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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 (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20


(그 친구는 많은 식구가 꽤 오래 버틸 수 있는 양의 곡식을 주었다.

식구의 굶주림을 면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당시에

돈보다도 귀한 식량을 쾌히 내준 친구에게 지금도 감사한

생각을 잊을 수가 없다. 연재 #19 끝부분)



2. 신도대회

 

 

교회재건위원회를 통해 교회재산회복을 하면서

많은 난관에 부딪치곤 했다. 각기 다른 의견들을

수용하기도 힘들고 무시하기도 힘이 들었다.

재산을 회수하는 것도 한정이 있었고 법적으로

해야 할 일도 많았다. 그래서 의견이 모아지기를,

신도대회를 해서 교회사업회복을 위한 간사들을

다시 선출하자 하여 해방된 지 두 달 후인 10월경에

신도 대회를 열기로 했다. 준비위원으로는

임성원, 이성의, 오석영, 박원실, 이여식 제씨로 정하고

재산 회수위원으로는 김병목, 김동규, 정동심 등이

계속 일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정하고 나니

조금 일이 제대로 진행 되는 것 같았다. 신도대회가

준비되는 동안 재산들을 속히 회복하기 위해서

대행위원장으로 수고하신 임종회 목사를 찾기로 했다.

그 분이라면 우리교회의 동산들을 누가 차지하고 있는지

상당히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임종회 목사는 수감되었던 분들이 다 풀려나자

자기의 할 일을 다 했다는 생각으로 서울을 떠났다.

이곳저곳을 탐문한 결과 멀리 떨어진 경기도 광주군

곤지암에 이사하여 살고 계시다 했다.

 

 

1945년 9월 어느 날, 김동규 선생과 나는 고생 끝에

그리 가는 버스 편을 발견하고 곤지암으로 갔다.

수소문하여 임종회 목사 댁을 찾아가 먼 길을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교회일이 가장 어려웠던 그 당시의 일은

생각도 하기 싫다.” 하시며 가급적 말을 삼가시려 함이 역력했다.

그래서 차편도 없기에 하룻밤을 함께 지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임 목사님은 교회 동산은 별로 없지만

당시의 촉탁 변호사였던 신태악 씨의 집에 몇 가지 물건이

더 있을 것이라며 적어 주셨다. 요즘은 별로 시세가 나가는

물건들이 아니지만 당시에는 시세도 그렇거니와 아주 귀중한

교회의 풍금 등 악기와 타이프라이터 등이었다.

임 목사님은 물품 목록을 가지고 요구하기 보다는

그분이 자진해서 내어 놓도록 권유하라 하셨다.

 

 

다음날 아침, 임 목사님은 “서울의 식량사정을 잘 안다.”하며

상당한 양의 쌀을 내어 주셨다. 우리는 단신으로 이 곳을

찾아오는 것도 교통편 때문에 고생이 심했는데 쌀을

가져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거절의 뜻을 말씀드렸으나

“당신들의 부엌 사정을 좀 생각해 보라”며 어찌 권하시는지

김동규 선생과 둘이 그 양곡을 가지고 행여나 서울 행 버스가

있을까 하고 큰 길로 나왔다. 한 참을 기다려도 차편이 없기에

할 수없이 준비해간 몽둥이를 쌀자루에 꿰어 두 사람이 들고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경적을 울리며

군대 지프차가 섰다. 천만 뜻밖에도 그 지프차에는 함경남도

함흥에 계신 우리 교회의 독실한 여신도의 아들인 김강 형제가

타고 있었다. 그의 매부는 우리 교회의사역자인 고희경 씨였다.

영어를 잘 하는지 김강 형제는 어느새 미군 통역으로 일하는 중

서울로 가다가 우리를 보고 차를 세운 것이다. 그 먼 길을

많은 양식을 들고 걸어야만 되는 우리의 어려움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평생 처음 타 보는 미군 지프차를 준비해 주신 것이

확실했다. 이날 오후 1시경에 종로에 무사히 도착하였고,

무질서하기 짝이 없는 전차를 타고 청량리에 왔다.

해방 후 첫 번 가는 먼 길이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돌아왔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속담대로 다음날 나는 김동규, 김병목 씨와

교회해산 시 촉탁변호사였던 신태악 씨 자택을 찾아 가서

물품 목록을 내어 놓으니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물품을 내어 놓았다. 교회풍금은 신태악 씨의 딸이 마침

연습을 하다가 우리가 들고 나오니 얼마나 슬피 우는지

우리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다만 타이프라이터는 그 자리에

없었는데 후에 찾아서 보내 준다고 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재건위원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신도 대회를 개최하기로

애를 쓰고 있었지만 제일 큰 문제는 식사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야말로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다.

