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3월 16일 / 사순절 둘째 주일
사순절에 기억해야 할 사람들 1
마태 14:34-36
곽건용 목사
남미에서 성장하는 개신교회
남미는 콜럼버스 이래 대대로 가톨릭이 강세인 지역입니다. 남미 인구의 90% 정도가 가톨릭 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남미에 개신교인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남미에서 가장 큰 두 나라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서 거의 90%대에 육박했던 가톨릭 교인이 60~70%로 줄고 대신 개신교인이 10~20%대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개신교의 성장이 안타깝게도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번영신학, 성공신학 또는 축복신학을 앞세운 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이 이끌고 있다고 합니다. 하긴 이곳 LA에서도 히스패닉 개신교회들 가운데 큰 교회들은 대부분 오순절 계통의 은사주의 교회이긴 합니다.
사태가 왜 이렇게 됐는지를 전문가들은 이렇게 분석합니다. 수십 년에 걸친 군부독재와 부패, 극심한 빈부격차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었는데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신앙의 힘을 빌려야 하는데 가톨릭교회는 즉각적으로 이들을 가난에서 해방시켜주는 길을 열어주지 못했다는 겁니다. 하긴 그런 길을 열어줄 수 있는 개인이나 집단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틈을 오순절 계통의 개신교가 파고들어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전통과 예전에 치중하는 가톨릭교가 주지 못하는 것을 오순절 계통의 개신교회가 준다고 사람들이 믿는다는 겁니다.
이 와중에 오순절 계통이 아니라 해방신학적인 목회로 ‘가치와 성장’을 함께 성공적으로 이룬 교회가 있는데 브라질의 이바브 침례교회가 바로 그 교회입니다. 이 교회 담임목사는 에드 르네 키비츠 목사인데 그는 침례교 목사지만 해방신학 2세대 선두주자인 한국 교포 성정모 교수에게 해방신학을 배워서 신앙과 삶의 현장을 연결하는 독특한 목회를 하는 목사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서도 두 번 설교해준 홍인식 목사님에게 이 소식을 들었는데 얼마 전에 한국의 한 신문이 홍 목사님 소식을 전하게 되어 더 상세히 알게 됐습니다. 이 교회에는 주일이면 무려 3천 명이 예배하러 모여들고 키비츠 목사는 페이스북 친구가 12만 명이나 되며 교회 페이스북 친구는 5만 6천명에 이른답니다. 더욱이 그의 설교동영상은 매주 230만 명이 접속해서 듣는다고 합니다. 굉장하지요? 그를 두고 공산주의자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매주 수백 킬로미터를 운전해서 오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교인들 중에 25∼39세의 청년층이 70% 정도라는 사실도 놀랍습니다.
북미와 유럽에서는 생각 있는 사람들과 청년들이 갈 교회가 없다고 하소연한 지 오래됐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지금 한인교회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주변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사정이 이런데 브라질에 이런 교회가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관심 있게 읽은 대목은 키비츠 목사가 성경의 십계명과 비슷하게 자기 목회에는 다음과 같은 십계명이 있다고 하는 대목입니다. 저는 거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키비츠 목사의 십계명
첫째 계명은 “정의는 사랑으로 이루어진다.”입니다. 정의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과 연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둘째 계명은 “복음을 반쪽으로 만들지 말고 전체적으로 살려내라.”입니다. 복음은 영혼의 문제나 죽음 이후만 다루는 게 아니고 이 땅 위에서 하나님나라를 어떻게 이룰 것인가에 집중하는 것이란 얘기입니다. 셋째 계명은 “현장에 길이 있다.”입니다. 신앙은 삶과 별개가 아니라 삶과 직결된 것이므로 추상적인 얘기에 머물지 말고 현실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관점에서 분명한 입장을 표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넷째 계명은 “약자를 죽음으로 내몰지 않는 하나님나라를 세워라.”입니다. 극소수만 복을 누리고 다수는 희생되는 체제가 아니라 형제, 자매애를 바탕으로 한 사회, 약자와 능력 없는 자를 희생시키지 않는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나라라는 겁니다.
