든 종교의 심층에는 종교 자체의 중요성을 잃어버리게 하는 경지가 있다. 그 경지는 종교의 특수성을 관통한 영적 자유로,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인간 실존의 궁극 의미를 표현한 다른 표현들 속에 나타난 영적 현존을 감지할 수 있도록 한다.>

 

 

그는 시카고에서 한 마지막 강연에서도 비슷한 말을 되풀이했다. 틸리히는 신학자였지만, 이처럼 모든 종교의 심층을 꿰뚫어보고 우리를 그리로 인도한다는 의미에서 생각하는 모든 종교인들을 위한 스승이라 하여도 지나칠 것이 없으리라.*

  • ?
    student 2011.08.17 18:00

    좋은글 감사합니다.

    "상징"과 그 상징이 가르치고자 하는 진리를 혼돈하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어디 까지가 상징이고 그 상징이 왜 필요한지

    한번씩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은 모든 종교인들이 꼭 해야할 일인것 같습니다.

    Paul Tillich 의 brief bio, 잘보고 갑니다.

  • ?
    Windwalker 2011.08.18 06:45

    student님,

     

    빈배님의 글에서 댓글로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빈배님이 말씀하시는 것에 대해 저는 상징이란 단어도 쓰 또 Metaphor라는 말도 씁니다.

     

    우리의 믿음의 실체에 대해 계속 탐구하도록 하지요.

  • ?
    student 2011.08.18 22:54

    Windwalker 님,

    metaphor 도 좋습니다.

    진리로 향하는 길이 symbol 일수도있고 metaphor 일수도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 자체가 또 진리 일수도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조건 그렇다고 우기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고집이겠지만

    또 무조건 아니라고 우기는것 또한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님이 말씀하신대로 진리는 열린 마음으로 "계속 탐구"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실체에 대해 계속 탐구하도록 하지요"  좋은 말씀이십니다.

    I agree with you 100%. 

     

     

  • ?
    흙으로 2011.08.17 18:57

    조심스럽게 빈배님에게 질문해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는 실존의 인물로 알고 있고 구원은 '예수'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 제가 믿고있는 기독교의 일반적인 구원관인데요(여기에 문제점이 있나요?). 예전에 읽었던 폴 니터의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만(No Other Name?)'이라는 책이 갑자기 생각이 나네요. 우리가 규정지을 수 없는 신에 대한 개념이상으로 구원은 예수라는 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성경에서 명시하는 것이 아주 구체적인데요. 제가 읽었던 폴 니터의 책은 이러한 여러 종교관의 구원에 관한 문제 속에서도 우리가 알지못하는 신의 개념을 뛰어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피흘림이 모든 종교인들에게 적용된다는 이야기로 결론이 났던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보수적이면서도 배타적인 구원관과 하나님의 온인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는 초월적인 사랑은 대비되는 것 같으면서도 공존합니다. 폴틸리히의 사상, 예수의 실존 그리고 그를 통한 구원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 건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여러 이름모르는 신들 속에서 하나님을 각자 아는 만큼 만나고 있으나 결국은 '예수'를 통해서 구원과 신을 만나고 있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편협한가요? 물론 종교인에게 있어서 올바른 신을 알고 사랑을 배우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인 줄은 압니다만, 또한 하나님과 이웃 사랑만큼이나 올바른 신을 구체적으로 알아나가고 구원을 얻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봅니다(이러한 구원관에 관한 문제가 표층은 아니길 바랍니다^^).

  • ?
    student 2011.08.18 00:31

    기독교의 보수적이면서도 배타적인 구원관과 하나님의 온인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는 초월적인 사랑은 대비되는 것 같으면서도 공존합니다.

    ---------------------------------------------------------------------------------------------------------------------------------------------------------------------------------------------------

    끼어들어서 죄송함니다만.....

    기독교의 "배타적인 구원관"과 온 인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는 초월적인 사랑은 대비됩니다.  그리고 공존할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어떻게 "공존" 할수있는지 설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님과 이웃 사랑만큼이나 올바른 신을 구체적으로 알아나가고 구원을 얻는 것" 이라고 말씀 하셨는데, 그럼 사랑의 목적은 구원입니까?

    목적의식을 가지고 하는게 사랑일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님이 생각하시는 "구원"의 의미는 무었인지요?

