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 집사가 보여주어 알게된 내용입니다.
토론 상대방인 개신교측 목사님은 교단과 김대성목사님에 답변이 없다고 강한 불만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당시 교단이나 김대성목사님이 개신교 측에 공개적 반론을 하셨을텐데요.반론문이 게재된 매체를 알고 계신분은 좀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안식교는 정통교회가 될 수 없다 (1)
1997년 05월 02일 (금) 00:00:00 교회와신앙
개신교측: 최삼경·진용식 목사
본호로 10회의 논쟁을 마치게 된다. 우선 형식적인 면 내지는 구조적인 문제에 대하여 변증하고, 다음으로 지난호에 대하여 변증하고, 그리고 전반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주제별로 총정리하겠다.
형식적인 면 또는 구조적인 면에서
먼저 감사한 마음으로
무려 10회에 걸쳐 진행된 논쟁을 마치려 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지만 먼저 감사하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한국교회 역사이래 없었던 논쟁을 할 수 있었고, 그리하여 한국교회 앞에 진리를 밝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논쟁이란 그것 자체가 어려워 잘못하면 계획과는 달리 감정 싸움으로 마치는 경우가 많은데 별다른 사고 없이 본 논쟁이 진행되었음도 감사한다. 먼저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리고 끝까지 논쟁에 응해 준 안식교측 김대성 목사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하는 바이다. 바라기는 본 논쟁이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진리에 이르는 초석이 되기를 원하며, 혹 이번 논쟁으로 부족했던 점들은 후에 다른 방법으로 보완되기를 바란다.
안식교측에서 본래 약속을 어긴 점에 대하여
안식교측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이 있는 반면 유감스런 점도 있다. 우선 안식교측에서 본 논쟁을 진행하기 전에 했던 중요한 약속을 어겼기 때문이다. 즉 본 논쟁을 시작한 이유 중에 하나는 기성교회 교인은 물론 안식교 교인까지도 함께 본 논쟁을 지켜봄으로 어떤 것이 진리인지 알게 하자는 것이었다. 먼저 쌍방간에 한 약속에 의하면 본지는 물론 안식교의 월간지 <교회지남>에도 같은 내용을 동시에 게재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혹 그렇지 못하면 매번 <교회지남>에 본 지상논쟁에 대한 광고를 게재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안식교측에서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본 논쟁을 <교회지남>에 게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광고 또한 아주 작게 단 두 번밖에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국 본 논쟁은 기성교회 교인들만 지켜본 셈이 됐다. 기성교인들만 지켜보아서 억울하다거나 분하다는 것은 아니다. 안식교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숨은 이유가 무엇인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이제 본 논쟁을 마치면서 다시 요구하는 바이다. 가능하면 이제라도 <교회지남>에 본 논쟁을 하나씩 게재하기 바란다. 분명히 안식교측에서는 자신들이 본 논쟁에서 이겼다고 자평할 것이다. 그것이 안식교편의 주관적인 진실이라면 <교회지남>은 물론 안식교의 모든 언론을 다 동원해서 본 논쟁을 게재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교회와신앙>과 <교회지남>은 '언론의 평형이 맞지 않아서 함께 낼 수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독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없는 변명일 것이다. 본 논쟁을 <교회지남>에 게재하지 못할 이유가 있다면 속으로는 본 논쟁을 안식교인들이 알기를 원치 않는 것외에 없을 것이라고 본다.
안식교는 최근 들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안식교가 이단이 아님을 기성교인들에게 선전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식교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한 진리가 승리했다고 자평할 것은 당연한 일인데 자신들이 이긴 논쟁을 자기 교인들에게 숨길 이유가 없을 것이다. 더욱이 안식교인들은 진리 논쟁에는 물러서지 않는다고 알고 있고 또한 김대성 목사가 본 지상논쟁을 하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본다. 그런데 <교회지남>에 게재하지 못하는 것은 본 논쟁 속에는 안식교인들이 알아서는 안 될 내용이 있다는 것외에 다른 이유가 없을 것이다. 정 언론의 평형 때문이라면 <교회지남>에 맞는 기성교회 언론은 어떤 것인지 말해 주기 바란다. 그 언론과 협의하여 양 언론에 함께 게재하는 방법을 다시 연구할 수도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김대성 목사가 안식교측 언론에 본 논쟁을 게재하는 용기는 없다고 해도 적어도 <교회지남>에 남은 8회 광고만은 꼭 낼 수 있는 진실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2회 광고 이후부터 안식교인들이 알면 알수록 불리한 논쟁이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것이라고 본다. 성품 성화를 통해 구원을 이루고 그러기 위하여 육식까지 금하는 자들로서 약속 하나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다면 진리의 사람이기는커녕 인간적으로도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음을 명심하기 바란다.
안식교측에서는 이흥선 씨가 기성교회를 대표하는 인물이라도 되는 듯 그를 동원하여 안식교가 이단이 아니라고 내외에 선전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교단인 예장 합동측 노회에서 제명당한 목사로부터 이단이 아님을 증명받으려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객관적인 논쟁을 통하여 이단이 아님을 증명받는 편이 더 유익하지 않겠는가?
김목사는 약속대로 <교회지남>에 8회의 광고만은 계속해서 낼 것으로 믿는다. 단 이제 지나간 <교회와신앙>을 구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교회와신앙>측과 협의한 후 대신 본 논쟁을 단행본으로 담아서 나올 그 책을 8회 이상 광고해 주어야 할 것으로 본다. 필자는 그럴 수 있는지 없는지 신앙인의 양심으로 지켜 볼 것이다.
공개 토론회를 제안한다
이제 본 논쟁을 마치며 마지막으로 제의한다. 공개토론회로 마무리 하자는 것이다.
본 논쟁을 시작한 이유가 그것이었던 것으로 안다. 처음부터 공개토론회를 하면 객관적이고 효율적인 논쟁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지상논쟁을 먼저 하고 다음에 공개토론회를 하자고 했던 점을 김목사는 기억하리라고 본다.
공개토론회 장소는 두 곳에서 각각 두 번 하는 것이 좋겠다. 한 번은 삼육대학에서 하고, 한 번은 장로회 신학교나 총신 중에서 허락을 받는 대로 했으면 한다. 방법은, 먼저 일정 시간 동안 주제 강의를 하고, 그리고 미리 질문한 질의를 20개 내외로 정하여 서면으로 묻고 거기에 대하여 각각 지정된 시간만큼 대답을 하고, 그 다음에 합의된 사회자를 두고 일정 시간 동안 직접 묻고 대답하는 식으로 마무리를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쌍방 합의에 의하여 본 논쟁을 하고 난 후에 안식교측에서도 단권으로 책을 만들어 보급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리라고 본다(물론 그럴 용기가 있는지 지켜 보아야 하겠지만). 즉 같은 내용의 두 권의 책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편 공개토론회 장소에서 자기편에서 출판한 책을 보급하되 어느 한 편이 출판을 하지 못했을 때에는 상대측에서 출판한 책을 보급하기로 하면 좋겠다. 어디에서 먼저하고 누가 먼저 발표하면 좋을지는 각각 제비를 뽑아서 하되 두 번째는 첫 번째의 반대순으로 하는 것이 좋으리라고 본다. 기성교회편에는 필자가 둘이지만 할애된 시간은 같음으로 평형에 어긋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아니면 안식교편에서 김대성 목사와 함께 이흥선 씨가 나온다면 허락하겠다. 이흥선 씨가 못 나올 이유도, 이흥선 씨를 못 나오게 할 이유도 없다고 믿는다. 본 지상논쟁을 하게 된 동기도 이흥선 씨의 공개토론회에 의해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기타 부족한 점은 서로 만나 조절할 수 있으며, 바라기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공개토론회만은 피하지 않기를 거듭 바란다.
먼저 밝혀야 할 진실
문제의 발단은 진용식 목사가 안식교의 교리를 비판한 책을 출판한 데서 시작된다. 진목사는 1993년 3월에 <안식교의 5대 오류>(국종출판사. 1993, 서울)라는 책을 출판하여 안식교의 이단성을 지적함으로 기성교인이나 안식교인들에게나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결국 이에 대하여 안식교측에서는 홍명관 목사(전 안식교 한국연합회 선교부장 : 지금은 그의 후임으로 김대성 목사가 맡고 있다)를 대표자로 하여 처리하도록 한 것으로 안다. 어쨌든 어떤 절차와 이유에 의하여 진목사와 홍목사는 1993년 10월 4일자로 소정의 합의서를 쓰고 진목사는 남은 책값으로 1천만 원을 받고 책들을 안식교에 넘겨주었다. 이 약정을 할 때 그 자리에는 진용식 목사와 홍명관 목사는 물론 최삼경 목사와 김대성 목사도 같이 있었다.
"회수 및 파기에 관한 합의약정서"의 핵심적인 내용은 두 가지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비록 그 책을 파기하지만 그것이 진목사가 안식교 비판을 포기하거나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이요, 그리고 안식교측에서 남은 책을 인수하는 조건으로 진목사에게 1천만 원을 책값으로 주었는데 이것을 언론에 이용하지 않기를 약속하고 만일 안식교측에서 그 약속을 어겼을 시 법적으로 진목사의 명예를 훼손한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 안식교에서는 본래의 약속과 달리 위의 합의서를 유출하며 진용식 목사가 그 책에 대하여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를 했다느니 또는 책을 파기하는 조건으로 돈을 요구하여 1천만 원을 받았다고 함으로 안식교인 중에 기성교회로 개종을 하려는 사람이나 또는 기성교회에 다니다 안식교로 가려는 사람 중에 진목사의 글을 보고 영향을 받는 사람들에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하나의 실례로, 안식교편에 서서 안식교를 옹호해 준 <기독저널>의 발행인인 이흥선 씨가 필자(최삼경)에게 내용증명을 보내온 일을 들 수 있다.
이흥선 씨는 이 사건을 가지고 마치 큰 일이나 난 것처럼 기자회견과 함께 자신이 발행하고 있는 <기독저널>에 보도하겠다고 한 일이 있다(1996. 6. 21). 그런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위의 내용증명을 보내 오고 그 후에 아무 말도 없었으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런 유언비어가 이용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필자편에서 부득이 그 진실을 밝혀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밝힐 수밖에 없는 책임은 모두 안식교 편에 있다고 보나 책임이 어디에 있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이라고 본다.
본 합의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중요한 이유에 의하여 작성되고 실행된 것이다.
첫째, 책을 파기한 것은 안식교의 간절한 요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 당시 모든 것을 지켜보았고 또 이 문제에 있어서 진목사에게 조언을 했던 사람은 필자(최삼경)이다. 필자가 보기에 그 당시 안식교는 어떻게든 진목사의 책이 출판되지 못하게 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으로 보였다. 오히려 진목사는 그 책에 적지 않은 구조적, 논리적 약점이 있지만 법률적으로 불리할 것이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진목사가 결국 책을 안식교에 넘긴 것은 그렇게 해도 불리할 것이 없다고 판단됨으로 안식교의 요구에 응했을 뿐인 것이다.