이때 내가 양식을 얻어왔던 자동의숙이 생각이 났다.

자동의숙에 식량이 비축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생각이 된다.

 

 

1943년 12월 27일 밤,

일본의 앞잡이인 총독부에 의하여 고문과 폭력으로

“조선 제7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 해산”을 결의 선포함으로

모든 교회기관이 폐지 및 이전되면서 면목동에 있던 “삼육원”은

신태악 변호사가 맡아서 그 이름을 “자동의숙”이라고 명하고,

책임자로 이여식 씨와 오석영 씨를 두었는데 이 두 분의

지도아래 학생 몇 명이 농사를 지어 그 양곡을 비축해 놓았었다.

갑자기 해방이 되니 그 양곡들은 고스란히 감추어진

양식이 되었던 것이다. 신도대회를 준비하면서 해결할 수 없었던

양식문제는 이 자동의숙에 비축된 양곡을 쓰자고 할 때

아무도 반대하는 이 없이 찬성하여 아무 근심 없이

신도대회를 치르게 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여식, 오석영,

이 두 분이 이 기관에서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은 하나님의

기이하신 인도요, 섭리라는 생각에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1945년 10월 중순,

1주일간 신도대회를 개최했다. 장엄하고 감개무량했다.

이때는 이미 남북왕래가 다소 거북한 입장이었으나,

아직 38선이 막히지 않은 때라 라디오방송을 통해

10월 중순에 신도대회를 한다고 했더니 그 방송을 듣고

저 먼 함경남도 함흥에 있던 이성일 씨 같은 분으로부터

전국에 있는 많은 신도들이 참석했다. 교회해산 후에

처음 모이는 총회이니 그 모인 사람들의 기쁨은

말할 것이 없었다. 특히 이번 합회 총희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무질서한 시국에 교회를 이끌어갈 합회장, 합회 회계,

시조사총무, 편집인, 병원총무 등 지도자와 모든 일들을

논의할 합회평의원회 위원들을 뽑는 일이었다.

그때 선거 위원장이 김봉덕 목사였는데 합회평의원회 위원을

열 명인지 열다섯 명인지를 뽑아서 가지고 나오는데

문제가 심각했다. 교우들 사이에 남아있는 불신의 감정과

또 교회해산의 역할을 했던 분들에 대한 우려가 있어서 그랬겠지만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나온 이름들은 도무지 들어 본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때 일본에 가있던 교인들도 오고 만주에 있던

교인들도 왔는데, 그들 가운데 신앙심이 좋다고 서로 추천하여

선출해서 나온 모양인데 조선의 혼란한 사정도,

교회의 어려웠던 사정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이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았다. 아마 나섰다가

공연히 비난받을까 해서 그랬던 것 같다. 아무래도 그냥

결정을 하면 안 되겠다 생각이 되어, 나는 일어나 “선거 위원들이

참 수고를 많이 하셨습니다. 교회사업의 정책을 결정할 사람들이

믿음도 있어야 되지만, 견문과 경험도 있고 도량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교회의 전후(前後)사정도 좀 알아야 이 난국을

헤쳐 나갈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선거 위원들께서

다시 한번 모이셔서한 번 더 심사숙고하여 보는 것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라고 의견을 이야기했다. 선거 위원장 김봉덕 목사와

사회하시던 분이 회중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고 물으니

“정동심목사의 말대로 다시 선출하자!”하여 다시 꽤 적당한

사람들로 결정이 되었다. 그때에 나의 의견이 꼭 옳았다는

말이 아니라 아마 그대로 받았다면 우리 교회는 다시 한번

큰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합회 차원의 인선으로는 합회장에 임성원 목사, 합회회계로 오석영 씨,

시조사 편집인에는 김상칠 씨, 시조사 주필에 송용환 씨,

위생병원과 시조사 두 곳의 총무에 정동심 목사를 선출하여

모든 신도의 재가를 받았다. 내 문제까지 또 반대할 수가 없어

그냥 잠잠히 있으니 이렇게 합회가 다시 조직이 되었다.

그 외에 몇 구역을 나누어 포교(布敎)할 책임자 몇 명도 선출하였다.

이번 책임을 맡은 분들은 때가 올 때까지는 희생적으로 자비량(自費糧)

하기로 했다. 다른 어떤 때 보다 모든 신도들이 기쁨으로 참석하고

화평 속에 모든 일을 결정하는 신도대회였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비록 교회가 안정될 때까지 맡은 책임들이었지만 걱정은 태산 같았다.