다섯째 계명은 “하나님은 교회 건물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곳에 계신다.”입니다. 이 교회는 25년간 천막에서 예배를 드려왔고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되어서야 교회당을 건축했답니다. 헌금의 대부분을 형제, 자매들을 위해 써야한다는 게 이 교회가 추구하는 바입니다. 여섯째 계명은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교회를 세우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교회에 나오라고 하시지 않았다면서 교회에서 사는 것이 신앙인의 바른 자세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교회에는 일주일에 한번만 오라는 겁니다. 일곱째 계명은 “교회 안에 머물지 말고 사람들 안에 머물라.”입니다. 가정과 직장, 마을 일에 충실하며 거기서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게 기독교인이라는 겁니다. 진정한 복음은 교회가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덟째 계명은 “대중성이 아니라 저항력을 길러라.”입니다. 교회는 애초부터 대중의 종교가 아니라 강력한 소수의 믿음으로 시작된 종교였습니다. 기독교인은 겨자씨처럼 작은 존재이고 누룩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이므로 교회를 어떻게 성장시킬까를 궁리하지 말고 불의한 세속적 욕망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저항하는 힘으로 존재할 것인가에 교회는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겁니다. 현대교회의 문제는 성장하지 않는 데 있지 않고 저항하는 힘을 잃어버린 데 있다고 했습니다. 아홉째 계명은 “다른 교회를 모방하지 말라.”입니다. 각 교회는 자기만의 소명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이 되는 게 중요합니다. 열째 계명은 “영성이 깨어나도록 침묵하는 시간을 가져라.”입니다. 키비츠 목사는 일주일에 다섯 번, 한 번에 한 시간씩 아무 것도 지니지 않고 홀로 온전한 침묵 속에서 달린다고 합니다. 사람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들음으로써 성장하고 읽는 것보다 침묵하는 데서 영성이 자란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번 사순절 설교 주제를 ‘사순절에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라고 정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고 기리는 절기인데 사순절을 지내면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특별히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누군지, 그래서 만일 예수님이 오늘 우리사회에 오시면 가장 먼저 어떤 사람들을 친구 삼으실까 하는 점을 생각해보려는 겁니다. 2천 년 전에 예수님과 맞섰고 대적했던 바리새인, 사두개인, 제사장과 율법학자들 등을 비난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과거의 인물들이고 우리와는 무관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누군지, 오늘의 제사장과 율법학자는 누구인지를 생각하고 따져 물으면 과거의 인물들을 비판하는 게 그리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과거의 인물을 비판하는 게 아니라 오늘의 인물을 비판하는 것이겠지요.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당시 따돌림 당했던 죄인과 세리들과 창녀들의 친구가 되셨다고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2천 년 전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이 우리 곁에 오신다면 성노동자들이나 게이나, 성전환자들의 친구가 되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렇게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에 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건 좀 다른 얘기지만 우리는 일본을 대해서 과거에 한 짓에 대해 진정으로 사죄하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저는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적지 않게 불편한데 그 까닭은 우리가 그들에게 당당히 사죄를 요구하려면 먼저 우리가 베트남에 대해서 한 짓을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베트남에 가서 못할 짓 많이 했으면서 일본에 대해서만 사죄를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입니까?