만일 안식교편에서 이 점을 부정한다면 먼저는 안식교인의 양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란 점을 외적으로 내적으로 충분히 증명할 수 있다. 내적인 문제는 본 글에 설명이 될 것이다. 그러나 외적으로도 증명할 충분한 근거를 필자(최삼경)는 가지고 있다. 만일 이 점에 대해서 필자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면 필자를 세상 법정에 제소해도 좋다. 세상 법정에 서는 것은 싫으나 이 방법이 진실을 객관적으로 밝힐 수 있는 최선의 길일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둘째, 다음으로는 1천만 원의 책값을 받은 것도 안식교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위의 합의서를 부정적인 관점에서 보려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책값을 준 사람을 비난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책값을 받은 사람을 비난할 수 있다. 먼저 진목사는 왜 이단으로부터 책값을 받았느냐고 비난을 받을 수 있고, 반대로 안식교는 무슨 약점이 있어서 진목사에게 돈을 주었느냐고 비난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목사가 책값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안식교편에서 책값을 주겠다고 한 것이다. 진목사는 책값을 요구한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이 점에 대해서도 필자(최삼경)에게는 외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내적 증거에 의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단지 진목사는 책을 다시 쓰기 위하여 안식교에 책을 넘겨주고 그 책값을 받은 것이다.
셋째, 진목사 편에서 책 폐기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책값을 받은 경유는 이렇다
위에서 밝힌 것처럼 필자(최삼경)가 보기에 안식교에서는 어떻게든 그 책을 파기하는 데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안식교측에서는 책의 추천서를 써주신 분들에게 연락하여 회유를 하고 있을 때 필자(최삼경)가 책을 면밀히 검토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책에는 적지 않은 약점이 있었다. 내용상 큰 전제는 옳았지만 진목사가 처음 쓴 책이기에 구조나 형식상 적지 않은 약점이 있어 오히려 본질이 흐려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진목사에게 책을 다시 썼으면 좋겠다고 조언을 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책을 수정하여 출판하기로 결정하고 안식교의 간절한 요구가 있어서 남은 책을 안식교에 넘겨주고 책값으로 1천만 원을 받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약정서에 파기 합의서로 되어 있지만 책을 진목사가 스스로 파기한 것이 아니라 안식교에서 가져다가 파기한 것이다. 그런데 안식교측에서는 그 후 2-3개월이 지나지 못해서 약정서를 유출하여 진목사로 인하여 흔들리는 안식교를 방어하는 데 활용한 것이다. 최근에는 이 점이 더 노골화되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간단한 폐기 절차와 이유였다. 이제 이에 대하여 유행하는 말을 열거하고 하나씩 변증하겠다.
① "진용식 목사가 그 책에 대하여 잘못했다고 빌었다"는 말에 대하여
우선 빌었다는 말이 거짓인 것은 그 제목이 그것을 증명한다. 제목은 "회수 및 파기에 관한 합의약정서"라고 했지 "사과문"이라거나 "용서를 바랍니다"가 아니다. 이런 사과문도 있는가?
다음으로 진목사가 책값을 안식교에 준 것이 아니라 안식교에서 진목사에게 책값을 주었다는 것이 진목사가 빌지 않았다는 증거이다. 비는 자가 돈을 주어야 옳지 비는 자가 돈을 받는 법도 있는가? 진목사가 잘못했다고 빌었다고 하면서 진목사가 돈을 달라고 해서 주었다고 한다면 잘못은 진목사가 한 것이 아니라 안식교측에서 한 것이 아니겠는가? 오히려 돈은 진목사가 주어야지 어째서 안식교에서 돈을 줄 수 있다는 말인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는가? 차라리 눈물로 빌어서 불쌍해서 주었다고 하면 몰라도 말이다.
그리고 진목사가 빌었다면 다시는 안식교를 비판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지 계속해서 비판할 수 있도록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안식교인이 그 책이 파기된 후 진목사가 자신들에게 용서를 빌고 책을 파기했다고 하기에 그렇다면 왜 안식교에서 진목사에게 책값으로 1천만 원을 주었겠느냐고 했더니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하는 것을 본 일이 있다.
머지 않아 위의 책이 다시 출판된다. 만일 빌었다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전의 책이 가졌던 약점을 다 보완하여 다시 출판하게 되는데 그것이 진목사가 안식교에게 빌지 않았다는 충분한 답이 될 것으로 믿는다.
② 진목사가 돈을 달라고 해서 주었다는 말에 대하여
우선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진목사가 빌었다는 말과 모순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안식교에서는 돈을 달라면 주는가? 무슨 잘못이 안식교에 있지 않고서야 돈을 줄 리가 없을 것이다. 진목사에게 이단으로부터 책값을 받았다는 비난을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진목사가 잘못을 빌었다거나 돈을 달라고 해서 받았다는 말은 거짓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역시 합의서 내용과도 모순된다. 안식교의 말이 맞으려면 안식교측에서는 진목사로 하여금 다시는 안식교를 비판하지 못하도록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은 그 책을 파기하는 것이 안식교 비판을 중단하는 의미가 아님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역시 필자(최삼경)는 이에 대해서도 증거를 가지고 있다. 후에 안식교의 반응을 보고 필요하다면 교계 기자들에게 자료를 제시할 수도 있다. 아직도 안식교는 기성교회와 같아서 이단이 아니란 말인지 아니면 다르지만 옳아서 이단이 아니란 말인지 의심스럽다
필자가 여러 번 지적한 것처럼 안식교는 무조건 이단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있을 뿐 안식교가 기성교회와 같아서 이단이 아니라는 말인지 아니면 다르고 기성교회는 틀렸고 자신들이 옳아서 이단이 아니라는 말인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처음에는, 기성교회 안에는 많은 교파가 있지만 이단시하지 않는 것과 같이 기성교회와 안식교의 차이는 기성교회 안의 교파들간의 차이 정도라고 말하였지만, 논쟁을 진행해 가는 동안 안식교는 기성교회와 완전히 다르지만 기성교회가 틀리고 안식교가 옳기 때문에 이단이 아니라는 쪽으로 논쟁이 흘러갔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다른 모든 이단들이 그렇듯이 밖으로 기성교인들에게는 이단이란 소리를 듣지 않음으로 기성교인들을 효과적으로 미혹하자는 것이요, 또한 안으로 안식교인들에게는 자신들의 교리가 우월해서 이단이 아니라고 함으로 우월감을 가지게 하고 최근 들어 기성교회로 돌아오는 사례가 많은 안식교인들을 단속하자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그것을 증명해 보자.
우선 안식교인들에게 최대의 변증자로 주목받는 신계훈 씨가 쓴 책의 제목이 무엇인가?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신계훈, 빛과소리, 1993)는 것이다. 여기 어둠은 기성교회를 의미하고 빛은 안식교를 의미한다. 그런데 김대성 목사는, 안식교는 종교 개혁의 정신을 계승한 정통 복음주의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교회와신앙, 97년 4월호 152쪽 이하). 물론 김대성 목사가 제목은 그렇게 붙였지만 내용에서는 윌리암 밀러의 재림운동을 계승한 점을 변호했을 뿐 기성교회와 안식교가 같다는 점을 언급한 곳은 없었다. 이 점은 지난 10회 동안 변증한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김목사는 형식적으로는 안식교가 기성교회와 같아서 이단이 아니라고 말하였지만 내용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김목사의 말이 맞다면 본 논쟁에서 기성교회와 안식교가 같다는 점들을 들어가며 변증했어야 하고 아니면 혹 오해된 부분들만을 밝히면 족한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이단논쟁에 속한 논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같은 기성교회 안에서 심지어 한 교단 안에서도 논쟁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법주의 교리만은 기성교회에서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한 유일한 교리일 뿐 그 외의 모든 교리에서는 자신들이 옳아서 이단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논리가 성립된다. 빛이라고 믿는 안식교가 어둠이라고 보는 기성교회를 통해 이단이 아님을 인정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어둠에게 인정받으려는 빛도 빛인가? 그것은 결코 빛이 아니다. 그것은 어둠보다 더 어두운 빛일 것이다. 바로 안식교의 빛이라고 믿고 있는 그 빛이 이런 빛이 아니겠는가?
김대성 목사의 인격을 의심한다
여기에서 또 밝히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김대성 목사의 인격을 의심케 하는 사건이 있기 때문이다. 김목사는 '96년 여름 중서합회 장막 부흥회'라는 연합집회에서 "우리도 변화되자"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한 바가 있는데 그 강의 내용은 녹음 테이프로 제작돼 배포되었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김목사는 많은 부분에서 거짓말을 했다. 그러한 거짓 강의에 거기 있었던 안식교인들이 아멘을 연발한 것을 듣고 그 안식교인들의 감격해 하는 우매함보다 청중을 속이는 김대성 목사의 인격에 실망과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김대성 목사가 거짓말을 한 때가 <교회와신앙>과 지상논쟁을 시작한 후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이 크다. 그 강의 내용 중에 여러 가지 거짓 내용이 있지만 필자(진용식)와 <교회와신앙>에 대한 부분만을 다루고자 한다.
필자(진용식)는 <교회와신앙> 96년 7월호에 "김경선 장로님께 묻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한 바 있다(107-115쪽). 그런데 김목사는 이 부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거짓말을 했다. 강의 내용을 직접 들어보자.
"상황이 많이 바뀌어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던 신문, 잡지, 방송이 거의 멎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안식일교회를 이단시하고 기사를 쓰고 있는 잡지가 <교회와신앙>이라는 잡지인데 그 잡지가 장로교 통합측의 이단사이비 대책위원회 상담위원장(정확하게 하면 상담소장이다 : 필자주)인 최삼경 목사라는 분과 진용식 목사가 둘이 힘을 모아서 아주 끈질기게 안식일교회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 얼마전 그 잡지에 김경선장로에게 묻는다 하고 이제 기사를 냈는데 그 끄트머리에 가서 무엇이라고 썼는가 하며는 이흥선 목사님이나 김경선 장로님이 거기서 무슨, 물론 '님'자를 안 붙였습니다.
이흥선 목사나 김경선 장로가 그 동안 그렇게 기독교에서 이단시하던 안식일교회 편에 손을 들고 나서고 있으니 그 동안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던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이건 교단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문제를 제의하고 있어요. 그러니 우리가 이 두 분(김경선과 이흥선) 하나님의 사자들을 위해서 늘 기도하시고 늘 관심을 가지시고 이 두 분 하시는 일에 협력이 되어서..."(설교 테이프 녹취).
그가 한 거짓말은 다음과 같다.
우선 형식적인 문제에 있어서의 거짓이다. 필자가 위의 글에서 김경선 장로에게 '님' 자를 안 붙혔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다. 그 글에는 정중하게 붙여져 있다. 제목에서부터 정중하게 '김경선 장로님께 묻습니다'라고 하여 '님'자를 붙혔으며 그 내용 전체 처음부터 끝까지 '님'자를 한 번도 빼지 않고 붙여서 글을 썼다. 그리고 이흥선 목사에 대해서는 전혀 거론조차 한 바가 없다.
그런데 김목사는 왜 이런 거짓말을 했을까? 무의식적이었을까, 의식적이었을까? 그것은 김대성 목사만 알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사려깊고 정직한 인격을 가진 일반 사람이라도 그렇게 쉽게 들통날 거짓말을 할 수 없는데 성품성화를 힘쓰는 목사가 그렇다는 점에서 더 실망스런 것이다. 안식교는, 자신들은 부정하지만, 율법주의적 구원론을 가지고 성화의 삶을 강조하고 노력하는 자들이다. 성화된 사람, 품성이 변화된 사람의 특성 중 하나가 진실됨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안식교의 연합회 선교부장으로서 그의 성품성화 수준이 이런 수준이라면 짐작되는 바가 크다.