그야말로 속담대로 “고양이가 소의 머리를 맡은 격”이었다.

우선 교인들의 영적안정을 위해 교회지남과 안식일학교 과정책을

만들어야 하겠는데 자금과 인적자원이 없어서 의논 끝에 우선

영어를 잘 아는 김상칠 씨가 영어과정책을 번역하여 내기로 했다.

영어에 능통한 김상칠 씨는 원래가 부지런한 분이었다.

한 번 결정되자 곧 과정책이 나오게 되어 모든 신자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그야말로 칠년대한봉감우 (七年大旱峯甘雨-

7년 가뭄에 단비를 받는 일) 격이라 할만한 기쁨 그 자체였다.

 

 

나는 과정책을 만들면서 김상칠 씨의 사람됨을 다시 알고 감복했다.

과정책을 번역한 후에 준(準)을 본대로 출판을 하게 되는데

그 준보는 일을 나에게 하도록 결정이 된 것이다.

김상칠 씨는 순안의명학교 3회 출신으로 5회인 나의 선배셨다.

그런데 선배가 만드신 책을 후배가 준을 보고 준을 본대로

출판을 하게 되니 이런 문제 때문에 의견에 충돌이 생기면

어찌하나 하는 염려가 앞섰다. 할 수 없이 선배 되시는

김 선생님을 찾아가 나의 염려를 말씀드리자 “아무 염려 하지 말고

정 선생의 의견대로 준을 보고 출판하도록 하시오”하며,

겸손하고, 속이 넓게 말씀 하셨다. 역시 큰 사람이셨다.

“모든 분들이 김 선생님처럼 아랫사람에게 대해 준다면

얼마나 감사할까?”하는 생각이 났다. 한편, 오랫동안 교회가

문을 닫고 있었음으로 재정이 바닥난 상태에서 회계로 선출된

오석영 목사가 많이 고생을 했다. 어렵게 예산을 짰는데

합회장은 600원, 총무, 회계 등은 500원으로 월급이 책정되어

우선 지내보자고 하였다. 보통 가정이 겨우 살만한 금액이었다.

나는 여덟 식구인지라 도무지 생활을 해 나가기가 힘이 들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했다.

 

 

해방 후 첫 신도대회를 무사히 마치고 나는 근방교회들을

찾아보기로 하고 우선 개성교회로 갔다. 나는 지방교회를

심방할 때에 가능한대로 여관을 숙소로 정했다.

개성 동아여관을 찾아가니 교회해산이 되고 2 년 만인데도

주인은 나를 알아보았다. 주인의 말이 “다른 때는 담배도

안하셔서 독방을 주었는데, 해방 후에는 손님이 많아 독방이

없으니 다른 곳을 찾아보라.”고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

이곳저곳 찾아 다녔으나 다 만원인지라 다시 동아여관에 찾아가

사정을 하니 조용한 방을 드릴 터이니 다른 분과 함께 쓰라고 한다.

그것도 감지덕지(感之德之) 하여 들어가니 이미 한 분이 잠들어 있었다.

저녁도 못 먹었으나 잠을 자게 해준 것도 감사해서 그냥 잤다.


 

아침밥상이 들어오는데 우리가 친구인줄 알았는지 한상에다 차려 내어

오는데 참 입장이 거북했다. 좌우간 식사기도를 하고 수저를 들려고

하는데 먼저 식사를 시작한 이 손님이 나의 기도하는 것을 보고는

“별꼴 다 보겠네!”하고 큰 소리로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수저를 놓고 성경말씀과 또 비인불인 불인비인(非人不忍 不忍非人)

이라는 성현의 말씀을 생각하며 꾹 참고 잠시 있었다.

그러자 이 손님은 “참 세상은 이상도 하지!

요즘 청년들은 괴이해!”라며 분한 듯이 중얼 거렸다.

내가 계속 가만히 있자 이번에는 “큰 것이 사람 되었다는 것은

안 믿고 조그만 것이 사람 되었다는 것은 믿는단 말이야!”하고

또 중얼 거렸다. 드디어 나는 알아채고 “가만히 보니 당신은

단군교인이구려!”했더니 “그렇소!”하고 대답을 했다.

나는 “이제는 내 차례.”라고 생각하고 말을 계속 했다.

그래서 밥상은 한쪽으로 치워놓고 토론을 하게 되었는데

점입가경(漸入佳境) 이었다.

“당신은 정말 단군 할아버지가 곰의 자손이라 생각하시오?

그러면 당신의 조상이 정말 곰이라고 생각하시오?”

