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온 김에 저의 옛날 제자가 쓴 글이 흥미로워 여기 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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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누명을 씌운 어느 우등생의 반성
초등학교 어린이들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삼각(三角)자와 엑스터시
초등학교 5학년 즈음으로 기억한다. 공부를 곧잘 했던 덕에 학급 반장을 맡았던 나는, 어린아이 특유의 치기(稚氣)까지 겹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건방을 떨었다. 선생님의 총애에다 동급생들의 선망어린 시선마저 마음껏 누렸으니 기고만장했을 수밖에. 그러던 무렵 ‘삼각(三角)자’ 사건이 있었다. 각도와 길이를 재는 그 삼각자말이다. 삼각자가 ‘엑스터시 이야기’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하루는 삼각자에 우연히 맞아 유혈이 낭자한 채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엑스터시 상태에 빠져 다른 차원에 다녀왔다’라는 식의 뜬금없는 얘기는 아니니 걱정 마시길.
그 즈음 꽤나 좋은 삼각자를 선물로 받았다. 눈금도 선명하고 두툼한 삼각자로 동생이 감히 손도 댈 수 없는 나의 애장품이었다. 아까워서 안 쓰는 탓에 본래의 용도를 방기하는 그런 종류의 물건 말이다. 나에게는 그 삼각자가 그랬다. 그러던 중 안타깝게도 삼각자를 잃어버렸다. 집안 구석구석을 아무리 찾아도 삼각자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렇게 한참을 찾아 헤매던 어느 날, 학교에서 같은 반 여학생이 똑같은 삼각자를 가지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 여학생과 그리 친하지 않았던 탓에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고, 굉장히 말수가 적고 얌전했던 친구였다. 한 마디로 눈에 잘 띄지 않는 유형의 학생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내가 잃어버린 것과 똑같은 삼각자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애타게 삼각자를 찾고 있던 나에게 결론은 명쾌했다. 그 친구가 내 삼각자를 슬쩍 한 것이라고 생각한 나는 다짜고짜 삼각자를 내 놓으라고 시비를 걸었다. 그 여학생은 눈이 동그래지면서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고, 그러면서 다툼이 시작되었다. 나는 삼각자를 그 친구가 훔쳤다고 소리치고 그 친구는 아니라고 한사코 버텼다. 시간이 갈수록 언성은 높아져 반 친구들이 모여들어 싸움을 구경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나는 제 분을 참지 못하고 힘으로 삼각자를 뺏었고, 그 친구는 울음을 터뜨렸다. 구경하던 여학생들은 나에게 삼각자를 돌려주라고 했지만, 은근히 내 편을 드는 남학생들의 지원에 힘입어 ‘내건데 왜 돌려 주냐’고 큰 소리를 쳤다. 하지만 여학생의 울음이 점점 커져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되자, 나는 마지못해 돌려주었다. 내 삼각자를 네가 훔친 것은 맞지만 내가 양보한다는 식의 제스처를 취하면서. 원래도 그리 친하지 않았던 그 친구와 그 이후로 전혀 말도 안하게 된 것은 당연지사.
하지만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여러 달이 지나 6학년이 된 나는 그 삼각자를 정말로 우연하게도 찾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책상과 벽 사이의 좁은 틈에 문제의 그 삼각자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걸 발견하던 순간에 들었던 느낌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끼던 물건을 찾게 된 기쁨은커녕 한 겨울에 찬물을 한 바가지는 뒤집어 쓴 것 같은 그 느낌을.