그리고 김대성 목사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필자 진용식의 글의 끝에서) 이흥선 목사나 김경선 장로가 그 동안 그렇게 기독교에서 이단시하던 안식일교회 편에 손을 들고나서고 있으니 그 동안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던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이건 교단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문제를 제의하고 있어요"라고 했다.
이흥선 목사와 김경선 장로가 안식교에 손을 들고 나섰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들은 안식교에 백기를 들고 항복한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동안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던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이건 교단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하고 있다'는 말은 김대성 목사가 글짓기를 한 내용이다. 김목사가 말한 내용은 글 끝머리에도 없고 첫 머리에도 없는 것이다. 김대성 목사가 조작한 작문이다. 김대성 목사가 진실한 사람이라면 이 점에 대하여 사과를 해야 할 것으로 본다.
<교회와신앙> 96년 7월호의 '김경선 장로님께 묻습니다'의 끄트머리의 글은 이렇게 되어 있다. "안식교의 이단적인 교리에 대하여는 질의할 것들이 많으나 중요한 것 몇 가지만 먼저 묻습니다. 장로님께서 안식교의 교리를 잘 모르고 하시는 일인지, 알고도 이단 교리에 미혹되어 하시는 일인지 알기를 원합니다. 바라건대 장로님께서 잘 알지 못해서 착오를 일으키셨다면 지금 안식교를 위해서 하시는 일을 중지하시고 한국교회 앞에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장로님께서 안식교를 옹호하시고 그들의 책을 출판하는 등의 일들이 얼마나 하 나님의 교회에 큰 영향을 주는 일인지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의 있는 답변을 요망합니다."
김목사의 거짓말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먼저 김목사가 한 말을 들어보자. "이목사님께서(이흥선 목사를 말함 : 필자주) 하신 일 중에 신문도 중요하지만 공개토론회를 주선하셨죠. 공개토론회는 기독저널 신문기사를 좀더 객관성 있게 평가받고자 하신 것인데 공개토론회 광고를 내보내고 목사님께서 여러 사람에게 편지를 냈습니다. 공개토론을 할테니 그 동안 당신이 안식일교회를 이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공개토론에 나오시오 하는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편지서를 여러 장 보내셨죠.
여러 장 보냈는데 거의 다 안 나오겠다는 것입니다. 대답은 나가 봐야 우리가 그저 이론으로 알 뿐이지 그 사람들과 실전을 하면 우리가 불리하니 안 나가겠다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들의 대답이었습니다. 혹시 나오겠다는 사람들이 있으면, 세 사람을 세우려 했으면 우리가 세 사람이 나오고, 나오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들에게 목사님이 자료를 보냈어요. '오직 성경만이 판단 기준이다' 뭐 기본, 이런 책을 보내서 안식교가 이런 걸 주장하고 있으니 준비를 하시오. 그 책을 받아서 그런지 뭐 어떠해서 그런지 그 책을 받은 뒤 얼마 있다가 다시 전화(가) 온댑니다. '못 나가겠다'고, 그래서 하여간 공개토론회를 하는, 한 삼사일 전까지도 사람이 정해지지 않은 거예요.
나올 사람이 없어 가지고 심지어 그 안식교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서적을 가장 많이 쓰던 사람 중에 한 사람, 세 사람이 그런데 두 사람은 돌아가셨고 이제 한 사람 박영관 목사님이 계신데 그 분에게도 목사님이 전화하셨죠?(이흥선 씨 : 예). 전화 하셔서 나오시라고 했더니 '아이고 내가 뭐 그 동안 글을 몇 개 쓰기는 했지만 나가면 뭐 잘 모른다'고 '진용식 씨 내보내라'고 그러드래요. 진용식 씨는 중서합회에서 다 아시죠? 어떤 분인지 다 아십니다. 지금 기독교회가 안식일교회 비판하는 일에 최고의 권위자를 진용식으로 내세웁니다. 그 정도로 안식일교회에 대해서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진용식한테도 목사님 연락하셨나요?(이흥선 목사에게 물음).
진용식도 우리를 알기 때문에 못 나오겠다는 거예요. 이래저래 안 나오겠다고 하다가 결국 두 사람이 최종 선발되었는데 여러분이 그 테이프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실례가 되지만 이 말을 좀 써야 되겠습니다. 우리말에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어요. … 중략 … 그렇게 해서 안식일교회를 이단시하던 사람들의 설 자리가 오므러 들어서 설 자리가 거의 없도록까지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과 김경선 장로님, 이흥선 목사님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박수)".
이 내용에서 박영관 목사에 대한 문제나 다른 문제는 관여하지 않겠다. 그러나 필자(진용식)에 대하여 한 말에는 대답을 하겠다. 필자는 이흥선 목사가 주선하는 공청회에 나가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목사의 말대로 안식교와의 실전이 두려워서 못 나간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필자가 나가지 않겠다는 말이나 나가겠다는 말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 글이나 근거가 있으면 밝혀주기 바란다.
이흥선 목사가 필자(진용식)에게 공개토론회에 나올 것을 제의한 일이 있다. 제의를 해 놓고 허락에 의하여 공개토론회를 가지겠다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열겠다고 해 놓고 나오라는 것이다. 그런 상식에 맞지 않는 공개토론회를 주선한 무례함은 그만두자. 그러나 필자는 이흥선 씨가 교단으로부터 또는 기성교회 이단연구가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고 지목받는 사람들을 비호하는 모습을 적지 않게 보아왔다.
그런 그가 공개토론회를 며칠 앞두고 팩시밀리를 통하여 공개토론회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온 것이다. 그 후 그가 전화를 걸어 왔는데 통화 상태가 안 좋아서 다음에 통화하기로 해 놓고 그는 더 이상 전화하지 않았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러니 필자가 공개토론회에 나가겠다거나 안 나가겠다거나 한 사실은 글로도 말로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안 나가겠다고 했다는 말이나 두려워서 그랬다는 말은 웬 말인가? 어쨌든 김대성 목사의 작문 실력은 알아주어야 할 것 같다.
하나씩 변증해 보겠다.
우선, 두려워하는 사람이 지상논쟁은 할 수 있는가? 필자(진용식)는 94년 2월부터 <교회와신앙>에서 안식교의 이단성을 지적해 오던 중 김상래 목사와 지상논쟁을 한 바 있는데 웬 일인지 김목사가 논쟁 중에 꼬리를 내리고 논쟁을 중단함으로 끝을 맺지 못하고 마친 일이 있다. 그것도 지상논쟁이 안식교 편에서 요청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필자가 요청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이미 김상래 목사와 지상논쟁을 하다가 안식교편에서 중단해 놓은 상태가 아니었는가?
그리고 이흥선 씨가 공개토론회를 하자고 하기 전에 이미 필자가 안식교측에 지상 공개토론을 요청해 놓은 상태였다. 김상래 목사가 일방적으로 논쟁을 하다가 중단함으로 정식으로 안식교 한국 연합회에 공개토론을 요청했던 것이다(교회와신앙, 95년 5월호). 이흥선 씨의 공개토론회에 나가지 않은 것이 두려워서 그랬다고 한다면 어떻게 공개토론을 하자고 할 수 있겠는가? 이흥선 씨가 주선하는 공청회라도 사전에 방법을 합의하여 객관성 있게 상식적인 수준의 공개토론회라고 인정됐다면 얼마든지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좋다. 그렇다면 앞에서 요구한 것처럼 다시 공개토론회를 요청하는 바이니 이흥선 씨와 함께 꼭 공개토론에 나와줄 것으로 믿는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요청하는 공개토론회는 나오지 못하고 어쩌고 저쩌고 한다면 목사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그 인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 공개토론회를 거절할 어떤 명분이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성경에 보면 사단은 거짓말쟁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이단의 특성이 아닌가 생각하며,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안식교 선교부장이 그 정도라면 나머지도 짐작되는 바가 있다.
공식문서를 인용하여 비판해 달라는 말은 어떻게든 안식교의 모순을 피해보자는 취지에서 나온 자가당착적인 말이었다
안식교인들은 자신들을 이단이라고 비판하는 사람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에게 습관적으로 하는 주문에 속한다. 즉 공식문서에 의해서 비판해 달라는 것이다(김대성, 교회와신앙, 96년 11월호 126쪽; 김상래, 교회와신앙, 94년 5월호 164-165쪽, 등). 예를 들어 칼빈주의를 오해하고 있는 어떤 한 사람에 의해서 칼빈주의를 비판한다면 되겠느냐는 것이다. 백번 천번 맞는 말이다. 그러면서 안식교측에서는 심지어 화잇의 글도 안식교라는 이름으로 비판할 수 있는 핵심 자료가 아닐 수 있다고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어떤 것이 공식문서인지는 말이 아닌 글로 정확히 밝히고 있지는 못하고 있다(김상래 씨는 밝혔으나). 그러나 구두로 그들이 제시하는 공식문서란 것은 바로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 기본교리 27>(편역인 천세원, 발행인 심태섭, 시조사)라는 것이다. 영문으로는 <Seventh-day Adventists Believe... A Biblical Exposition of 27 Fundamental Doctrines>라는 책이다. 그러나 이 말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비판을 막아보자는 임기응변적인 논리라는 점이다. 이를 증명하겠다.
우선 안식교가 이단이 아니라고 변증하는 소위 안식교의 변증자들은 대부분 이 책을 인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얼마나 모순된 소리인가? 다른 사람에게는 이 책이 "우리의 핵심적인 사상이니 이 책으로 비판해 달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교리를 소개할 때나 자신들을 변호할 때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모순 중에 모순이요 나아가 사기라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우선 그 동안 김대성 목사의 변증에서 바로 위의 책을 단 한 번이라도 인용한 일이 있는가? 없다. 다른 책을 중심해서 비판한 것이 안식교를 바르게 알지 못하고 비판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면 안식교인들이 믿고 있는 교리와 진리에 대한 변증 또한 안식교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점에 있어서 신계훈 씨도 별로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의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는 책에서도 위의 책이 별로 인용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책 전체에서 단 9번밖에 인용되지 못하였다. 그것도 핵심적인 내용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다. 신계훈 씨는 무려 800회가 넘게 참고문헌을 인용했다. 그 중에 자신들의 교리서라고 하는 책은 9번밖에 인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씩 살펴보자. 안식일 문제에 있어서 한 번, 영혼멸절 문제에서 한 번, 예정교리에서 두 번, 성서적인 재림과 비밀 휴거에서 한 번,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기에서 한 번, 교파의 기원 문제에서 한 번, 부록인 김순명 목사에 대한 변증에서 두 번이 전부이다. 결국 부록의 문제를 제하면 핵심교리 부분에서 7번밖에 없는 셈이다. 위의 책이 안식교의 핵심교리서라면 종횡무진하게 인용되어야 할 것이다. 안식교의 핵심교리인 조사심판 문제나 2300주야 문제에서는 한 번도 인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안식교인들도 이 책을 자신들의 교리서로 인정을 하지 않던지 아니면 인정하더라도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안식교측의 논리대로라면 신계훈 씨가 쓴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는 책자도 공식문서가 못 된다. 공식 변증서도 못 된다. 이 책은 신계훈 씨 개인이 변증한 서적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도 시조사에서 출판한 책도 아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 짐작된다. 신계훈 씨를 통하여 변증의 효과를 보고 그의 변증에 약점이 생기면 그것은 그 개인의 실수로 돌려 안식교를 보호하자는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그런데도 실제적으로 이 책을 안식교의 공식변증서인양 이용하고 있다는 점 또한 아이러니한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영문으로 나온 연대는 1988년이요 그것이 한국에 번역된 연대는 1990년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 나오기 전의 안식교는 무엇을 믿었는가 하는 점이다. 전에는 교리가 없었다는 말이요, 또한 혼돈의 시대인 사사시대의 사람들처럼 자기 소신에 옳은 대로 믿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삿 21:25). 그렇다면 100여 년이 넘도록 안식교는 자신들의 정리된 교리가 없었다는 말이요, 이제 9년 전에야 교리가 정리되었다는 말이요, 그것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7년 전에야 알려졌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날 안식교인들 중에 진정한 의미의 안식교 교리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의심스럽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핵심적인 교리에 대하여 답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 더 큰 문제이다. 즉 2300주야 문제에 있어서 그 기산점을 "기원전 457년, 곧 아닥사스다왕 제7년에 해당한다"(299쪽)고만 할 뿐, 왜 그 날로 잡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 의해서는 아무런 비판을 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공식적인 교리서이기에 그렇게 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에는 변증적인 내용이 없는가? 아니다. 있다.