하고 묻자 머뭇거리며 대답을 못했다. “자, 큰 곰이 변하여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나 작은 아메바가 변하여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나 다

피장파장 아니오? 그거야 말로 오십보백보요!”하고 말하자

역시 대답을 못했다. 나는 “나도 우리 조선 사람의 조상이

단군이라는 것은 믿소! 그러나 사람의 종류는 사람,

짐승의 종류는 짐승이지, 뭐가 변해서 사람이 될 수가 있겠소?

보아하니 당신은 단군교의 책임자 같은데 다시는 곰이

단군의 조상이라는 말은 하지 마시오!”라고 재삼재사 말을 하자

역시 묵묵부답 이었다. 나는 계속했다.

“당신이 단군교에 다니시니 한학(漢學)도 아실 것 아니오?

중국 역사에 보면 성군으로 요순(堯舜)이 나오는데 요순이

어찌나 선정을 하는지 금수(禽獸)가 와서 함께 즐거이 놀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소? 우리가 말하기를 단군도 성군(聖君)이라 하는데

생각건대 단군 할아버지도 선정을 하여 곰과 다른 금수들이

단군 옆에 와서 먹을 것도 얻어먹고 노는 것을 보고 후세 사람들이

단군의 부모를 본적이 없는지라 이런 전설 같은 이야기를

만든 것이 아니겠소?”하고 말을 했다. 그러자 이 손님은

“선생님은 어디서 오신 무엇 하시는 분이냐?”고 물으면서

갑자기 내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선생은 어디서 오신 분이오?”하고 나도 그분을 대접하느라고 물었다.

“서울, 신설동에서 왔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아, 그러면 당신이 성세영 선생이 아니시오?” 하고 내가 물었다

“아니, 그것을 어떻게 아십니까?”하고 의아해 했다.

“당신이 요즘 아침마다 단군교에 대하여 라디오에 나와서

방송 하는 것을 듣고 있었소!”하자 몹시도 흐뭇해했다.

자칫 잘못했으면 식탁을 마주하고 시비가 생길 뻔 했으나

이제는 절친한 친구가 되어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계속 했다.

음식은 식었어도 별식을 먹는 듯 했다.

나는 식사 후에 “당신이 단군교의 책임자니 한 가지 더

알려 드릴 것이 있소! 단군이라고 할 때 그 단자가 나무목(木)변인

“檀”으로 되어 있는데 어떤 기록에는 “壇”으로 되어 있소.

일제시대에 일본 학자들이 단군을 “檀君”이라고 우겼지만,

우리 역사가 최남선 선생은 일본학자들과 격론을 벌리면서

단군 할아버지는 천제(天祭)를 드리면서 사신 임금인고로 “壇君”

이라고 하는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하여 일본학자들이 대답도 못하고

부끄러워했습니다.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해 주었다.

성세영 씨는 다시 나의 관해서 말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나의 관해 소개를 하자 이분은 “앞으로 목사님 교회의 도리에

관하여 가급적 연구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마치 오래된

옛 친구를 작별하듯 아쉬워하면서 작별했다. 당시에 나도 아직 젊고

성질이 급한 때 인지라 실수를 할 뻔했지만 그 순간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라는 말과

“겸손이 존귀보다 앞선다.”라는 말씀이 나를 구원했다는 생각이 든다.

 

 

성세영 씨와 아쉬운 작별을 하고 나는 개성교회를 찾아갔다.

당시 개성교회는 개성유지들이 활을 쏘면서 사교장으로 사용하던

초라한 가옥을 빌려서 교회당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교회당은 비록 초라했으나 그 당시 감리교에서 경영하던

송도고등보통학교라는, 전국적으로 알아주던 이 학교 선생 몇 분이

우리 교회의 도리를 깨닫고 참석하고 있었다.

이때 개성교회는 명석원 장로와 김관수 장로가 주인 역할을 했다.

교회해산만 아니었다면 일년에 두 세 번씩은 만나는 분들이었지만

만 2년 만에 만나게 되니 그 기쁨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두 분 장로님은 누구보다도 다정다감한 분들이라

얼마나 반갑게 맞아 주시는지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교회해산의 아픔을 밤새 이야기 하면서 이제부터 개성교회를

발전시키자고 이야기 하고 기도로 작별을 했다.

얼마 후에 불행한 6.25 사변으로 교우들은 뿔뿔이 헤어 졌지만

그 두 분 장로님 가족들은 무사히 월남하였고 모든 가족이 도미하여

나성중앙교회와 오렌지카운티교회에서 활약을 하는 것을 보니

매우 감사하다. 주님 오실 때에 주안에서 잠드신 부모님을

반가이 재회하는 가족이 되기를 빌어 마지않는다.