만일 예수님이 2014년 미국 땅에 오셨다면 가장 먼저 누굴 친구로 삼으셨을까요? 그들이 어떤 사람일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다음 주일부터 하나하나 풀어보겠는데 그 전에 오늘은 누가 예수님의 친구인가를 따져보는 데 밑바탕이 되는 비유를 읽고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비유는 왜 예수님은 죄인들과 세리들과 창녀들을 친구로 삼으셨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얘기 말입니다. 비록 직접적으로 그들은 언급하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잘 보여주는 비유가 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친구는 누구?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와서 그를 시험해보려고 물었습니다. 묻는 자의 의도가 순수하진 않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해보려고 했다니 말입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비단 유대인뿐 아니라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장 중요한 질문이겠지요. 예수님은 대답하시지 않고 되물으셨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 예수님의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율법에 뭐라고 적혀 있는가?’가 하나이고 ‘그걸 너를 어떻게 읽느냐?’가 다른 하나입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훌륭한 대답입니다. 점수를 따지면 백점짜리 대답입니다. 중고등학생 때 생각나십니까? 문제집을 푸는데 문제집 맨 뒤에는 모범답안이 있습니다. 문제를 풀다가 안 풀리면 고민하다가 맨 뒤에 있는 답안을 살짝 봅니다. 답안을 보면 세상에 그보다 쉬운 문제가 없습니다. 저는 답안을 보고 답을 알았으면서도 마치 내 실력으로 푼 것 같은 착각을 하며 실력이 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범답안을 내놓은 율법학자도 이와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여기서 ‘그대로 행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가 율법을 ‘어떻게’ 읽는지를 드러내려는 말씀입니다. 그는 율법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율법학자 아닙니까! 문제는 그 율법을 그가 어떻게 읽느냐 하는 점입니다. 그는 ‘자기를 옳게 보이고 싶어서’ 예수께 물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시험하려던 대목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내가 몸 바쳐 사랑해야 할 내 이웃이 누구냐는 겁니다. 이웃의 정체를 밝혀 달라! 그러면 내가 몸 바쳐 사랑하겠다! 율법학자 얘기는 바로 이겁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그저 ‘어떤 사람’(a man)입니다. 그가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는 비유를 듣던 사람도 모르고 우리도 모릅니다. 율법학자가 이웃의 정체를 물었습니다. 이웃이 누구냐는 겁니다. 그런데 비유에서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사람은 오로지 이 사람, 강도당한 사람뿐입니다. 그는 비유가 끝났을 때까지 ‘어떤 사람’입니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된 채로 내버려두고 갔다고 했습니다. 왜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겼을까요? 옷도 가져가려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당시에는 입고 있는 옷을 보고 그가 누군지, 그가 유대인인지 사마리아인인지 이방인인지를 구분할 수 있었는데 옷을 빼앗기고 벌거벗고 있으니 정체를 알 수 없게 됐던 겁니다. 또한 거의 죽게 된 채 버려뒀다고 했는데 이 점도 중요합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레위 사람이 지나갔는데 그도 제사장처럼 그를 보고 피해갔습니다. 왜 이들은 피해갔을까요?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어떻게 사람이 벌거벗긴 채 죽은 것처럼 쓰러져 있는데 그냥 갈 수 있는가 말입니다. 그냥 간 정도가 아니라 ‘피해갔다’고 하는데 대체 이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그런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책임지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시체를 만질 경우에는 제사를 집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피해갔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이른바 ‘하나님을 위해서’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초죽음이 되어 있는 사람을 피해 갔던 거지요.
세 번째로 지나간 사람은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청중들은 세 번째로 등장할 사람은 유대인 평민 남자라고 추측했을 겁니다. 처음엔 제사장, 둘째는 레위 사람이었으니 세 번째는 유대인 남자 평인 차례였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게 사마리아인이었으니 넋 놓고 듣고 있던 청중들은 화들짝 놀랐을 겁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그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했던 것과는 상반되는 행동을 한 겁니다. 그리고는 그의 상처에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들은 여관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냈습니다. 다음 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떠났습니다.
‘셋 중에 누가 착한 사람인가?’라는 질문은 묻나 마나한 질문이지요. 그런데 율법학자의 물음은 ‘누가 착한 사람인가?’가 아니라 ‘누가 내 이웃입니까?’였습니다. 그는 ‘내가 몸 바쳐 사랑해야 할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물었던 율법학자에게 예수님은 비유를 마친 후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는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착한 사람이 누군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하는 건 너무도 쉽습니다. 그런 물음은 문제집 뒤의 모범답안을 들춰보지 않아도 누구나 답할 수 있습니다. 이는 율법학자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지요. 그는 맞는 대답을 했습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정답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대답은 ‘누가 착한 사람인가?’에 대한 대답이었을 뿐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질문을 ‘이 셋 중에 누가 착한 사람입니까?’로 알아듣고 대답했던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질문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였습니다.