교리서라는 책에 기성교회에 대한 변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어쩌면 교리서로서 품위가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바로 주일 문제이다. 주일 문제에 대하여는 자신들의 안식일 문제에 관해서만 언급한 것이 아니라 기성교회의 주일 문제에 대하여 비판까지 가하고 있다(241쪽).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책에 의해서는 안식교를 바르게 또는 필요한 만큼 알 수도 없지만 더욱이 비판의 서적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안식교인들이 이 책에 의해서 비판해 달라는 말은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혼미케 하려는 연막술에 불과하다. 그 대표적인 문제가 2300주야 문제의 기산점 문제이다. 기산점을 457년으로 잡아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도 안식교 학자들마다 입장이 다 다른데 누구의 말을 따라서 비판하라는 말인가? 안식교인들은 화잇의 이론을 성경과 같이 진리의 전제로 보고 교리를 진행시키기 때문에 생긴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더 놀라운 일이 있다. 자신들은 시조사를 자신들의 교단 인쇄물의 공식 발행소이자 보급소로 보기를 주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교회지남, 96년 11월호). 거기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시조사 편집부장 천세원의 이름으로 된 "교회 내의 출판물 유통과 검열에 관하여 협조를 당부하며"라는 글이다. "시조사는 지난 88년 동안 교단의 공식 출판사로서 복음 전도를 위한 병참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 시조사는 교단 인쇄물의 공식 발행소이자 보급소로서, 교단 서적의 독립적 배포권을 갖는다"라고 되어 있다. 한 마디로 시조사에서 발행하는 책들은 안식교의 공식문서가 된다는 말이다. 비판을 피하려 할 때는 공식문서를 한 권의 책에 국한시키면서도 정작 자신들은 시조사에서 발행한 책들을 공식문서로 보도록 한다는 말이니 안에서의 얼굴과 밖에서의 얼굴이 지킬과 하이디처럼 다르다는 말이 아닌가?
변증서 출판을 통해 안식교를 옹호해 주고 있는 김경선 장로의 글도 이의 연장선에서 보면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신계훈 씨의 책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를 제호만 바꾸어 재출판한 <오직 성경만이 판단 기준이다>의 출판서문에서 김경선 장로는 다음과 같이 상반된 두 가지 말을 했다.
"안식일교회에는 그들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놓은「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기본교리 27」이라는 책이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안식일교회를 교리적으로 비평하려면 어떤 개인들이 저술한 책의 한 부분을 인용하지 말고 그 책을 사용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우리가 이단이라고 규정한 부분에 대하여 너무나도 상세하게 그 대답을 끝내놓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 대답에 대하여 다시 어떤 문제를 제시하지 못했을 뿐이다. 안식일교회는 1991년도에 삼육대학 교수인 신계훈 박사가 저술한「오직 성경만이 판단 기준이다」라는 저서를 내 놓고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 책을 통해서 그들은 모든 문제에 대하여 성서적으로 역사적으로 명쾌한 변증을 제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기본교리 27>을 안식교의 공식문서라며 그 책을 들어 비판하라고 말하고, 또 한편으로는 안식교에서 신계훈 씨의 책으로 상세하게 변증해 놓고 기성교회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며 마치 신씨의 책이 안식교의 공식적인 변증서인양 말하고 있으니 자가탕착도 보통 자가당착이 아닌 것이다. 안식교에서 그렇게도 내세워 의지하고 있는 이흥선 씨 역시 같은 맥락의 말을 했으니 자가당착의 도미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호에 대한 반증
그래도 화잇의 빗나간 거짓 예언을 성경적이라고 변호할 것인가?
안식교는 화잇을 말세의 선지자로, 남은 교회의 특징으로 믿고 주장하고 있음은 이미 충분히 밝혀졌다. 그러나 필자는 화잇이 거짓 선지자임을 여러 가지로 비판하였다. 화잇을 거짓 선지자라고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예언이 비성경적이며, 성취되지 않은 빗나간 예언이 많다는 것이었다. 김목사는 본 논쟁 중에 예언이 성취되지 않으면 거짓 선지자라는 점을 형식적으로는 인정을 하면서도 화잇의 빗나간 예언의 의미를 교묘한 말로 변호하였다.
그 중에 하나를 예로 들어보면, 노예제도가 재림시까지 계속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필자가 <교회와신앙> 96년 11월호 137쪽에서 화잇이 노예 제도가 재림시까지 계속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비판을 하자 안식교측에서는 96년 12월호 149쪽에서 변명하기를, '반역을 일으킨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을 붙여 예언한 것인데 그 부분을 삭제하고 뒷부분만을 가지고 원래의 의미를 왜곡시켜 비판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필자는 97년 1월호 151쪽에서 화잇의 노예제도에 관한 예언을 초기문집 283족의 문장을 소개하면서 조건을 붙여서 예언했다고 하는 안식교측의 변명이 거짓말이었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랬더니 안식교측은 97년 2월호 134쪽에서 변명하기를, 그 내용은 원문에도 번역본에도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다시 안식교측은 원문에도 역본에도 없다고 잡아떼던 그 내용을 그 책 93년도판 179-180쪽에서 발견했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 내용은 미래적인 사건을 현재적으로 예언한 것이라고 97년 3월호 117쪽에서 변명을 하였다.
필자가 제시했던 책은 76년도판인데 93년도 책과 페이지가 달라서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가 97년 3월호 126쪽에서 원문에 없는 내용이 어떻게 역본에 있는지 답변을 요구하자 안식교측은 이에 대해서는 답을 못하고 필자가 그 책의 출판 연도를 밝히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였다. 그리고 요청한 <교회증언> 원문도 아직까지 도착하지 않고 있다.
다시 정리해 보면, 안식교는 재림시까지 존재한다는 노예제도에 대한 화잇의 예언이 원문에 '반역을 일으킨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을 붙여 예언한 것이라고 했다가, 다음에는 아예 원문에 없다고 함으로써 화잇이 그러한 예언을 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변명하였다가(그 내용이 있으면 거짓 선지자가 됨을 간접적으로 시인한 결과이다), 그리고 이제 와서 처음에 '반역을 일으킨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다면'이란 전제 조건이 있었다고 했던 말에 대한 변증은 '옳다 그르다'는 말도 없이 그냥 안개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미래적인 사건을 현재적으로 예언한 것이라는 말로 변명하고 말았다.
화잇의 거짓 예언에 대한 안식교의 변명은 이런 식이었다. 이것은 화잇에게는 절대로 잘못이 없다는 전제 때문에 발생한 결과라고 본다. 이래도 저래도 화잇의 거짓 예언에 대한 답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반역을 일으킨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다면'이란 말은 어떻게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필자가 보기에 김대성 목사가 필자보고 화잇을 잘 모른다고 했는데 그 동안 횡설수설한 점을 볼 때 화잇을 잘 모르는 것은 필자가 아니라 김대성 목사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한번 화잇의 노예제도의 예언에 대하여 취급하려 한다.
"나는 노예의 주인들은 자기들의 무지 가운데 가두어 둔 노예들의 영혼들에 대하여 책임 져야 할 것을 보았다. 그리하여 노예들의 죄악들이 주인에게 전가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지 가운데서 타락하여 하나님과 성경에 관하여 아는 바가 없으며 주인의 채찍밖에 두려워 할 줄 모르고 짐승보다도 더 낮은 수준에 있는 노예들을 하늘에 들이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정심 많은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취급하실 것이다. 반면에 주인들은 마지막 일곱재앙을 만날 것이며 둘째 부활에 다시 일어나 고통을 받다가 마지막 비참한 죽음을 당하여야 할 것이다"(엘렌 지 화잇, 시조사, 초기문집 283쪽).
다음과 같은 말이 된다.
첫째, 노예의 구원이 일반인과 다르다는 것이다. 무지한 노예는 하늘에 들어갈 수 없으나 하나님의 동정심으로 일반인과 달리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취급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예의 죄를 주인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노예가 나오지만 이러한 말씀은 없었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와 정반대의 사단적인 이론이다. 빌레몬서에 나오는 노예 오네시모는 분명히 구원받은 노예였다. 이로 보아 화잇의 노예에 대한 예언은 성경과 맞지 않다.
이에 대하여 김대성 목사는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는가 못 받는가? 못 받는다면 엘렌 화잇의 말이 맞는 것이다"라는 짧은 말로 넘어가려고 하였다(교회와신앙, 97년 4월호 152쪽). 노예의 영혼은 주인에게 예속되는 것처럼 하는 말이 불신자가 불신에 대한 책임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과 어떻게 같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화잇의 주장은 '옳다 그르다' 하는 논쟁은 그만두더라도 근본적으로 기성교회의 인간관과 다르다는 점만은 분명하지 않은가?
둘째, 이 예언대로 한다면 노예제도가 일곱 재앙이 내릴 때까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식교에서 말하는 일곱 재앙은 말세의 재림 직전에 있을 계시록의 7재앙을 말하는 것으로 안식교인들은 아직도 일곱 재앙은 내리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화잇은 이 예언에서 노예의 주인들이 일곱 재앙을 받을 것이라고 예언했으니 이 예언이 성취되려면 일곱 재앙이 내릴 때까지 노예의 주인들이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노예제도는 폐지되었고 당시의 노예의 주인들도 다 죽었으나 아직 일곱 재앙은 내리지 않았으니 무엇을 의미하는가? 차라리 비록 미국의 노예 제도는 폐지되었으나 지금도 내적으로 노예와 같이 사는 사람들이 있음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김목사는 이 문제에 대하여 한 마디도 답변하지 못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째서 영원의 '아이오니오스'(aionios)는 영원한 '아이오니오스'(aionios)요 영벌의 '아이오니오스'(aionios)는 한 세대의 '아이오니오스'(aionios)인가?