 

1945년 12월 초라고 생각이 된다.

묵호에서 침례 받을 분이 많다고 침례 베풀 목사를 보내 달라는

서신을 받고 합회장 임성원 목사는 나에게 묵호로 가서

침례를 주라고 했다. 해방이 된지 4개월 밖에 되지 않아서

식량문제 다음으로 힘든 것이 교통 문제였다. 아예 묵호로 가는

버스도 없었다. 무턱대고 청량리 쪽으로 가서 두리번거리면서

살펴보니 군대 지프차가 여기 저기 있기에 아무 군인이나 붙잡고

횡성 방면으로 가는 차를 부탁하니 “무슨 일로 가는가?”하고 묻는다.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니 “아, 그런 일이라면 우선 태워 주겠다.”

고 하며 편리를 보아주어 횡성에 도착했다. 다시 군인들에게

부탁을 해서 강릉을 거쳐 묵호까지 당일로 도착했다.

기다리던 신자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피곤함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무려 40여명이 침례를 받았다. 아마 한국재림교회가 생긴 후에

이렇게 많은 분이 침례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부분이 장, 감리교회에서 개종한 분들인데

이들을 교회로 인도하신 분은 당시 평신도로서 열심히 전도하시던

반내현 형제였다. 침례식 후에 모든 분들이 “주님의 본을 따라

침례를 받으니 너무 기쁘고 감사하다.”면서 간증들을 했는데

그중 이순종 여사의 간증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이 분은 원래 장로교인으로 성결교회를 거쳐 우리교회로 개종하였는데

세례가 아닌 “정말로 물 가운데서 침례식을 거행하게 되었으면 하는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는데 감사하다.”라고 간증을 했다.

이후에 가장 되시는 오인환 장로를 우리교회로 개종케 하였으며

자녀들도 모두 우리교회 교육기관에서 양성하여 목사, 의사,

간호원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그의 자녀들은 오재윤 목사,

오재호 및 오재삼 의사, 조병서 목사의 부인이 된 오재은 여사 등이며

가장되시는 오인환 장로는 교회를 위해 오랫동안 수고 하고 계신 분이다.


 

3. “건국회의”와 “반민특위”


 

독립은 되었는데 정부는 아직 없고 미군정하에 있었다.

정당과 파가 얼마나 많은지, 어느 정당이 정말 국민을 위한

것인지도 알기가 힘들었다. 하루는 “군정은 군정이고, 나라를

움직일 대통령을 택해야겠는데 이를 위해 교회를 포함한 모든

단체가 참여해서 “건국의논을 하자.”며 건국회의에 대표자를

선정해서 보내라는 소식이 왔다. 우리교회에서는 나를 그곳에

가라고 결정이 되어 내가 안식일교회 대표로 가게 되었다.

그 회의에 나가보니 중국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 중

몇 분이 오셨는데 이름이 잘 기억되지는 않지만 임 선생이라는

50대 사람으로 풍채가 잘 생긴 분이 계셨고, 조봉암?, 김구 선생

같은 분이 회의를 이끌고 있었고 국내에서는 장덕수 씨, 법조계

김병로 씨 같은 분들이 참여해서 의논하는데 가만 형편을 보니

상해 임시정부에서 오신 분들이 자기네가 앞으로 이 나라를 맡아

가겠다는 취지였다. 또 그렇게 하실 만한 분들이었고 이유도 충분했다.

그러나 모든 단체가 다 모여서 함께 의논하자는 자리였다.

사회자는 “혹시 빠진 단체가 있으면 다섯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서

제출하면 결의를 해서 부르겠다.”고 했다.

 

 

그래서 발언권을 얻어 “나는 정치는 잘 모르지만 원래의 의견은

모든 단체가 대표자를 보내서 의논하자는 자리인데, 내가 듣기에

남노당이라는 단체가 있고 그 단체를 인도하는 이가

박헌영 씨라고 합디다. 그리고 당원도 수만 명이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 단체에도 연락을 했는지는 모르나 다 초청하여 의논하고 협조하면

앞으로 서로 다 좋지 않겠느냐?”고 하니까 다섯 명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 의견이 좋다고 했다. 그 자리에서 내 안이 결정되어

회의 중에 세 명 정도의 대표자를 선출하여 박헌영 씨를 만나

교섭하라고 보냈다. 그러나 그 분들은 갔다 와서 “남로당에선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한다.”고 보고를 하니 “그렇다면 할 수 없다.”하고

회의를 계속했다. 이후에 우리 사회가 이 남로당으로 인해서 얼마나

어려움을 당했는지 모른다. 이때 어떻게 해서라도 이들을 참석시켰다면

훨씬 어려움이 적지 않았겠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때에 어떤 결정이 났는지는 기억에도 별로 없다.