내 삼각자는 발견되는 그날까지 책상 뒤에 꼼짝 않고 숨어 있었고, 내 것이라고 실랑이를 벌였던 그 삼각자는 실제로 친구의 것이었다. 친구가 나 몰래 삼각자를 내 책상 뒤에 살짝 숨겨둔 거라면 내 마음이 참으로 편했겠지만, 그럴 리가 있겠나. 삼각자에 대한 애정에다, 나보다 공부도 조금 못하고 학급 임원도 아닌 그 친구를 무시하는 마음, 거기다 치기어린 자기 확신까지 겹쳐서 친구를 도둑으로 몰고 남의 삼각자까지 뺏으려 했던 것이다. 아무리 어린 아이였다 할지라도 어쩌자고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지금 생각해도 등에 식은땀이 난다.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건 ‘반성 없는 자기 확신’
‘삼각자 사건’은 그 이후로도 자주 내 기억에 떠올라 참으로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트라우마(trauma)가 되었다. 그 사건은 어린 시절 으레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일로 치부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마치 삼각자의 날카로운 모서리처럼 나를 오랫동안 찔러 왔다. ‘엑스터시 이야기’에서 언급하는 첫 에피소드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사건은 나로 하여금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탓에 떠올리면 여전히 마음이 불편해 진다.
‘엑스터시(ecstasy)’를 나 밖에 서는 일이자, 그로 말미암아 나의 세계관에 균열과 확장이 초래되는 사건이라 정의할 때, 삼각자 에피소드는 나에게 엑스터시에 다름 아니었다. 다시 말해 나는 이 사건이 준 깨달음으로 인해, 아쉽지만 그저 나 자신을 멋지다고 믿는 순진한 나로 결코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 사건으로 인해 남의 입장이라는 게 무언지 알게 되었다. 갑자기 도둑으로 몰아가며 자기 물건을 뺏으려는 나를 보고 그 친구는 얼마나 놀라고 억울해 했을까. 확신에 차서 자기를 도둑으로 몰아붙이고, 심지어 완력으로 삼각자를 빼앗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지금 기억하기에도 나는 그 당시 너무도 뻔뻔했다.
그 친구가 겪었을 수치감이나 당혹감에 대한 생각은 그 날의 다툼 과정에서 티끌만큼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여러 달 동안 그 친구가 남의 물건을 훔쳐가고도 시치미를 떼는 염치없는 사람이라는 내 생각은 추호도 변화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자기 밖에 모르고, 자기만이 옳다고 고집피우는 전형적인 어린 아이였다.
또 삼각자를 우연히 발견했다는 사실도 거듭 떠올랐다. 만약 그 삼각자를 찾지 못했더라면, 그 여학생은 내 삼각자를 훔쳐간 친구로 여전히 기억될 것이다. 더불어 내가 옳다는 자기 확신 역시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을 터이므로, 적어도 이 사건과 관련해서 나는 정말로 구제불가능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삼각자가 발견되는 바람에 이 모든 스토리가 다행스럽지만, 내 마음을 쓰라리게 만드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된 게 아닌가.
다른 한편으로 보면 삼각자가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내 마음은 훨씬 더 편안했으리라. 그 친구는 여전히 내 소중한 물건을 훔쳐간 사람으로, 반면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량을 베푼 사람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또 잃어버린 삼각자 역시 내 어린 시절의 귀중한 추억거리이자 내 아량을 증언하는 기념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잃어버린 것들은 역설적으로 영원해지지 않는가 말이다. 더불어 나의 치기어린 자기중심성 역시 그 빛을 잃지 않았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잃어버린 줄 알았던 삼각자가 책상 뒤에서 슬며시 고개를 내밀면서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이제 삼각자는 나에게 부끄러움을 기억하게 만드는 꺼림칙한 물건이 되었고, 나의 자기중심성과 자기 확신은 큰 상처를 입었다. 나는 결국 내가 자기 확신에 빠져 친구를 도둑으로 몰아붙이고, 심한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이 점에서 삼각자 사건은 나를 어린 아이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커다란 계기였다.
엑스터시는 우리를 변화시킨다
우물 안의 개구리가 우물 밖으로 뛰쳐나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고, 세계관과 더불어 자기 인식을 바꾸게 되는 사건을 엑스터시로 규정한다면, ‘삼각자 사건’은 분명 나에게 엑스터시였다. 거창스럽게 들리긴 하지만, 나는 그 사건을 통해 ‘나’ 밖에 설 수 있었다. 무엇보다 상처받았을 그 친구의 마음을 돌이켜 보았고, 삼각자를 찾는 것 외에도 유치하기 그지없었던 내 자신의 모습도 비로소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독선적이었는가와 생각만큼 멋지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게다가 이 모든 자기반성이 실제로는 삼각자를 우연히 찾게 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다는 점이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 삼각자를 찾지 못했더라면 나는 분명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여러 깨달음이 당시가 아니라 한참의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명확해 졌다는 점은 밝혀야겠지만.