필자는 97년 2월호에서 안식교의 내세관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특히 안식교가 영원지옥을 부인하면서 영원(aionios)이라는 단어 "아이오니오스(aionios)"가 한 세대, 한 세상을 의미하는 단어이기 때문에 영원한 지옥도 한도 끝도 없는 영원한 지옥이 아니라는 주장(신계훈, 어두움이 빛을 이기지 못하더라, 202-203쪽)에 대하여 필자는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영영한 불(aionios)에 들어가라고 하였고(41절) 역시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영(aionios)생에 들어가라고 하여 같은 '아이오니오스'(aionios)가 쓰여졌음을 지적하였다.
여기에서 '아이오니오스'(aionios)를 한 '세대'나 한 '세상'으로 해석하면 우리가 얻을 영생 '아이오니오스'(aionios)도 한 '세상'으로 끝나는 영생이 되고 마는 것이다. 신계훈 씨의 말처럼 영(aionios)생이 한이 없는 생명을 말한다면 영(aionios)벌도 한이 없는 영원 지옥을 말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한 논리적, 문법적인 결론이 된다(41절). 또 마가복음 3장 29절의 성령 훼방죄가 영원히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했을 때도 '아이오니오스'(aionios)가 사용되었는데 '아이오니오스'(aionios)는 한 '세대'나 한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이것은 마태복음 12장 32절의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씀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김대성 목사는 이에 대하여도 유구무언이었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7년 5월호).
안식교는 정통교회가 될 수 없다 (2)
<교회와 신앙> 97년 2월호 140쪽에서 "헬라어(푸뉴마, 푸쉬케)와 히브리어(루아흐, 네페쉬, 네쇠마) 단어가 1658회 나오지만 불멸하거나 몸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영혼의 개념으로 사용된 경우는 한 번도 없다"는 안식교측의 새빨간 거짓말에 대하여 97년 3월호 130쪽에서 누가복음 23장 46절과 사도행전 7장 59절의 몸과 분리의 개념으로 사용된 푸뉴마와, 누가복음 24장 39절의 "영(푸뉴마)은 살과 뼈가 없으되"를 인용하여 반증하였다.
김대성 목사는 이에 대하여도 역시 유구무언이었다. 김목사는 오히려 97년 4월호 153쪽에서 필자의 변증을 가리켜 '수준 이하의 변증 논리'라고 하였는데 수준 높은 논쟁을 했던 김목사는 왜 수준 높은 대답을 못하고 있을까?
그래도 안식교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에서 태어난 사생아가 아닌가?
김대성 목사와 논쟁을 하며 생각나는 옛 말이 있다. '처녀가 애를 배도 할 말이 있다'는 말이다. 재림의 시기를 정하여 시한부 재림설을 전파한 사단적인 밀러의 종말 운동에 대해서도 안식교는 옹호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안식교 외에도 그 간에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있었지만 잘못했다고 시인하고 회개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는 점과, 또한 밀러가 존재하지 않고는 화잇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과, 화잇이 존재하지 않고는 안식교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점과, 그리고 안식교가 존재하지 않고는 김대성 목사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으로 볼 때 백 번 이해가 된다.
그러나 밀러의 시한부 재림설과 시한부종말론 운동에 대한 안식교의 변명은 스스로 모순에 빠져 버렸다.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에 대하여 안식교측은 두 가지로 변명하고 있는데 열거하고 비판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밀러가 시한부종말론 운동을 했을 때는 안식교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때이기에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은 안식교가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요, 둘째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이 비록 실패했지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며 성령운동이었고 첫째 천사의 기별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모순이 있다.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이 안식교와 무관한 것이라면 왜 안식교는 굳이 밀러의 시한부종말론이 성령의 기별이었다고 변명해야 하고, 또 한 편으로 첫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하면서도 자신들과 무관하다는 모순된 주장을 할 수밖에 없는가?
안식교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과의 관계를 개신교와 천주교의 관계에 비유하여 자신들을 합리화한다. 그러나 개신교와 천주교와의 연속적 내지는 불연속적인 관계와 밀러와 안식교와의 연속적 내지는 불연속적인 관계는 유사성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안식교인들이 알아야 할 것은 개혁자들은 천주교의 그 교리를 비판하여 피를 흘리며 개혁을 하고 나왔지만 안식교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을 비판하고 개혁해서 나온 무리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사단적인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을 성령의 운동이었다고 찬양하고 첫째 천사의 기별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 자체가 바로 밀러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점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에 의해서도 쉽게 시한부종말론을 말하면 밀러가 거론되고 그 후손으로 안식교가 꼽히는 것이다. 즉 쉽게 일반인들은 밀러의 운동에 대한 비판을 똑 같이 안식교에 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에 참여했다가 나온 '여호와의 증인'들은 비록 이단이지만 전혀 밀러와 관련시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안식교처럼 그것을 첫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제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은 안식교가 공식 명칭하에 조직되기 전의 일이기 때문에 안식교가 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이러한 안식교의 주장은 다음의 두 가지로 비판받을 수 있다.
첫째로 밀러의 시한부종말론은 안식교의 핵심교리라는 점이다. 안식교의 교리를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하자면 세 천사의 기별이다. 세 천사의 기별 중에 첫째 천사의 기별이 밀러의 시한부종말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밀러는 첫째 천사의 기별을 전한 기별자가 되는 것이다. 만일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이 안식교와 무관한 것이라면 안식교의 기별은 세 천사의 기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안식교는 자신들의 교리를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을 포함해서 세 천사의 기별이라고 하는 것이다. 즉 밀러는 안식교의 첫째 천사의 사자로서 안식교의 사상적인 기초가 되는 것이다.
우리 나라 역사를 볼 때 대한민국이 있기 전에 조선, 고려, 신라, 백제, 고구려, 고조선 등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나라가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앞의 나라들은 우리 나라가 아니란 말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조선 시대의 이순신 장군은 남의 나라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 나라 사람인 것이다. 이것이 상식이다.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은 안식교(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에서 한 일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을 첫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하는 한 그리고 2300주야 문제나 조사심판 교리가 살아 있는 한 화잇은 밀러파라고 하는 것은 상식이 아니겠는가?
하나 더 예를 들어 보자. 역사적으로 전혀 관련이 없는, 그리고 직접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사상이 같으면 같은 범주 안에 두는 것은 상식이다. 예컨대 영지주의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고 또 영지주의자들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어도 어떤 사람의 사상이 영지주의와 같을 때 그를 영지주의자라고 하는 것이다. 하물며 밀러의 재림 운동의 영향권 내에서 그리고 그 사상을 벗어나지 못한 안식교를 어떻게 밀러와 다른 교파라고 할 수 있겠는가?
둘째,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은 분명 비성경적인 사단의 운동이었다는 점이다. 화잇은 밀러가 성경을 연구할 때 천사가 가르쳐 주었다고 했는데(엘렌 지 화잇, 시조사, 쟁합 360쪽) 이는 엄청난 문제를 야기시킨다. 즉 성취되지 않은 시한부종말 예언의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말이다. 즉 거짓 예언도 하나님이 시켜서 천사가 했고 또 그것을 실행하지 않게 한 것도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거짓 영으로 만드는 것이다.
김대성 목사는 참선지자인가 아닌가를 구별하는 4가지 기준을 말하면서 그 둘째가 예언 성취 여부라고 하였다(교회와신앙, 96년 12월호 148쪽). 그렇다면 김대성 목사의 말에 의하면 밀러는 사단의 영을 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의 기별은 첫째 천사의 기별이라고 한다면 어떤 엉터리 예언도 다 합리화될 수 있는 길이 있지 않는가? 안식교에서 지난 1992년 10월 22일의 시한부종말론에 대하여 많은 비판을 하는 것을 보았다. 밀러의 1884년의 기별이 첫째 기별이 될 수 있다면, 과연 1992년의 기별이 넷째 기별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도 입에는 달고 배에는 쓰더라(계 10:10)는 말씀이 밀러의 종말론을 가리키는 것인가?
안식교는 밀러의 시한부종말론 운동이 잘못된 거짓 운동이었다고 하지 못하고 있으며 할 수가 없다. 김목사는 <교회와신앙> 97년 4월호에서 '인간의 위기는 하나님의 기회'라는 말로 밀러의 시한부종말 운동을 '인간의 위기'라고 표현하였으며 또한 그것을 '하나님의 기회'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을 성경으로 변명하려고 했는데 바로 계시록 10장 10절의 말씀이다. 즉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 가운데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으니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는 말씀이다. 이 구절을 밀러가 시한부종말론을 깨닫고 전할 때는 기쁨으로 했으나 그 예언한 것이 맞지 않아서 실망하게 될 것을 예언한 구절이라고 해석했다. 결국 밀러의 시한부종말 운동의 실패가 이 구절의 예언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우선 이 말씀은 밀러의 사단적인 재림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라고 되어 있다. 누가 보아도 여기 '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다. 입에서는 달고 배에서는 쓰더라는 말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는 꿀같이 달지만 그 말씀을 적용해서 말씀대로 살게 될 때 받는 핍박과 고난, 시련 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것이 밀러의 재림 예언이라고 하는 성경 해석이 바로 이단들이 하는 성경해석 방법이다. 계시록의 감람나무를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나, 엘리야가 자신이라고 하거나, 요한이 자신이라고 하는 것이나, 본문을 밀러의 예언과 관련시켜 해석하는 것은 유사한 방법의 성격해석이다.
그리고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시한부종말론 운동은 어느 때 어떤 운동이든지 비성경적인 것이며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다. 재림의 시한을 정하는 것, 예언된 재림 날짜를 정하는 것 자체가 어떤 궤변으로도 합리화될 수 없고 정당화될 수 없다.
안식교의 말대로 시한부종말론 운동의 실패가 계시록 10장 10절의 예언한 쓴 맛의 경험이라면 그간에 모든 시한부종말론도 문제 삼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장림의 92년 10월28일 시한부종말론 운동도, 여호와의 증인의 수차에 걸쳐 실패한 시한부종말론 운동도, 안식교의 분파인 시기파들의 시한부종말론 운동도 다 같이 쓴 맛이라고 하면 된다.
장로교가 분파됐다고 비판하는 점에 대하여
김대성 목사는 한국의 개신교가 100개 이상으로 난립되어 있는 실정을 들면서 그 원인을 교리 문제가 아니라 감정 혹은 권력 다툼의 결과라고 보고 비판하였다(교회와신앙, 97년 4월호).
이 부분에 대해서도 먼저 안식교에 묻고 싶다. 안식교는 기성교회와 다른 교파인가 아닌가? 그 동안 자신들도 기성교회 안의 다른 하나의 교파와 같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안식교도 기성교회란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면서도 기성교회를 공격하는 것은 바로 안식교가 기성교회와 다르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만일 이 문제가 자신의 문제라고 본다면 비판하면서도 반성하고 아파하고 함께 회개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고 교파가 난립되는 것을 옳다고 하는 것도 아니요 그리고 다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다른 모든 이단들이 기성교회를 비판하면서 그 반사이익을 누리며 살아가듯이 안식교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실제로 안식교인들은 기성교회 교인들을 절대로 형제로 보지 않는다는 점은 안식교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구를 비판하려면 그 비판의 대상이 누구였든지 그 기준은 같아야 한다. 세상에서도 두 개의 저울과 두 개의 자를 사용하는 자는 악한 자이다. 그렇다면 김대성 목사가 볼 때 이흥선 목사는 예장 합동측으로부터 제명을 당하고 안식교로 들어가지도 않고 기성교회 이름으로 자신이 또 교단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점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는 안식교를 옹호해 주는 사람이니 이 비판의 대상에서 예외인가?