    님의 생각을 좀더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 ?
    흙으로 2011.08.18 01:41

     첫째로 개인적으로 저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믿음으로 구원이 있음을 믿는 재림교인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습니다. 하지만 재림교회 밖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지 못해서, 문화적인 배경의 차이로, 성경을 읽었지만 각자의 이해의 차이로 발생하는 현실적인 차이에서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구원을 하지 않으시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로마서 2장의 말씀처럼 심판도 우리의 것이 아니고 모든 세대의 심판도 하나님이 결정하시고 구원하실 분도 하나님이기 때문이겠지요. 개인적으로 기독교의 보수적이면서도 배타적인 구원관과 하나님의 온 인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는 사랑은 대비되면서도 공존한다고 말한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모든 세계관에 속하는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배타성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존재의 이해와 사랑은 그분이 자신이 아닌 하나의 피조된 인간으로서 한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처한 상황은 그 옆에서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부모도 판단할 수 없는 신의 영역이니까요. 그분을 진정 사랑의 하나님으로 우리가 믿고 있다면 가장 공정하고도 가장 큰 배려깊은 사랑으로 한 영혼을 바라보실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참고로 제 짧은 글이 거슬리시다면 제 사견으로 그냥 정리해주십시오. 원래 물고리를 잡으면 낚싯대는 버리라고, 오늘 그 의미를 깨달았으면 과정 속에서 생길 수 있었던 실수나 경험에서는 자유로워지라고 논어에서 들은 것 같군요. 제 짧은 언어로 또 다른 실수를 할까 두렵고 죄송스럽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구원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느냐?라고 물어보신 것 같습니다. 이것 또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을 때 자신의 구원은 괜찮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하는 이미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모세의 어떤 모습보다 이 장면에서 가장 예수의 모습과 흡사했다고 생각합니다. 한 인간으로 최고의 사랑으로 '헌신하고 희생'할 수 있는 모습과 자세가 자신의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지고 가고 있는 그리스도를 가장 닮은 모습일 테니까요. (그렇지만 이러한 사랑도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과 사랑이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질 수 있느냐? 제 의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스튜던트님의 생각의 의도와는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구원하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구원에 가까워진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이것도 칭의,성화,영화를 이해하지 못해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구지 이렇게 생각하는 저로서도 구원이라는 단어와 사랑이라는 단어가 왜 다른 거냐라고 표현했냐?라고 하시면 빛은 원자냐? 파동이냐? 라고 물으시는 것 같아서 조금 난처합니다. 참고로 빛은 파동이면서 원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빛의 파동의 특성을 연구하지 않고서 빛의 원자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빛(물리적 특성의 빛)에 대해서 조금더 온전히 이해하기 힘든 것 같이.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조금더 심층?있게 들여다보고 싶은 의도였기에 인간 언어 표현의 한계를 드러냈다고 밖에 할 수 없네요. 하나인 것을 인간의 한계로 미분해 보았다고 너그러히 봐주시길 바랍니다.

  • ?
    student 2011.08.19 13:51

    아주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가한 이해와 밑에 "백부장님" 이 이해한것은 완전히 반대니, 꼭 다른글을 읽은것같습니다. 하하...

    우리가 성경을 읽는것도 그렀겠지요.  똑같은 글을 놓고 반대로 읽을수 있겠지요.

     

    전 님이 하신 모세이야기가 정말 마음에 와 닫습니다.

    그가 "구원"을 거부한 순간 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을 맛보았다고 전 생각합니다.

    그의 이기심(죄의 뿌리)  으로 부터 완전한 자유를 경험한 귀중한 순간이었을겁니다.

    아마도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보다 "못한" 말씀을 하셨을겁니다.  모세에게 이런 큰 구원을 경험해 주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선 자기의 "위신"도 버리시는 멋있는 분인것같습니다.

    그 분의 큰 사랑안에서 쉼을 찾는 안식일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 ?
    student 2011.08.18 02:19

    흙으로님,

    제가 볼땐 "심층"같습니다만 아무래도 빈배님은 "표층" 으로 보실것 같습니다. 하하...관점의 차이겠지요.

    마지막으로...진정한 기독교의 구원관과 하나님에 대한 세계관은 배타적일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의 사랑안에 "배타"가 존재할수 없습니다.  있다면, 사람들의 오해이겠지요.  이런 오해를 풀어 주는게 말씀하신 "십자가의 사랑"이 아닐까요?

    절대적인 사랑의 창조주가 "배타적"일수 있다는 것자체가 자기모순아니겠습니까?

    "유일신"에 대한 오해가 빚은 결과물 같습니다만...

    우리 재림교회가 그 오해를 풀어주기는 커녕 진리의 이름으로 더 부채질하는 경우가 많은것같아 매우 안타갑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은 답글 대단히 감사합니다.

    진리안에서 계속 정진하시길...

    p.s. 예수라함은 그 "발음" 또는 "소리" 자체에는 전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예수인것은 그 분의 성품, 그분의 100% 이타적인 사랑의

    성품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성품을 아는 것이 진정한 예수를 아는 것이아닐까요?  이런면에서 진짜 예수를 아는 기독교인은 몇이나 될까요?

    "이방 종교"에서 "예수"를 더잘 아는 분들도 있지않겠습니까? 

  • ?
    빈배 2011.08.18 09:38

    댓글 주신 student 님, 흙으로님, Windwalker 님 고맙습니다.

    이런 차분한 분위기에서의 토론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흙으로 님, Paul Knitter의 책을 읽으셨다고 하니 반갑습니다.