수십 년 전의 에피소드를 이 자리에서 들먹이는 것은 내가 자기 반성적인 인간이라고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혹은 내가 이 삼각자 사건으로 인해 일거에 좋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그 이후로 사뭇 겸손한 인생을 여태껏 꾸려오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다. 인간이 어찌 그리 쉽게 변할 수 있겠는가.
나는 다만 그 사건으로 인해 ‘자기를 벗어나는 경험이 자신이 원하고 통제할 수 있는 방식대로 오지 않는다’는 점과 실제로 ‘엑스터시는 쉽사리 우리의 삶으로 수용되거나 통합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어렴풋이 눈 뜨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걸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아끼던 삼각자를 잃어버리고, 친구가 똑 같은 모양의 삼각자를 학교에 가져 오고, 그것을 보고 시비가 붙고, 남의 마음에 큰 상처를 주고, 그리고 몇 달이 지나 우연히 집에서 삼각자를 다시 발견하게 된 일련의 경험들 중에서 단 한 가지만 빠져도 삼각자 사건은 나에게 그리 큰 의미가 없었으리라. 그 점에서 이 사건은 내 삶이 내가 생각하고 기대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각인시킨다. 특히 엑스터시적 경험의 경우에는 더더욱.
동시에 이 사건이 현재진행형이라는 점도 말하고 싶다. 만약 책상 뒤에서 삼각자를 우연하게라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의 자기중심성과 확신은 한결 같았으리라. (물론 오늘에도 다른 방식으로 여전하긴 하다). 그리고 만약 내가 이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오늘의 내가 여전히 또 다른 종류의 자기 확신 속에 빠져 있는 게 아니며, 그런 종류의 확신을 냉정하게 깨트릴 ‘삼각자’가 또 다시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겠나. 이처럼 그 효용이 쉽사리 다 하는 법이 없고, 거듭 그 사건을 곱씹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엑스터시가 갖는 힘이 아닐까. 실제로 이점은 모든 엑스터시 경험에 공통된 특징으로, 앞으로 하게 될 종교적 엑스터시 이야기에서 더욱 분명해 지리라 믿는다.
친구야! 정말 미안해
저자와 제목도 기억나진 않지만, 얼굴이 잘 빨개지는 학생이 붉어진 얼굴 때문에 도둑으로 몰린 끝에 우물에 몸을 던진다는 내용의 단편 소설을 오래 전에 읽은 적이 있다. ‘쉽게 붉어지는 얼굴 때문에 도둑으로 몰리면 어떻게 되나’라는 생각이 결국 비극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나 때문에 곤욕을 치른 그 친구의 얼굴빛이 당시에 어떠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때 정녕 얼굴이 빨개져야 하는 게 나였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나 때문에 날벼락을 맞고, 분함과 억울함 때문에 가슴 아팠을 친구에게 그 때 전하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을 뒤늦게나마 전한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그 친구 덕분에 그나마 내가 자신을 돌이켜 보는 ‘자기반성(self-reflection)’이라는 걸 배우기 시작한 건 분명하다. 그 점에선 미안함과 더불어 고마움도 새삼 느낀다.
반성 없는 ‘자기 확신’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는 나의 어렸을 적 얘기가 아니더라도, 살아오면서 다들 한번쯤은 경험했으리라. 그 점에서 나를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보게 만드는 엑스터시 경험은 비록 우리 등에 식은땀이 나게 만들지언정 우리 삶에 꼭 필요할 것이다. 특히나 자기 확신이 쉽사리 절대적 수준까지 치닫는 종교의 영역에서는 더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저는 이 글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건 ‘반성 없는 자기 확신’"이라는 문구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경고가 된다고 여겨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