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가에서 만난 여인
요한 4:5-19
곽건용 목사
특별한 사람들이 나눈 특별한 대화
예수님의 일생을 갖고 만들어진 영화, 연극, 뮤지컬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제가 아는 작품도 적지 않은데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 얘기에 관한 허구적 얘기를 집어넣은 작품들이 꽤 됩니다. 뮤지컬의 고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도 그 중 하나이고 거기 나오는 ‘I don't know how to love him’은 막달라 마리아가 부른 유명한 노래지요. 물론 그것들은 복음서에 나와 있는 얘기만 갖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상상력을 보태졌습니다. 이번에 설교 준비를 하느라 본문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예수님 일생을 갖고 영화나 연극, 뮤지컬을 만든 사람들이 우물가 사마리아 여인 얘기는 다루지 않았을까요? 이것도 상상력만 약간 발휘하면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될 거 같은데......’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만난 에피소드에는 두 가지 얘기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사마리아 여인 개인에 관한 얘기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두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소재로 해서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두고 예수님과 여인이 나눈 대화입니다. 두 얘기의 성격이 서로 다르지만 모두 중요하므로 저는 이 본문을 두 주일로 나눠서 설교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마을에 이르렀을 때 피곤해서 어떤 우물가에 앉아 쉬고 계셨답니다. 때는 태양이 작열하는 정오쯤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한낮에는 너무 더워 물을 길으러 우물에 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물을 길으려면 선선한 아침이나 저녁에 오는 게 보통이었지요. 그런데 이 여인은 대낮에 물을 길으러 나왔다는 겁니다. 여기엔 그 어떤 사정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그녀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셨습니다. 마침 그때 제자들은 먹을 걸 사러 동네에 들어가고 거기 없었답니다. 여인은 예수께 “선생님은 유대 남자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는데 이게 웬일이냐는 거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한국의 지역차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지역차별이 존재했는데 거기엔 역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주전 8세기 말에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는 그들의 저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민정책을 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키고 그 땅에 다른 민족을 이주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민족과 피가 섞일 수밖에 없었지요. 하나님의 선민임을 자부했던 이들의 자존감은 이로 인해 매우 훼손됐고 유다 사람들은 이를 핑계로 북쪽 이스라엘인들을 비난했습니다. 한편 남쪽 유다는 그로부터 150년 쯤 후에 바빌론에 의해 멸망당했는데 바빌론은 이민정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유다 사람들은 외형적으론 혈통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시대에 유대인에 의한 사마리아인 멸시는 여기서 비롯됐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께 선생님은 유대 남자인데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라고 물었던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엉뚱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은사를 알고 또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며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목말라 물 한 대접 달라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사는 무엇이고, 자기가 누구인 게 무슨 상관이며 생수는 또 뭐란 말입니까. 느닷없는 이 말에 여인은 당황했을 겁니다. “선생님, 선생님에게는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떻게 나에게 생수를 구해 주시겠습니까? 선생님이 우리 조상 야곱보다 더 위대한 분이라는 말입니까? 그는 우리에게 이 우물을 주었고 그와 그 자녀들과 그 가축까지 다 이 우물의 물을 마셨습니다.”
네 남편을 데려 오라
여인은 두 가지를 물었습니다. 하나는, 두레박도 안 갖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물을 길을 수 있겠냐는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당신은 누군가, 당신은 야곱보다 위대한가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께서 주시겠다는 ‘생수’가 뭔지도 몰랐고 그분이 누군지도 몰랐으니 그녀가 이렇게 묻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
서서히 예수님은 당신 정체를 드러내십니다. 당신이 주실 생수가 어떤 것인지도 천천히 밝히십니다. 야곱이 물려준 우물의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당신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란 말씀은 그 물이 보통 물이 아님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그 물은 마시는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꼼꼼히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생수’라 했고 그걸 마시게 되면 그 물은 마신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거라 했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생수를 마신 사람은 그 사람 ‘속에서’ 뭔가를 일으킨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야 생수가 영생에 이르는 샘물이 된다는 말입니다. 곧 생수가 영생을 주는 샘물이 되려면 그걸 마신 사람 속에서 뭔가가 일어나야 한다, 곧 그가 뭔가를 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 사람 ‘속에서’라는 말에는 이런 뜻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곧 생수를 주시는 예수님과 그 물을 마시는 나 사이에 모종의 협력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이 여인은 예수께 바짝 다가가 청했습니다. 귀가 솔깃해졌던 것입니다. “선생님,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내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도 않게 해주십시오.”