그보다 더 모순된 점이 있다. 안식교 안에는 얼마나 많은 분파가 있는가? 열거해 보자.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 개혁운동이 있고, 제칠일안식일 예수교 안성 새중앙교회가 있고, 엘리야 복음선교회가 있고, 안상홍증인회가 있고, 시기파가 있고, 절기파도 있고, 그리고 경배파도 있다. 안식교인 15만 명에 이렇게 많은 분파가 있다는 점에서 결코 교인 500만 명이 넘는 기성교회의 분파를 비판할 자격이 있다고 볼 수 없다. 옛말에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런 경우를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분파에는 두 가지가 있다. 비난을 받아야 하는 분파요,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 분파도 있다. 예컨대 아브라함이 롯과 갈라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어떻게 감리교와 장로교를 하나로 합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감리교와 침례교를 합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서로 존경하고 잘 조화있게 지내고 있지 않은가? 서로 이단이라고 하지도 않으면서 말이다.
그 동안 논쟁의 총정리
이번을 포함해서 그간에 안식교와 10회에 걸쳐 논쟁을 해 왔다. 이번 논쟁을 통하여 어떤 사람에게는 오히려 혼란을 일으키게 됐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안식교에서 초점을 흐리게 하자는 말장난 때문일 뿐 자세히 살펴보면 안식교 교리의 상당 부분이 밝혀졌고, 기성교회의 교리와 어떤 점이 다른가와 왜 안식교가 이단인가에 대해서도 밝히 알 수 있다고 본다. 안식교는 그간에 안식교에 대하여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그 구체적 내용을 지적하지도 못하면서 안식교 교리에 대하여 잘 모르고 비판한다는 말을 상습적으로 해 왔다.
그러나 필자 편에서 보면 오히려 김대성 목사가 안식교를 안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식교를 잘 모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이번 논쟁 이후에는 그런 소리를 하지 못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번 논쟁을 통해서 자신들의 교리를 충분히 들어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안에만 갇혀 밖으로 나가서 보지 않고서는 그 위치나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간 안식교와 논쟁했던 내용들 중에 필요한 부분들을 요약 정리하고 보충하는 형식을 취하겠다.
그래도 안식교가 상대적인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필자는 논쟁을 시작하며(교회와신앙, 96년 8월호) 왜 안식교가 이단인가를 밝히고 안식교측에서는 '상대적 이단과 절대적 이단'이라는 제하로 이단의 분별 문제를 취급했다. 이 글에서 김대성 목사는 어떤 교단의 결정이나 의견으로 이단으로 결정되었을 때 상대적 이단이며, 성경으로 분별해서 성경에 맞지 않는 교리를 가졌을 때 절대적 이단이라고 하는데 안식교는 상대적 이단이지 절대적인 이단이 아니라고 하였다(교회와신앙, 96년 8월호).
즉 이단이냐 아니냐의 분별을 성경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말한 안식교는 성경 외에서 논쟁을 많이 하였고 반대로 성경적인 변증은 별로 하지 못했다. 필자는 어느 학자의 의견을 거의 참조하거나 인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안식교의 주장대로 안식교의 교리에 대하여 성경으로 비추어 볼 때 왜 이단인가를 계속 밝혀왔다. 그러나 안식교는 자신들이 주장해온 바와는 모순되게 빌리 그래햄 복음 협회가 이단이 아니라고 했다느니, 마틴 박사가 이단이 아니라고 했다는 등(교회와신앙, 96년 8월호 111쪽) 무슨 단체나 학자들의 견해를 근거로 해서 이단이 아니라고 변증하기를 힘썼다.
그리고 최근 안식교 옹호자 김경선 장로의 책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에서도 안식교가 이단이 아니라는 변증을 하면서 '세계의 주요 교단과 단체들에서 이단이 아니라고 했으니 안식교는 이단이 아니다'는 식의 변증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나 김경선 장로의 책을 면밀히 조사해 보니 아전인수격으로 말한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안식교를 가리켜 '이단이 아니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이단이다'고 말하지 않으면 '이단이 아니다'고 했다는 식으로 한 부분이 많이 있다. 이 또한 후에 다른 방법으로 취급하도록 하겠다.
이런 김대성 목사의 논리로 비추어 볼 때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보자. "이와 같이 '이단'이라는 말이 자주 오용된 과거의 역사로 미루어 보아, 그 말은 결코 함부로 사용할 용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단'이라고 하는 말을 남용하는 한국교회의 풍토는 매우 우려할 만한 상태가 되었다. 여러 '이단 감별사'(?)들이 인쇄물이나 방송 매체를 통해 앞다투어 '이단' 보고를 하고 있다.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이단을 정하는 자(尺)가 틀려 있기 때문에 그 자를 가지고 재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이며, 사분오열되어 있는 한국교회의 풍토에서 이단 시비를 가린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예를 들어 교단 '갑' '을' '병'이 서로를 인정하여 정통이라고 자처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교단 '갑'이 교단 '정'을 이단으로 정했는데 교단 '을'이나 '병'은 '정'을 이단으로 정하지 않았을 경우, 그 관계가 매우 모호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갑'이라는 교단이 한국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을 경우, 한국에서는 '갑' 교단이 '정' 교단을 이단으로 결정했는데 미국에서는 같은 '갑' 교단이 같은 '정' 교단을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모순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교회와신앙, 96년 8월호 110쪽).
이 논리에 안식교(갑)와 이흥선 씨(을)와 김기동 씨(병)를 대비시켜 보자. 안식교(갑)에서는 영혼멸절을 주장하기 때문에 사람이 죽어서 귀신이 된다는 김기동 씨(병)의 귀신론을 이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흥선 씨(을)는 김기동 씨(병)를 이단이 아니라고 옹호하고 있다. 안식교(갑)에서는 그런 줄 알면서도 이흥선 씨(을)를 의지하여 안식교(갑)를 옹호하도록 하고 있다. 자신들(갑)이 이단이라고 하는 사람(병)을 이단이 아니라고 하는 그 자로 재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야말로 김목사의 말처럼 '모순'스런 일이 아닌가? 김목사는 이것을 하나의 가지로 비유하였다. "어떤 사람의 말중에 한 가지가 틀렸다고 해서 나머지 모든 말이 무조건 틀리다고 결론지울 수 있는가"(교회와신앙, 97년 2월호 136쪽)라고 하였다.
이 말은 더 '모순'된 말이다. 김대성 목사가 처음에 말한 것처럼 이단논쟁은 성경논쟁이라고 하였다. 적어도 안식교(갑)에서 이흥선 씨(을)를 의지하여 이단이 아니라고 옹호받고 보호받기를 원하고 있다면 이흥선 씨(을)가 이단이냐 아니냐를 성경에 입각하여 바르게 보고 있다는 전제가 가능할 때에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급하다고 도둑질해서 먹을 수 없고, 도둑잡는다고 아무 칼이나 휘둘러 죽일 수 없으며, 화난다고 서방질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흥선 씨를 통해 옹호받으려는 그 자세가 바로 상대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오히려 교단의 학자들에 의하여 규정된 이단규정은 상대적이라 하고, 상대적인 두 개의 자를 가지고 이단을 재고 있는 이흥선 씨의 이단옹호는 절대적이란 논리가 안식교의 논리인가?
과연 안식교는 율법주의가 아닌가?
안식교의 구원론은 율법주의 구원론임을 성경적으로 그리고 그들 스스로의 모순점을 들어서 비판하였다. 그러자 김대성 목사는 그 동안 들어보지도 못했던 아주 중요한 말을 하였다. 안식교가 처음에는 율법적인 구원론을 가졌으나 1888년 안식교 총회에서 믿음의 의를 받아들여서 구원 교리가 대전환되었기 때문에 지금은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변증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형태의 말을 사석에서 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즉 '옛날에는 그랬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안식교인들이 말하는 옛날은 1888년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분명히 고인이 된 우필원 목사가 안식교에 최고의 영향을 미쳤던 사람으로 그의 '큰 구원'과 '영원한 구원' 문제에 대해서도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논쟁을 통해서 김대성 목사가 그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최초의 말이라고 보인다. 어떤 의미로든 놀라운 일이다. 진정으로 안식교가 이단적인 율법주의를 버리고 전환하였다면 안식교에는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말이 가능하다.
먼저는 안식교의 시작은 화잇이 아니라 1888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가장 미워하고 저주의 포문을 넓히기에 주저하시지 않으셨던 율법주의를 버리고 이신칭의 사상으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도 중요한 말이 왜 그 동안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래도 남은 문제는 화잇의 책임이다. 누가 안식교를 1888년 전에는 율법주의로 만들었는가? 화잇일 것이다. 1888년 전이든 뒤든 화잇의 계시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안식교이다. 그런데 그 구원교리가 대전환되었다면 화잇의 계시가 거짓 것이란 말이다. 만일 화잇의 사상에는 율법주의가 없었는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었다면 1888년 전의 안식교인들에게는 화잇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는 바보들만 모였다는 말도 될 것이다. 그래도 화잇의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고 본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율법주의자인지 아닌지 그녀는 알고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1888년의 대전환 사상을 김대성 목사 한 개인의 실수로 돌려버릴 소지가 많기 때문에 하는 말인데, 김대성 목사 외에 안식교를 변호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신계훈, 이흥선, 김경선 등)에 의해서도 이 점이 시인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김 목사의 말과는 달리 안식교의 공식적인 입장이 '안식교 교리는 1888년 전이나 후나 같다'고 한다면 그 책임은 바로 김대성 목사에게 돌아간다. 김목사가 안식교의 율법주의를 임기응변적으로 숨기려다 저지른 실수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안식교편에서나 기성교회편에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실수라고 본다. 안식교편에서는 자신들이 율법주의였음을 인정하는 큰 실수가 될 것이요 기성교회편에서는 한 개인의 실수만으로 묻어둘 수 없는, 안식교의 진실을 알게 하는 정직한 실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남는다. 김대성 목사의 말이 맞으려면 대전환되기 전의 안식교의 구원교리가 무엇이었으며, 무엇이 어떻게 대전환되었는지에 대하여 선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반복하여 질문하였건만 김목사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지금까지도 유구무언인데 무엇을 의미한다고 보는가?
안식교의 토요일 준수는 율법주의의 산물이다
그간의 논쟁에서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가장 길게 이어온 문제가 안식일 문제일 것이다. 안식일 문제는 안식교측에서 가장 자신있게 생각했던 문제이고, 기성교인들을 미혹하는 데 재미를 보아온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다른 문제만은 1회로 끝냈는데 김대성 목사의 특별한 요구에 의하여 안식일 문제만은 2회나 논쟁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안식일 문제의 논쟁에서 안식교는 필자의 비판과 주장을 변증하지 못하고 계속 피하여 간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점이다.