    저는 그분의 책들을 교과서로 썼습니다.

    그분은 지난 해 12월 한국에 다녀 갔습니다.  검색해보시면 그분이 한국에서 한 말들이 나옵니다.

     

    아시겠지만 그분은 기독교인들이 타종교(요즘은 "이웃종교"라는 말을 선호합니다.

    "이방종교"라는 말은 절대 안되고요-student 님께 미안^^)에 대한

    태도를 세 가지 내지 네 가지로 분류하지요.

    다시 말해 기독교라고 해서 모두 똑 같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도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배타적 태도를 유지하는 이들이

    숫자적으로는 아직 다수에 속하겠지만

    신학적으로는 열세라 할 수 있겠지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라든가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하는

    성경 구절에 대한 해석도 여러 가지일 수가 있습니다.  제 글 여기 저기에 이 구절들에 대한

    풀이를 했습니다만, 이것 때문에 기독교가 배타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이런 말들은 이른바 "고백적 언어" "사랑의 언어"이지 기술적(descriptive) 언어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우리 어머니가 나에게 유일 절대적인 어머니"라고 하는 말이 반드시

    "다른 어머니는 무조건 옳지 못한 어머니"라는 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지요.

    그리고 "구원"이 뭔가 하는 것은 종교마다, 교파마다, 심지어 개인마다 약간씩 다릅니다.

    내가 원하는 "구원"을 다른 종교나 다른 사람들은 별로라 생각하거나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지요.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고 할 때 불교에서는

    "당신들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에 가서 왕노릇하면서 영원히 사는 것이 '구원'이라면

    우린 사양하겠습니다."할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극락 같은 곳에 가는 것이 최종의

    목표가 아니니까요.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이정도만 말씀드리고 기회되면 더 이야기하면 좋겠습니다.

  • ?
    흙으로 2011.08.18 14:01

    빈배님 감사합니다. 글 속에서 예전에 읽었던 폴 니터와 폴 틸리히 책들의 잊혀졌던 단어들이 다시금 생각이 납니다. 답글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들이 잘 정리되는 것 같습니다.^^ ps. 폴 니터에 관한 책을 교과서로 쓰셨다니 궁금하네요. 전에 우연히 선택해 읽었던 몇몇 책들이 빈배님이 쓰신 걸 알고 꽤 놀랐습니다(긍정적 의미입니다^^). 

  • ?
    student 2011.08.18 22:57

    죄송합니다.

    "이방"종교란 말은 삼가하겠습니다.

    "이웃"이라는 말이 훨씬 듣기가 좋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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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부장 2011.08.18 10:49

    흙으로님의 글을 읽으며 큰 감동을 얻습니다. 좀처럼 보기 드문 정통 구원관이 내재된, 현대의 로마 백부장을 대하는 듯합니다. 기독교는 생래적으로 배타성을 띨 수밖에 없고 당연 이분 구도가 생래적인 것입니다. 예수는 천국 우리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그 문을 통과하지 않는 자는 이리요 거짓 목자이겠지요. ‘예수의 실존에 대한 단초에서부터 구원은 시작이 됩니다. 승천하신 예수를 찾는 자가 성경의 진의를 제대로 이해한 자이고, 그 실존을 사실적으로 이해할 때에 진정한 심층신앙이 된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심층이라는 미명하에 극히 인간적으로 해석하여 자의적인 길을 가는 것은 고금을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갔던 짝퉁진리이겠지요. 소리로 말하면 흙으로님만이 가성이 아닌 진성의 소리를 찾아가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마음의 변화를 추구하는 길과 학문의 수렁에 빠진 길의 최후 정점은 극명한 이분법 결과로 갈라질 것입니다. 학문은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야 하지만 종교 학문을 참 신앙에 대체 시키는 일은 헤어나기 힘든 깊은 늪으로 빠지는 길입니다.“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베드로의 고백을 복스럽다 평하신 분께서 동일한 시선으로 님을 주목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람의 이설에 흔들리지 말고 마지막 남은 여정이 최선의 길이 되어 심령에 환희와 은혜가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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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종인 2011.08.18 12:11

    이 양반은 티나는대 왜자꾸 이름을 바꿔가며 올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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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부장 2011.08.18 17:13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불가사의한 사실은 스스로 진리를 찾았다, 진리의 길에 서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여기 "제자"니 뭐니 하고 나오는 사람이나 기타 몇몇 사람처럼, 하나같이 악의적으로 남을 헐뜯는 험구의 말을 그렇게 잘 하는 걸까?  하는 것이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했는데, 이런 이들의 경우 진리가 이들을 그렇게 험악한 사람, 남을 깔보는 교만한 사람으로 만든 것 같으니, 도대체 이런 진리를 찾았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수일까?  주장하는 바가 뭔가 하는 것은 차치하고 남을 대하는 그 무례한 태도에서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하질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마음의 변화를 추구하는 길"이 도달할 수 있는 "정점"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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