물을 긷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수도꼭지만 돌리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지만 옛날에는 마당에 있는 펌프에서 물을 길렀고 더 오래 전에는 우물에 가서 물을 길러야 했습니다. 그 옛날엔 물 긷는 일이 여인네들 가사노동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물이 보통 무거운 물건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 여인에게 있어서 우물가에 나와 물 긷는 일이 주는 부담은 그것이 힘든 가사노동이라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나중에 나오지만 거기에는 그녀만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물 길으러 나오지 않는 대낮에 그녀 홀로 물 길으러 나온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 떳떳이 나설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여인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너라.”라고 말씀했습니다. 뜬금없이 왜 남편을 불러 오라셨을까요? 그때까지 예수님과 여인이 나눈 대화에서 남편의 존재는 아무 상관도 없었습니다. “어이, 시원한 물 한 잔 갖다 줘.” “길어다 놓은 물 없어요. 이따가 해 지고 선선해지면 길어다 줄게요.” “아니, 당장 목말라 죽겠는데 해질 때까지 어떻게 기다려. 당장 가져와! 당장 가져오지 않으면 혼날 줄 알아!” 그녀와 남편 간에 이런 대화가 있었기에 그녀가 뜨거운 대낮에 물을 길으러 나왔다고 예수께서 짐작하셨을까요? 그렇진 않아 보입니다. 그녀가 대낮에 물을 길으러 나온 것이 남편 때문이긴 했지만 그건 다른 의미에서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좀 더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은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장 물 떠와!”라며 군림하는 가부장적 남편 때문은 아니랍니다. 그녀에겐 남편이 없답니다. 예수께서는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맞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하! 정말 남편이 없어서 없다는 게 아니라 너무 많아서 없다는 거였습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음탕하다고 해서, 행실이 문란하다고 해서 동네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남들이 물 길으러 나오는 시간에는 우물가에 나오지 못하고 남들이 안 나오는 대낮에 물을 길으러 나왔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남자가 여자와 공개된 장소에서 얘기를 나누는 일은 금기였습니다. 유대인 남자와 사마리아 여자가 말을 섞는 일을 더욱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이 여인이 성적으로 문란한 사마리아 여인이었다니 더 할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수가라는 마을의 우물가에선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겁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다양하고 그들이 그렇게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각자가 타고난 성격과 품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65억이나 되는 모든 사람의 운명을 미리 정해놓지 않으셨습니다. 기차가 정해진 철로를 따라 가듯이 65억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미리 정해져 있는 운명을 따라 살게 되어 있지는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실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예수님은 점쟁이의 능력을 갖고 계셨을까요? 그녀에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도 어떤 남자와 살고 있지만 정작 그 사람도 그녀의 남편이 아님을 예수님은 어떻게 아셨을까요? 예수님은 초능력자였습니까? 그렇게 믿고 싶은 분은 그렇게 믿으십시오. 하지만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저는 예수님이 그녀의 실상을 알아보신 것은 초능력 때문이 아니라 연민이 담겨 있는 따뜻한 시선 덕분이었으리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아마 우물가로 다가오는 그녀를 유심히 보고 계셨을 겁니다. 태양이 작열하는 대낮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샌들을 질질 끌고 걸어오는 그녀, 빈 물동이조차 무거운 듯 질질 끌며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녀의 모습에서 그녀가 살아온 쓰라린 인생을 보셨을 거라고 말입니다.