 

같은 해 12월 29일인가 30일인가, 서울운동장에서 또 무슨 회의가

있다고 다 나와야 된다고 해서 교회에서는 또 나보고 다녀오라 해서

이번에는 오석영 목사와 함께 나갔다. 서울운동장에는 셀 수도 없는

큰 군중이 해방된 기분으로 모였다. 십수만 명이라 하니

그대로 알뿐이다. 사람은 가득한데 무슨 회의로 모였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탁통치 문제가 나와

간단히 설명을 들으니 “우리가 완전히 독립하기 어려우니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우리 조선을 통치하다가 얼마 후에

독립하게 한다.”는 내용으로 “이 신탁통치를 지지하느냐?

안 하느냐?에 대한 답을 지금 하라.”고 하는데 이 회의의 성격이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일본의 통치하에

삼십 여 년 이상 지내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데 또 신탁 통치라니!

많은 사람들이 답을 안 하고 술렁이며 떠나기 시작했다.

우리도 빠져나가려고 운동장 문 가까이 오니 이미 계획적으로

나오는 출구는 트럭으로 막고 나가려는 사람들을 건장한 사람들이

몽둥이로 쳐서 머리가 터지고 난리가 났다. 오석영 씨와 나는

가만히 지혜롭게 빠져 나와서 집에 돌아 왔다. 이 나라의 독립도,

우리교회의 재건도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위생병원 총무로 있는 동안 난처한 문제가 한 가지 생겼다.

갑자기 이O목 씨, 김OO 씨, 심지어 김O영 목사 같은 분들까지

오셔서 병원구내 땅에 피난민 수용소를 지어야겠다고 하신다.

나는 병원총무로, 병원 안에 수용소를 진다니 허락할 수도 없지만

더구나 결핵환자병동 바로 옆에 짓는다니 위생적으로도 문제가 컸다.

선교사로 있던 닥터루가 있을 때는 병원에 이런 일들이 없다가

그 사람이 없다고 이렇게 고집들을 부리니 참 난감했다.

그래서 “곧 닥터 루도 나온다고 하니 좀 기다렸다가

의논해서 합시다.”해도 어디서 가져왔는지 벽돌을 옆에 싸놓고는

기초를 놓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합회장 되시는 임성원 목사까지

나서서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그런데 다행인지, 시조사에서 병원광고 낸 것을 보고 어떤 서양 사람이

위생병원을 찾아왔다. 닥터 루와 아는 사이로 그전에도 병원에 왔던

사람인데 병원광고를 보고 반가워서 찾아온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그 사람들이 수용소를 짓는 것을 보고는 “결핵병실 옆에

누가 이런 것을 짓느냐? 내가 알기에 닥터 루가 곧 나온다고

알고 있으니 물어보고 지으라.”고 야단을 쳤다. 병원총무인 나는 물론,

합회장 까지 나서서 말려도 듣지를 않더니 코 큰사람이 한 번 나와서

야단치니까 그만 중단을 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가 일본사람 아래서

36년이나 있다가 독립이 되었다고 하면서도 신탁통치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생각이 나면서 “정말 우리끼리는 작은 문제 하나도

해결할 수가 없단 말인가?”하고 마음이 아팠다.

“외국사람들이 말할 때는 듣고 우리가 조용히 말하는 것은

듣지를 않으니 언제 우리 민족이 성숙해 질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병원총무로 있으면서 회기동 교회에서 묵시록 강의를

해 달라 해서 그리 하기로 하고 한 주일 동안 강의를 했다.

그때 여러 가지 어수선한 문제로 회기동 지역에서 교회를

나오지 않던 분들이 굉장히 많이 나와서 강의를 듣고

“정말 예수를 믿어야 되겠습니다!”하면서 그 동안

하지 못했던 많은 신앙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뒷수습을 잘 못해서 많은 성과는 못 거두고

지나가고 말았던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우리는 행사는 많으나 뒷수습이 항상 문제라고 생각이 된다.


 

얼마 후에 정사영 박사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상봉리에

개인진료소를 열고 “위생병원에는 오전만 일을 보고

오후에는 개인진료소로 나갈 터이니 오후에 누가 와서

환자들을 돌보면 좋겠다.”고 병원에서 말을 꺼내셨다.