그간의 안식일과 주일 문제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필자는 <교회와신앙> 96년 11월호 140-143쪽에서 구약의 안식일이 폐지되었음을 성경적으로 분명하게 구체적으로 증거하였다. 그리고 안식교측에서는 역시 96년 11월호 127-133쪽에서 안식일이 폐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96년 12월호 141-144쪽에서 필자는 안식일이 폐지되었다고 증거하였다. 이 때 나온 핵심적인 사상은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의 안식일이 '절기 안식일'이 아니요 '제칠일 안식일'이라는 문제요, 또한 안식교측이 초대교회에서 안식일을 지켰다고 주장했던 부분(행 13:14, 42, 44, 17:2 등)에 대하여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려 간 것이 아니요 전도하려고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갔다는 문제로 압축되었다. 그리하여 필자는 안식교측에서 주일에 예배한 근거가 성경에 없다고 한 주장에 대하여도 충분히 변증하였다(교회와신앙, 96년 12월호 145쪽).
그러나 안식교측은 안식일이 폐지되었다는 96년 11월호 필자의 성경적 증거들에 대하여 12월호에서는 한 마디 답변도 못하였다는 점을 독자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결국 이단논쟁은 성경적인 논쟁이어야 한다고 하면서 일반 역사에 의해서 주일이 로마의 콘스탄틴에 의하여 시작되었다는 등의 말로 성경 밖에서 논쟁을 하자고 하였다.
김대성 목사가 전혀 변증을 시도조차 하지 못한 내용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교회와신앙> 96년 11월호의 안식일 문제의 반증을 못하였으며, 골로새서의 '안식일'이 '절기 안식일'이 아니라 '제칠일 안식일'이라는(96년 11월호 141쪽) 주장에 대하여도 하나도 반증하지 못하였으며, 또 초대교회의 첫 주일 예배인 오순절 다락방의 모임에 관하여도 아무런 답변도 못하였다. 이것을 유구무언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안식교측은 다시 97년 1월호에서 '안식일이 폐지된 것인가 요일만 변경된 것인가'를 물었다. 이 질문은 안식교편에서 기성교회를 가장 어지럽히기 좋은 호재로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율법이 신약에서 폐해졌다는 말과 완성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못 알아듣는 데서 나온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주일 개념은 구약의 안식일 개념에서 연속적인 요소가 없지 않다. 그러나 또한 폐해진 것이다. 전자의 의미가 율법이 완성되었다는 의미에 속하는 것이요 후자의 의미가 율법이 폐해졌다고 하는 의미인 것이다. 또 안식교는 일요일 예배의 기원을 성경적으로 역사적으로 밝혀 달라고 물었는데 96년 12월호 145쪽을 다시 살펴보기 바란다.
결론적으로 안식일과 주일 문제에 대한 논쟁을 다시 요약해 보면 안식교측은 안식일이 폐하지 않았고 초대교인들은 주일이 아닌 안식일에 예배하였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주의의 겉옷은 벗었는데 속옷은 벗지 못한 증거이다. 안식교의 주장이 맞다면 신약성경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 있거나 초대교인들이 안식일에 예배한 기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없다.
안식교측에서는 신약성경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나 안식일에 초대교인들이 예배하였다는 기록을 단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안식일이 폐했다는 분명한 근거를 제시하였고 사도행전 2장에서 초대교인들의 분명한 주일 예배의 근거를 밝혔다. 안식교가 지금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신약성경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이나 초대교인들이 안식일에 예배를 드렸다는 근거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안식일 문제의 논쟁은 결국 안식일이 폐지되었다는 것과,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그 날이며 초대교회의 첫 예배일이었으며 성령 강림일이었던 주일에 예배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것을 확실히 밝혀준 것이었다. 인도의 도마교도 이집트의 꼽트교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고 있다는 점도 역사적으로 초대교회는 주일을 지켰음을 입증하는 것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다.
그 후 김목사는 억지로 큰 호재라도 잡은 듯이 들고 나온 것이 히브리서 4장 9-10절이다. 거기 "안식할 때"가 원문에 의하여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교회와신앙, 96년 12월호 156쪽). 그리하여 이 점을 연구하여 이것이 문법적으로, 논리적으로, 성경 상호간의 유기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충분히 다 지적하였다(97년 2월호, 129쪽).
즉 구약의 '사바트'는 '안식일'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안식'도 의미함을 밝혔고, 그것은 신약에도 마찬가지이며, 신학적으로는 더욱 그러하며, 만일 안식일로 번역한다면 아직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을 때 가능하다는 논리적 모순을 지적했으며, 끝으로 왜 안식교에서는 같은 단어로 되어 있는 히브리서 4장 10절과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 히브리서의 안식은 안식일로 해석하고 골로새서의 안식일은 토요일 안식일이 아니라 절기 안식일이라고 모순된 주장을 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물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구체적인 언급은 한 마디도 없이(유구무언) 박창원 편 헬라어 사전의 언어학적 의미롤 한 마디 하고 심지어 '양심'까지 운운하며 '양심' 없는 소리를 하고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97년 3월호, 117쪽).
2300주야 교리와 조사심판 교리는 안식교의 최고의 교리이자 최고로 엉터리 교리이다
2300주야와 조사심판에 대한 문제는 이번 논쟁에서 안식교의 교리가 얼마나 비성경적인 것이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문제였다고 본다. 우선 2300주야에 대한 연대 기산점도 엉터리요,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하는 방법도 그 결과도 엉터리이다.
김목사는 어떤 문제를 변증하지 못했는가 살펴보자.
우선 2300주야에 대한 연대해석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안식교는 하루를 1년으로 계산해서 2300년이라고 해석하는데 이 해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간단히 비판할 수 있다. 이 예언은 다니엘 8장 9-14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작은 뿔의 횡포 기간을 말하는 것이다. 안식교에서는 이 작은 뿔을 로마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안식교의 해석대로 하면 2300년 동안 작은 뿔인 로마가 횡포를 부렸을 때 맞는 말이다. 그러면 안식교의 말대로 기원전 457년부터 1844년까지 2300년 동안 로마가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미친 사람이 아니면 그렇게 주장을 하지 못할 것이다. 로마는 기원전 457년에는 나타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다음으로는 기산점이 틀렸다. 안식교는 예언의 기산점을 457년으로 하기 위하여 그 이유는 기원전 457년에 성전 건축령이 내려졌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성전은 그보다 59년 전인 516년에 이미 완공되었기 때문이며 그 전에 성전 건축령이 여러번 내려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1844년에야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조사심판을 시작하셨다는 조사심판 교리는 더욱 엉터리이다. 성경은 이미 예수님이 승천 즉시 지성소에 들어가셨다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히 6:20, 9:12).
필자가 여러 가지로 비판했지만 안식교의 김대성목사는 이에 대하여도 한 마디도 반증하지 못하였다(역시 유구무언). 97년 1월호에서 조사심판에 대한 비판을 받았으면 2월호에서 그 답변이 있어야 했음에도 김대성목사는 한 마디의 반증도 하지 못했다. 다만 비판만 하지 말고 그 해석을 보여 달라고 하는 말을 하였다. 우선 비판에 대하여 대답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결국 이번 논쟁에서 2300 주야와 조사심판 교리에 대한 비판에 관한 안식교의 답변은 듣지 못하였다.
기성교회의 해석을 보여 달라고 하는 말에 동정심마저 들지 않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에 대하여 다 알지 못한다. 특히 계시에 대하여는 조심하고 알지 못하면 모르는 대로 두는 것이 인간이 계시에 대하여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이다. 안식교처럼 엉터리로 해석을 하려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안식교는 성경을 다 알고 해석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교만의 극치이다. 그리고 네가 대답을 하지 못하면 내 답은 무조건 맞는다는 전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무지한 질문이요 그리고 마치 내가 도둑놈이 아닌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네가 도둑놈인 것을 증명하려는 것과 같다. 내가 도둑이 아니면 네가 도둑되고, 내가 도둑이면 네가 도둑이 아닌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도둑놈이라도 너도 도둑놈일 수 있고, 내가 도둑놈이 아니라도 너도 도둑놈이 아닐 수 있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안식교의 2300주야 문제와 조사심판 교리가 틀렸다는 점을 증명하는 것과 상관없이 필자의 입장을 알려주겠다.
2300 주야의 바른 해석은 무엇인가?
다니엘 8장 14절의 2300 주야에 관한 해석의 순서는 먼저 작은 뿔이 무엇이냐라고 본다. 작은 뿔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작은 뿔을 알기 위해서는 또한 본문 8절의 수염소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수염소는 헬라라고 21절에 해석하고 있다. 본 예언에 나타나는 수양 수염소 등은 나라들을, 그리고 그 뿔들은 왕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수염소(헬라)의 큰 뿔은 첫째왕 곧 알렉산더를 예언한 것이며(21절) 이 뿔이 꺾이고 네 뿔이 난 것은 알렉산더가 죽은 후에 네 왕이 일어날 것에 대한 예언이다.
그런데 이 네 뿔 중에 한 작은 뿔이 날 것이 예언되었는데 이 작은 뿔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안식교는 그 작은 뿔을 로마로 해석했으나 맞지 않는다. 작은 뿔은 짐승에게서 나온 뿔이 아니라 뿔 중에서 나온 뿔이다. 그래서 이 작은 뿔은 또 다른 나라의 출현으로 볼 수 없고 한 왕의 출현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 해석이 23절부터 25절까지 나와 있다. 이 작은 뿔은 네 나라 마지막 때에 일어날 한 왕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23절).
그런데 이 작은 뿔을 의미하는 왕은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작은 뿔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패역자들이 가득할 즈음에 일어날 왕이다(23절).
2. 그 얼굴은 엄장하며 궤휼에 능하다(23절 하).
3. 권세가 강하나 자기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24절 상).
4. 비상하게 파괴를 행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멸할 것이다(24절 하).
5. 평화한 때에 많은 무리를 멸할 것이다(25절).
6. 만 왕의 왕을 대적할 것이다(25절 중).
7. 결국 사람의 손으로 말미암지 않고 깨어질 것이다(25절 하).
또한 작은 뿔이 행할 횡포는 이렇다.
1. 남편과 동편과 영화로운 땅을 향하여 커질 것이다(9절).
2. 하늘 군대의 별을 떨어뜨리고 짓밟을 것이다(10절).
3. 군대의 주재를 대적할 것이다.
4. 매일 드리는 제사를 중지시킬 것이다(11절).
5. 성소를 헐어버릴 것이다(11절하).
6. 진리를 땅에 던질 것이다.
7. 그 기간은 2300 주야가 될 것이다.
8. 2300 주야 후에 무너진 성전이 회복될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예언대로 행했던 왕이 누구인가? 이 예언에 적중한 왕이 바로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 왕이었다. 그는 네 뿔인 네 나라의 마지막 때에 패역자들이 가득할 때 태어났다(마카비 1:1-15). 그는 궤휼에 능한 자였으며(마카비서 1:11) 그는 파괴를 행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멸하였다(마카비서 1:20-24). 평화한 때 많은 무리를 멸하였으며(마카비서 1:30), 만왕의 왕을 대적하였으며(마카비 1:40-50), 또는 그는 사람의 손을 말미암지 않고 급사했다(마카비 6:7-13).