제가 아는 한 여 목사님이 20년 전에 한국 의정부에 있는 한 상담소에서 일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에게서 들었던 놀라운 얘기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때 제가 그런 얘기를 듣기 전까지는 한국에 성폭력을 당하는 여자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습니다. 대개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잘 아는 사람에게 성폭력을 당한다는 말에 저는 더욱 놀랐습니다. 그때 들은 얘기들 중에 제가 잊지 못하는 얘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한 여자가 결혼 날짜를 잡아놓고 밤중에 길을 가다가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할까 고민했지만 그대로 결혼했습니다. 가족과 남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 후 이십 년 넘게 남편과 같이 살고 있지만 그녀는 결혼 후로 한 번도 남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를 거의 삼십 년이 지난 후 용기를 내서 상담소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녀의 고통을 목사님이 치유해줬습니다. 어떻게 치유했는지 아십니까? 물론 한 번은 아니고 여러 번에 걸친 상담에서 목사님이 한 말의 요지는 이것이었습니다. “미친개에게 물렸다고 생각하세요. 그거, 자매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일 아닙니다. 그냥 흘려보내세요. 잊어버리세요.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그 사실을 고백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미친개에게 물린 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요.”
세상에는 성질이 못되게 타고난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타고난 것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한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온 환경입니다. 똑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환경에서 살았는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건 그 사람 잘못이 아닙니다. 세상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으니 그건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또한 그런 사람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는 것 역시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영화 <굿 윌 헌팅>의 주인공 맷 데이먼은 머리는 비상하게 좋은데 어렸을 때 양부모에게 당한 학대 때문에 깊은 상처를 갖고 사는 청년입니다. 그의 비상한 머리를 아까워한 MIT 수학교수가 그를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심리학을 가리키는 자기 친구 로빈 윌리엄에게 데려갑니다. 영화는 이 두 사람이 만나서 그의 상처가 어떻게 치유되는가를 보여줍니다. 제게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로빈 윌리엄스가 맷 데이먼을 부둥켜안고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It's not your fault. It's not your fault.”라는 단순한 대사를 토해내는 장면이었습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너라! 예수님은 여인을 꾸중하거나 비난하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게 아닙니다. 이 말씀은 그녀를 치유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니까 그렇게 아파할 것 없어! 이런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다고 저는 읽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세 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난처했겠습니까. 다른 사람은 다 예수님을 버려도 자기만은 끝까지 예수님을 지키겠다고 장담했던 그가 아닙니까. 하지만 그 역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이런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신 예수님의 행동은 얼핏 보면 그를 책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 물음으로써 그의 아픈 상처를 치유하셨던 것입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 이제 잊어버리렴. 나도 잊었으니까.”
도종환 시인의 시처럼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지 않았습니까.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우지 않았습니까. 또한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는가 말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습니다.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우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있다면 그건 사람의 삶이 아닐 겁니다.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해봤습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처럼 못할까? 왜 우리는 예수님이 보셨던 걸 보지 못할까? 이 차이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과거를 보는 데 사로잡혀 있지만 예수님은 과거 아닌 미래를 보셨다는 차이 말입니다. 교회를 포함해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선 남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개는 어떻고 또 아무개는 어떻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걸 ‘뒷담화’라고 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는 남에 대한 얘기는 대부분 그의 과거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 사람은 옛날엔 어땠다더라, 옛날에는 엉망이었다더라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자, 이제부터는 남의 과거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맙시다. 대신 그 사람의 미래에 대한 얘기를 합시다. 그가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든 모른 채하고 상관하지 맙시다. 그가 미래에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해 얘기하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 대해 갖고 계신 계획과 품고 계신 희망에 대해 얘기합시다. 그가 예수님 믿으며 어떤 삶을 살아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이웃에 모범이 될지만 생각합시다. 그렇게 한다면 흔들리며 살았던 과거 그의 삶에, 비바람에 젖으며 살았던 지나간 그의 인생에 한 줄기 환한 빛이 될 것이며 여러분에게도 따뜻한 햇살이 될 것입니다.
사족으로 한 마디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뒷담화가 ‘풍성해서’ 이 얘기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4장을 본문으로 삼은 까닭은 오늘 찬양팀에서 헌금송으로 택한 노래가 ‘우물가의 여인처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설교는 다음 주일로 이어집니다. ♣
아멘!
어려서 들은 우리교회 장로님의 설교는
"열녀 불경이부라 했는데 이 여자는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치웠으니 얼마나 죄인이냐?" 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여자게에 그런 파워라도 있었다고 생각하셨는지^^
상담소가 아닌 그냥 메디칼 클리닉에서도
수가의 여인 같은 사람들이 매우 많음을,
그렇게 되는 것이 매우 특별한 죄나 운명 때문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교회에서 듣기 힘든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