나는 내가 징역을 살 때, 나의 가족이 경제적으로

고생하던 생각이 나서 순교하신 최 목사의 자제되는

최옥만 씨가 의사는 아니지만 위생 강습소를 다닌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이를 추천했다.

그러나 정사영 박사는 의사로써 생각이 달랐는지

“그것은 좀 곤란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더니 “만약에 사람이 그리 없으면 차라리

병원약국에서 일하는 태영이를 쓰겠다.”하시기에

“우리 둘째아이 태영이는 그저 약방에만 있는 사람이지

병을 치료하거나 환자들을 다루는 일은 못한다.”고

거절을 하고 이일을 성사 시키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이 일후에 “정사영 원장은

이 분에게 일을 시키려 하는데 정 목사가 자기 아들을

일하게 하려고 최옥만 씨를 병원으로 못 들어오게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조금 알아보니 정사영 박사와 내가 이야기 할 때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L씨가 그런 허황된 소문을 내며

다닐 뿐만 아니라 당사자인 최옥만 씨에게도 그렇게 말을

전한 모양이다. 그 가족이 얼마나 섭섭했겠는가?

L씨는 교회해산 당시 열심히 전도도 하던 양반인데

이런 엉뚱한 일에 소문을 내고 다니니 사람의 마음이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런 일로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는 것도 모양이 별로 좋지 않아 참고 지내면 언젠가는

오해가 풀릴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지내기로 했다.

 

 

군정 하에서 여러 혼란한 일이 생겨났다.

잠을 자고 나면 각종 단체나 기구(機構)가 무수히 생겨났다.

그 중에 소위 "반민특위"라고 하는 기구가 생겼는데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떤 경로를 통해 만들어 졌는지 확실히 알 길이 없다.

다만 군정의 힘만으로는 일본이 36년간이나 학정(虐政)한 내용들을

찾아내기가 힘들다고 생각이 되어, 민간에서 유지라는 사람들을 골라

일본사람에게 아부해서 동포를 괴롭게 한 사람들과 또 일본을 위해

부역한 사람들을 붙들어다가 처벌한다는 목적으로 만든 기구이다.

이 반민특위의 활동으로 사회분위기가 점점 살벌해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다가 우리교회사역자 이여식 선생이 반민특위에

붙잡혀가서 고생한다는 말을 들었다. 반민특위의 기세가

얼마나 등등한지 누구도 반민특위가 하는 일에 나서서

이의를 제기하거나, 누구를 보살펴 준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가 없는 험한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이여식 목사가

그렇게 잡혀갔다고 하는데 나로서는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일본의 압정으로 옥살이까지 했으니 떳떳하다.”라고

생각이 되어 조반도 못 먹고 수소문하여 남대문통 가까이에 있다는

그 반민특위라는 곳을 찾아갔다.

 

 

반민특위라는 그 기구의 사무실을 찾아가서 보니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의 위풍이 대단했다. 그 사람들 가운데 우리교회의 사역을 하던

최OO 씨도 있었고, 황해도 장연에서 우리교회 일을 하던 김OO 선생의

아들 김OO라는 청년도 앉아 있었다. 그래서 최OO씨와 김OO군에게

“할 말이 있으니 시간을 좀 내서 말할 수 없겠는가?”하고 물으니

최OO 씨는 바쁘다고 하며 김OO 군에게 나가서 정 목사님과

얘기하라고 해서 함께 그 근방 다방으로 갔다.

당시에는 젊은 사람이 손윗사람에게 차를 대접하는 것이 관례이지만

얼마나 기세가 등등한지 내가 차를 대접하며 내가 간 목적을 얘기하였다.

“지금 우리교회의 이여식 선생이 이 반민특위에 붙들려 와서 취조를

받는다는데 무엇이 잘못 된 것 같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그랬더니 젊은 사람이 되어 그런지, 김 군이 하는 말이

“반민특위에서 취급할 만한 인물이기 때문에 붙들려 왔을 것이니

목사님은 상관 마십시오.”

“이보게, 김 군! 지금 오랜만에 해방이 되어 경사스러운 일이

있어야 할 터인데 우리교회에서 열심히 일하던 이여식 씨가

붙들려 와서 고생을 하고 있어서야 되겠소? 잘 생각해 보시오.

이여식 씨 같은 이가 무슨 이유로 일본사람에게 아부해서

누구를 괴롭게 했겠소? 당신 같은 사람이 잘 생각해서

이런 죄 없는 분을 억울하게 잡아 두지 말고 속히 잘 가려내어

내 보내는 것이 도리가 아니오?”

“아닙니다, 목사님, 이여식이 뿐만 아니라 교회본부가 있는

회기동 안식일교회와 관련된 사람들 중에서

붙들어 올 사람이 아직도 많습니다.”