나는 그의 이웃인가?
이웃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가까이 사는 사람, 물리적인 거리나 마음의 거리나 가까운 사람이 이웃입니다. 좀 떨어져 살아도 마음이 맞고 생각이 비슷하면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웃은 만나서 밥도 같이 먹고 싶고 차도 같이 마시고 싶고 술도 한 잔 같이 마시고 싶은 사람입니다. 이런 이웃은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 멀리 4-50마일 떨어진 얼바인이나 랜초 쿠카몽가에서 한 시간씩 자동차를 몰고 우리 교회에 오는 것은 여기에 오면 이웃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보고 싶은 사람이 있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이 있고 같이 앉아 얘기하고 밥 먹고 차 마시고 싶은 사람이 여기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이웃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나와 맘이 맞고 뜻이 같고 착하고 의로워서 같이 지내고 싶은 사람이 예수님이 말하는 이웃이 아닙니다. 그것은 누가 내 이웃이 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내가 누군가의 이웃이 된다는 것은 곤경에 빠진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는 일입니다. 비유에서 예수님이 묻는 이웃은 강도를 만나 옷도 다 벗긴 채 거의 죽어가는 극한 곤경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 줄 수 있는가 입니다. 물리적인 거리나 마음의 거리, 마음이 맞는 사람이라든지 취미가 맞는 사람, 심지어 추구하는 종교나 지향하는 삶의 방향이 맞는지 여부는 여기서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냥 곤경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내가 누군가 하는 점만이 문제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웃은 ‘익명’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익명’입니다. 정체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누구도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웃은 내가 이름을 아는 사람인 경우보다는 모르는 사람인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는 늘 ‘어떤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 ‘어떤 사람’에 대해서 사마리아 사람이 했던 것처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이 누굽니까? 기독교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기독교인은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웃의 정체를 밝혀내서 그게 분명해지면 내 몸처럼 사랑해주겠다는 사람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은 “지렛대를 다오, 내가 지구를 들겠노라!”고 말했다는데 기독교인은 “이웃이 누군지 알려다오, 내가 몸 바쳐 사랑하겠노라!”고 외치는 자가 아닙니다. 기독교인은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될까?’를 묻는 사람입니다. 나아가서 ‘누가 나를 이웃으로 여길까?’를 묻는 사람들입니다.
사족처럼 한 마디만 더 하겠습니다. 비유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초죽음이 된 사람에게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부어주었다고 했습니다. 왜 하필 올리브기름과 포도주였을까요? 물론 그가 갖고 있던 게 그것뿐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물건이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던 것들임을 감안한다면 여기서 예수님은 정말로 충격적인 메시지를 담으셨던 게 아닌가 하는 상상을 하게 됩니다. 혹시 시체를 만질까 두려워 멀리 피해 갔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과는 달리 유대인이 그토록 경멸하던 사마리아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을 하나님께 바칠 제물로 치료해주면서 예배를 드렸던 게 아닌가 하는 상상 말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겁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을 부어주면서 그는 하나님을 경배했던 겁니다.
만일 예수님이 오늘 여기 오신다면 누굴 가장 먼저 친구 삼으실까요? 저는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듣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만일 예수님이 오늘 여기 오신다면 누굴 가장 먼저 친구 삼으실지 생각해보시고 제게 연락해주십시오. 이메일도 좋고 문자나 카톡도 좋습니다. 여러분의 연락을 기다리겠습니다. ♣
노란 색상은 퍼온이의 것.
제목을 바꿔 주시기를 바랍니다.
"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심판자 이십니다. 마땅히 그분의 이름을 경외하고 두려워할 분으로 모셔야 합니다.
온 우주가 예수님의 품속에 있습니다. 풍자적으로든지, 은유적으로든지 이런 표현을 예수님께 붙이는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