안디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예언대로 그 세력이 이스라엘 즉 영화로운 땅까지 미쳤고 예루살렘을 침략하였으며(마카비 1:16-24), 하늘 군대의 별인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를 죽였으며 제사를 중지시켰으며(마카비 1:44-50), 성전을 헐고 진리를 땅에 던져버렸으며(마카비서 1:44-52), 그리고 그의 이러한 횡포는 주전 167년 12월 25일부터 주전 164년까지 2300일 동안 계속되었다.
이렇게 명백한 해석을 무시하고 안식교의 교리를 만들기 위해서 작은 뿔을 로마로 해석하여 조사심판 교리를 억지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안식교의 2300 주야의 해석과 조사심판 교리는 명백한 오류였음이 확실히 밝혀진 것이다.
안식교의 선지자 엘렌 지 화잇은 사단의 선지자이다
이번 논쟁에서 또한 직간접적으로 안식교가 이단 사교라는 것이 분명히 밝혀진 내용이 있다면 화잇의 거짓 선지자 문제였다. 성경은 분명히 가감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계시의 종결성을 말하고 있는데 안식교는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교회와신앙, 96년 10월호 150-151쪽). 이는 기성 교회는 성경만이 완전 무결하고 유일한 하나님의 특별 계시라고 믿는 반면, 모든 이단들은 성경 외에도 다른 계시를 가지고 있는 것이 그 특성인 것처럼 안식교도 이단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 요소이다.
이단들이 성경 외에 다른 계시나 선지자를 주장하는 이유는 성경에 없는 다른 교훈을 만들어 내기 위함이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충분한 진리이다. 다른 계시나 선지자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안식교 역시 화잇의 계시를 통하여 성경에 없는 다른 교훈(이단교리)을 많이 만들어 냈는데 그 중 하나가 음식물에 관한 문제이다.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는 대로이다.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서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서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3:9). 안식교는 성경 외에 다른 계시와 선지자를 주장하여 성경 외에 다른 교훈(이단교리)을 가지고 있는 한 이단일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안식교는 계시록 12장 17절의 말씀에 기초하여 화잇의 선지자성을 인정한다고 주장하였는데(교회와신앙, 96년 10월호 156쪽) 안식교가 제시한 그 구절(계 12:17)에는 화잇이 선지자라는 말이나 뜻은 전혀 없다. 특정한 성경 말씀을 놓고 이를 살아 있는 누구 누구를 상징한다고 하는 것은 이단들이 피할 수 없는 성경해석법이다.
김대성 목사는 식물에 대해서도 변증하지 못하였다
성경에 이단들이 주로 가르치고 미혹하는 교리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음식물에 관한 문제이다. 즉 안식교와 같이 음식물에 대한 교리로 미혹하는 이단이 나올 것을 미리 예언하여 경계하고 있음을 볼 때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롬 14:20),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1-5),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히 13:9).
위와 같은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볼 때 안식교는 음식물로 생겨난, 이미 성경에 예언된 이단임에 분명하다. 필자는 안식교가 구약의 부정한 음식의 규례를 주장하는 것이 비성경적이며, 화잇의 계시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먹으라고 하신 육식을 금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교리라는 것을 97년 3월호를 통하여 비판하였으나(131-135쪽) 이 역시 다음 호인 4월호에서 아무런 반증을 하지 못함으로(여기서도 유구무언이었다) 김대성 목사야말로 '수준이하'의 논쟁을 하였다.
하나님께서 광야 40년 동안 계획을 변경한 것처럼 화잇의 예언도 그렇다고 말한 점에 대하여 화잇은 1856년 안식교 총회에서 총회 대표자들 중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살아서 맞이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김대성 목사는 필자가 그 동안 줄기차게 지적해온 화잇의 거짓 선지자성 부분에 대하여 다른 것은 되든 안 되든 변명이라도 하였지만(특별히 노예제도 문제에 있어서) 그러나 1856년 총회의 예언에 대하여는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였을 뿐 제대로 변명을 하지 못하였다. 이 예언이 있은 후 그 당시 사람들이 이미 다 죽고 없음을 볼 때 이것만으로도 화잇은 거짓 선지자임을 필자가 비판하였다(교회와신앙, 96년 10월호 147쪽; 11월호 137쪽). 그러자 김대성 목사는 두 번에 걸쳐 대답을 하였다(96년 12월호, 97년 2월호).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세 가지가 된다.
첫째는 비록 화잇의 예언이 틀렸지만 10여 년이 지난 다음 화잇이 "많은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못하므로 재림이 지연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교회증언 2권, 영문 194)"는 것이다(96년 12월호 150쪽)는 것이다.
둘째는 바울도 그리스도의 재림이 자기 시대에 있을 것을 기대하였던 것처럼(살전 4:15) 화잇도 그렇다는 것이다(96년 12월호 150쪽).
셋째는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려고 했는데(출 6:6-8), 결국 20세 이상된 자들을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신 것처럼(민 14:26-30) 화잇의 재림 예언도 그렇다는 것이다(97년 2월호 135쪽).
필자는 이렇게 불경스런 말은 세기적으로 들어본 일이 없다. 비판해 보자.
먼저 화잇이 10년 후에 재림이 지연되었다는 것을 말했으니 그가 거짓 선지자가 아니라는 말이 되는가? 그런 예언은 천하의 사기꾼도 그리고 천하의 멍청이도 할 수 있는 예언이다. 해보고 틀리면 하나님의 계획이 변경됐다고 하면 되니까 말이다. 오히려 그렇게 말했다는 점이 그녀가 인간적으로도 정직하지 못한 사기꾼 선지자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 땅에 시한부종말을 예언한 사기꾼 예언가 중에 그 예언이 틀렸을 때 회개하고 잘못을 시인하는 사람을 본 일이 있는가? 거의 없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위의 말은 화잇에게는 어떤 잘못도 있을 수 없다는 전제 속에서 가능한 말이다.
다음으로 바울의 재림 대망사상과 화잇을 비교한 문제이다. 먼저 종말신앙은 모든 시대에 모든 사람의 마땅한 신앙의 윤리이다. 모든 시대의 모든 성도는 언제라로 주님이 오시기를 바라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원하는 진정한 종말신앙이다. 시한부 내지는 시한부적 사상에 의해서 주님을 기다리는 것은 자기 시대에만 종말신앙을 필요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진정한 종말신앙을 파괴하는 것이다. 바울이 자기 시대에 주님이 오시기를 원하고 그 가능성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지 오신다고 예언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바로 김대성 목사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시한부종말론으로부터 생겨난 안식교인으로 어쩔 수 없이 숨어 있는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과 화잇을 동등한 선상에서 말하는 것 자체도 불경스런 일이라고 본다.
끝으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경륜과 화잇을 비교하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실 때 하신 말씀이 거기서 나온 사람들은 무조건 기계적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다고 하는 예언은 아니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은 광야에서 한 사람도 죽지도 않는다는 예언이 아니었다. 언약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신 그 언약이 파기되었는가? 아니다. 비록 불순종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광야에서 죽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셨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김대성 목사의 말로 하면 이 땅에 어떤 시기꾼 예언가의 예언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 없어진다. 예언을 해 놓고 틀리면 그것을 하나님의 계획 변경과 동일시해버리면 되니까 말이다. 안식교인은 하나님을 믿는 것인가 화잇을 믿는 것인가? 그런 엉터리 예언을 말한 사람이 화잇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고 한다면 분명히 비판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역시 이 말은 화잇을 하나님과 같은 경륜자로 볼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에 대하여 이해가 안 될 때에 그 뜻을 알기는 원하지만 그 주권 자체를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해의 대상이기 전에 신앙의 대상인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논쟁을 계속해 오는 동안 안식교인들은 화잇을 신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예컨대 정상적인 장로교인이라면 칼빈을 존경하지만 칼빈의 실수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칼빈을 숭배하거나 믿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는 윌리안 부스에 대한 구세군의 입장이나 웨슬리에 대한 감리교인의 입장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바로 안식교인들이 화잇을 그렇게 보는 것이 화잇이 적그리스도요 안식교인들이 이단인 것을 밝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감히 어떻게 화잇의 예언이 빗나간 점과 주권자로서 인격으로서 그 계획을 변경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언약과 비교할 수 있다는 말인가?
표절과 차용에 대하여
화잇은 생전에 수많은 계시를 받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녀가 쓴 책의 상당 부분이 다른 사람의 글을 표절했다는 것이다. 화잇의 표절 문제는 안식교인들이 가장 아파하는 내용이다. 일반적으로도 표절이란 비신사적인 일로 세상에서도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인데 기독교인이란 사람이, 그것도 선지자란 사람이, 그것도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이 남의 책을 보고 책을 쓰고 그것을 계시라고 했으니 말이다. 더욱이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사실을 밝히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필자가 이 점을 드러내자 안식교에서는 변명을 해보려고 하다가 김대성 목사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온 말이 그것은 '표절'이 아니고 '차용'이라는 말을 하였다(96년 10월호 152-153쪽). 성경에 하무라비 법전의 개념과 문체가 있었다는 점과, 솔로몬이 아가서를 다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과, 이사야서의 일부와 미가서의 유사성과, 역대상?하서가 사무엘상?하와 또는 열왕기상?하와 상당 부분이 같다는 점과, 사복음서가 상당 부분 같다는 점과, 유다서와 요한계시록이 에녹서에 나오는 자료를 인용했다는 점을 들어서 화잇은 차용을 한 것이지 표절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의 내용을 하나씩 비판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긴다.
김목사 식으로 한다면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의 어떤 표절도 차용이란 말로 합리화될 수 있다. 김목사에게 한 가지 충고를 하고 가르쳐 주고 싶은 것이 있다. 세상에서는 김목사가 말하는 '차용'을 바로 '표절'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남의 책을 80% 이상이나 표절을 해놓고 그것이 차용이니 어쩌니 하는 비상식적인 말이 종교인의 입에서 가능한 말인가? 바로 이단이기에 가능한 말이다.
이것도 화잇을 신봉하고 화잇의 글을 성경과 같은 수준에서 놓고 보기 때문에 나온 엉터리 변증으로 보인다. 화잇이 한 행동이나 말은 무엇이든지 다 신적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일반적인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고 차용이라고 하면 안식교인들에게 용납될 수 있겠는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다. 안식교인들은 화잇의 신격화를 겉으로는 부정하고 화잇의 계시를 성경이라고 보지 않는 것처럼 하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화잇은 숭배의 대상이거나 화잇의 글은 성경과 동등한 내지는 그 이상의 계시로 여기고 있는 증거라고 본다.
결론: 안식교는 정통교회가 아니다
금번 안식교와의 논쟁을 통하여 안식교측의 주장하는 교리들이 비성경적이며 비논리적이고 비상식적인 것임이 명백하게 밝혀졌다고 본다. 안식교측은 자신들의 교리를 소개할 뿐 그 비판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부분을 구체적으로 답변하지 못하였다. 필자는 그것을 유구무언 씨리즈라고 하고 싶다. 그나마도 변증한 부분에 있어 어떤 부분은 전혀 성경적이고 교리적이기보다 형식적이고 세상적인 변증을 한 부분이 많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안식교의 교리가 대부분 성경에 근거한 것처럼 할 뿐 사실은 화잇의 계시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기성교회는 안식교를 정통교회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7년 5월호).
그건 공식적으로 한것이 아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