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는 수년 동안 징강산과 장시성 남쪽 일대에서 전투를 하면서 후난 군과 장시 군의 전력을 샅샅이 파악했다. 후난 군은 강하고 장시 군은 약했기 때문에 마오의 주요 공격대상은 장시 군이었다. 지난 번 펑더화이가 창사성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주력군이 바깥에 나가 가능했었으나 지금은 달랐다. 허젠의 친위부대 4만 병력에다, 대포도 많고 병력도 많았다. 허젠은 공성 방비에 대비해 창사성 주변 수로망(해자)의 특점을 충분히 이용하고 있었다.

지하의 수로망에 목책을 세우고 전기 철조망을 가설해 전기가 통하도록 했다. 사람이 철조망을 잘못 건드리면 감전되어 죽게 되어있었다. 홍군이 몇 문의 대포만 있더라도 이런 큰 성을 공격할 수 있었겠지만 겨우 박격포 몇 문에다 총 또한 상당히 부족해 언감생심이었다. 그런대 어떻게 성을 공격할 수 있겠는가. 마오는 자신도 모르게 한 숨이 터져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리리산이 독전(督戰)으로 파견한 창장국(長江局)의 대표 저우이뤼(周以栗)가 지난번에 파견한 특사와는 달리 전쟁을 경험한 사람이란 점이었다.

마오는 눈앞에 전개되는 엄연한 현실에서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전국시대 때 제나라 톈단(田單)이 연나라의 군사를 깨뜨린 불소(火牛)가 상대방의 진으로 뛰어들어 진을 부수는(火牛沖陣) 방법을 쓰기로 했다.

마오는 수십 마리의 물소(水牛)를 사서 소꼬리에 폭죽을 다발로 묶어 맨 뒤 물소들을 전선 철조망 쪽을 향해 세워 놓고 폭죽에 불을 붙이면 놀란 소들이 앞으로 달려가 철조망을 끊어 주기를 기대했다. 누가 알았으리요. 꼬리에 불붙은 소들이 마오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소꼬리에 매달은 폭죽에 불을 붙이자 놀라서 열 받은 소들이 앞으로 내달리는 게 아니라 거꾸로 홍군진영으로 달려들었다. 불붙인 전사들이 채 방어하기도 전에 돌진하는 소의 뿔에 받히거나 밟혀 죽는 돌발적 사태가 벌어지면서 아수라장이 됐다. 뒤에서 돌격태세를 갖췄던 홍군은 좌충우돌하는 소들에 놀라 지리멸렬이 되고 말았다.

   
1931년의 마오쩌둥.


이 계책이 실패하자 대포 등 중화기가 없는 홍군은 그저 보병총이나 큰칼을 빼들고 앞으로 돌격할 수밖에 없었다. 몸을 던지며 전선 철조망과 기관총이 빗발치고 대포가 터지는 쪽으로 진격했으나 성문아래에 무더기로 널브러지고 말았다. 시산혈해(尸山血海)를 이뤘다. 홍1군단과 홍3군단은 하루 종일 격전을 치렀으나 헛되이 3천여 명이 사망하는 참패를 당했다. 국민당 군은 어떤 손실도 입지 않았다. (주석 67)

마오는 창사성 아래 빽빽이 들어 찬 홍군시체를 보고 칼로 가슴을 후비는 듯 망연자실할 뿐이었다. 3천여 명, 이게 어떤 병력인가. 주더와 우리 부대가 합류했을 때 3000명이 채 되지 않았던가. 온갖 고생을 해 이만큼 혁명역량을 키웠는데 말짱 도루묵이 아닌가. 마오는 비통한 마음을 부여 않고 더 이상의 전투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마오는 리리산이 파견한 독전관 저우이뤼를 인내심 있게 설득했다.

“내가 당신보다 더 창사성을 공격하고 싶다. 나는 창사성을 쳐부수고 내 처자를 만나고 싶다. 나는 벌써 3년 동안 집사람과 아이들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동지들이-. 현재 장제스는 펑위샹, 옌시산과 중원전쟁을 끝냈다. 승리한 장제스는 창사성을 지원하기 위해 백군을 계속 내려 보낼 것이다. 우리가 지금 부대를 이동하지 않으면 당신과 나를 포함해 홍1방면군은 적들의 만두소가 된다. 지안(吉安)이 비어 있으니 지안을 점령해 근거지와 연결할 수 있어 혁명역량을 장대하게 키울 수 있다.”

저우이뤼는 머리를 끄덕끄덕하며 “뤈즈 형의 말이 맞소. 창사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인데 리산이 명령을-”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멀리서 대포와 총 소리가 더욱 거세게 들렸다. 저위이뤼가 벌떡 일어나더니 마오에게 “뤈즈 형, 바로 창사에서 부대를 철수합시다. 리리산이 추궁하더라도 내가 모든 책임을 지겠소. 당적에서 제명하거나 내 목을 치거나!”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마오는 감격해 저우이뤼 에게 “제명을 겁낼 필요 없다. 나는 이미 한번 제명당한바 있다. 전쟁의 오류를 막는 게 중요하다”며 위로했다. 9월 13일, 마오는 1방면군을 창사에서 철수해 지안으로 진격했다. 홍1방면군은 10월 3일 지안을 공격해 총기 1천여 정을 노획했다. 이렇게 해 홍군은 난창 이남의 장시성 남쪽지구, 깐저우(竷州)를 포함해 거의 장시성 절반을 손에 넣게 되었다. 홍군은 지안에다 노농 민주정부를 건립해 징강산 시대와 비견할 만큼 새로운 기상을 활짝 펼쳤다.