“이여식 씨”를 “이여식 이”라 부르며 완전히

죄인 취급을 하고 있었다. 완전히 “혹을 떼러 갔다가

혹 붙이는 셈이 된 기분”이었다.

더 이야기 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좌우간 이여식 선생이 지금 어디에 있소?”

“벌써 경찰국으로 넘어 갔을 것입니다.”

“아, 잘 알겠소, 고맙소.”하고는 헤어져 나왔다.

 

 

내가 경찰국에도 찾아가려는 눈치를 보이자 김 군은 다시 한번

“불원간 안식일교회에서 잡아들일 사람이 많으니

그리 아십시오.”라고 기세가 등등하게 이야기를 했다.

김 군의 말을 들으며 과거 형무소에서 힘들었던 생각과

불안한 마음이 선뜻 지나갔다. 그러면서 “나야 1942년에

이미 일본의 미움을 사서 내 호적에 붉은 줄을 쳤으니

무슨 걱정이랴? 속담에 매도 먼저 맞는 것이 좋다더니!”하는

생각에 쓴 웃음을 지었다. 김 군의 위협적인 말을 들으니

“이왕 온 김에 오늘 경찰국으로 찾아 가는 것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일정시대에 남대문 통에 있던 정자옥(丁字屋)이라고 하는

데파토(백화점)에 경찰국 간판을 붙이고 일을 본다 하기에 찾아갔다.

조병옥 박사가 경찰국장으로 있던 때였다. 경찰국 앞에 정복을 한

경찰은 안보이고 사복한 사람들만 몇 명 보였다.

해방이 좋기는 좋았다. 일제하에서는 공포심으로 경찰국 옆에도

가기가 싫었는데 해방이 되고나니 이렇게 마음에 아무 부담이 없이

이런 일을 따져보겠다고 용기를 내어 경찰국을 내발로

찾아 올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아직은 불안한 마음으로 경찰국 정문에 가니 놀랍게도

내가 말도 시작하기 전에 사복경관이 나를 아는체하며 다가와서

“아, 목사님!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습니까?”하며 인사를 하는데

도무지 누군지 알 수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생각을 해보니 한 두 명의 낯이 조금 익었다. 이 사람들은

일제시대에 형사대에 속해 있던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지금

경찰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정말 반민특위에 체포되어야 할

사람들이 떳떳하게, 그것도 경찰국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정시대에 기독교의 목사나 전도사에 대한 감시는 상상을 넘는 일이었다.

특히 우리 재림교회의 사역자들은 출장을 많이 했는데 언제나

형사들이 사역자의 뒤를 따르다가 목적지에 도착을 하면

그곳 형사에게 인계하곤 했다. 그러니 웬만한 형사들은

목사들의 안면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일본을 위해서 일하던 그 형사들이 지금 어느새 얼굴을 바꾸어

한국경찰이 되어 일하고 있으면서 자기들이 감시하던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한 것이다.

“목사님, 무슨 일로 경찰국에 왔는가요?”하고 의아해 하며 물었다.

“나는 이여식 선생의 문제로 여기에 왔습니다.

내가 지금 반민특위를 다녀오는데 그곳에서 대강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여식 목사가 일본사람에게 아부 했다던가

또는 조선을 위해 좋지 못한 일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틀림없이 무슨 오해를 받아서 반민특위에 붙들려 와서

경찰국에 넘긴 모양인데, 내가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경찰국장을 만나 이여식 선생에 대해서 좀 얘기하려 왔습니다.”

“이여식 씨가 혐의가 없으면 곧 풀려나게 되겠지요.”

나는 그대로 물러갈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나는 경찰국장을 좀 만나야 하겠으니 주선을 좀 해 주시오!”

“지금은 도저히 만나볼 수가 없고 틀림없이 정 목사께서

오셨다는 말씀을 경찰국장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여식 씨도 곧 나갈 것 같으니 목사님은 돌아가십시오!”

할 수 없이 돌아왔다. 드디어 해방이 되어 이제부터

교회사업이 속히 이루어져야 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이여식 씨 같은 분이 붙들려 있으면 교회가 또 다시 뒤숭숭하게

될 터인데 하루라도 속히 풀려 나와 교회가 안정이 되기를 기도드렸다.

과연 그 형사 들이 말한 대로 한 이틀 후인가 이여식 선생이 풀려 나왔다.

경찰서까지 찾아 간 것이 도움이 된 것인지는 모르나 참 다행이라

생각이 되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누가 언제

어떻게 될는지 모르는 불안한 세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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