양카이후이는 마오가 이미 창사에서 철수한 줄 모르고 핑장에서 황급히 창사로 돌아왔다. 양카이후이는 거리에서 적위대가 전부 철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마오가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낙담한 양카이후이는 급히 빤창으로 돌아갔다. 양카이후이 어머니는 딸을 보고 깜짝 놀라 “샤(霞)야, 너 어떻게 이럴 때 돌아왔느냐. 홍군이 철수한 뒤 허젠이 곳곳에서 사람들을 체포하고 있어. 이곳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근심스럽게 말했다.

양카이후이는 “알아요. 소문이 무성해요. 빤창 일대에 있는 당원들을 철수시켜야 해요. 자기 스스로도 보살필 수 없는 어려운 시국이예요. 어머니, 마음 놓으세요. 이 일을 끝낸 뒤 곧바로 빤창을 떠날 거예요”라며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양카이후이는 바깥에 밀정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조심했다. 헌데 50여 살 쯤 되는 천(陳)이라는 노회한 끄나풀이 매일 질항아리를 메고 빤창을 왔다갔다하며 탐문하다 양카이후이를 발견했다.

이 끄나풀은 현지 퇀방쥐(團防局)에 총알같이 신고했고, 퇀방 국장은 10여 명의 사병을 데리고 양카이후이 집으로 달려갔다. 이들은 양카이후이와 집안일을 돕는 천(陳)아주머니를 붙잡아 갔다. 이때가 1930년 10월 하순께로 마오가 지안에 노농 민주정부를 세웠을 즈음이었다. 양카이후이가 다음 날 창사로 끌려갈 때였다. 양카이후이 입주위에 핏자국이 선명했으나 얼굴은 평안해 보였다. 양카이후이는 마을사람들에게 “여러분, 마지막입니다. 안녕히 계세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많은 폐를 끼쳤습니다. 널리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한 뒤 하늘을 쳐다보며 꼿꼿한 자세로 걸어갔다.

군벌 허젠은 양카이후이가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작약했다. 일부 악질 지주들은 양카이후이를 총살하라고 요구했다. 허젠은 이를 거부하고 창사의 영향력 있는 신문사의 기자를 양카이후이와의 면회를 주선해줬다. 기자가 양카이후이가 붙잡혀 있는 육군감옥소에 들어갔을 때 양카이후이가 온갖 고문을 받아 숨이 넘어갈듯 반송장이 된 모습을 보고 자지러지게 놀랐다. 기자가 분개해 “천인공노할 이런 죽일 놈들, 어찌 사람을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말인가”하며 욕을 퍼부었다. 양카이후이가 겨우 실눈을 뜨고 힘겹게 물었다.

“당신은 허젠이 보냈는가. 그자가 허락하지 않으면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양 선생, 오해하지 마시오. 내가 근무하는 신문사를 양 선생도 알 것이요. 창사에서 가장 개명되고 진보적인 신문입니다. 창사의 각계 인사들이 당신의 부친인 양창지 노선생의 얼굴을 생각해서 당신이 출옥할 수 있도록 보석을 청원하고 있어요. 신문사에서도 당신이 보석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현재 대표들이 허젠을 만나 타협을 봤습니다. 첫째, 인격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에 전향서를 쓰지 않는다. 둘째, 지하공산당의 명단을 제출하지 않는다. 이렇게 했고, 단지 하나의 조건만 받아들이면 감옥에서 나갈 수 있습니다.”
“어떤 조건입니까.”
“마오쩌둥과 부부관계를 청산한다는 성명발표하면 됩니다.”
“그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마오를 사랑하는 것은 내 스스로의 생명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고귀합니다.”
“존경합니다. 양 선생, 당신은 정말로 위대한 사람입니다.”
“마오쩌둥과 부부관계를 끊었다는 성명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부부고, 더욱 중요한 것은 전우입니다. 부부관계 청산을 선포하는 것은 정치적으나 믿음에 비춰보더라도 배반 행위입니다. 나의 인격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아버지에 그 딸입니다. 양 선생, 당신은 정말로 양창지 노선생의 딸로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기자는 깊은 감동을 받고 말을 끝낸 뒤 감방에서 나갔다.

보름 후인 1930년 11월 14일 새벽, 육군감옥소 뜰에 나온 간수장이 “양카이후이 끌어내!”라는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깨뜨렸다. 감옥에서 고생을 같이 한 사람들이 일제히 양카이후이의 감방을 쳐다봤다. 양카이후이는 새로 지은 흰 상의를 입고, 겉에는 중국의 여성 옷인 푸른색의 치파오(旗袍)를 걸쳤다.

두 명의 간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양카이후이가 천천히 감방에서 나왔다. 8살인 큰 아들 마오안잉(毛岸英/한국전에서 미군비행기 폭격으로 사망)이 뒤에서 “엄마!”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양카이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좋은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사형감독관이 뒤에서 간수가 울면서 따라 나오려는 마오안잉을 막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감독관이 탄식을 하면서 말했다.

“양 선생, 한 어머니로서 정말 세 어린아이들을 버리려 하십니까. 지금이라도 마오쩌둥과 부부관계를 끝낸다고 말하면 늦지 않았습니다.”

“쓸데없는 시간낭비를 하지마세요.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뤈즈(마오 字)의 혁명이 이른 시일 안에 성공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목은 자를 수 있으나, 믿음은 절대로 바뀔 수 없어요.”

“유언은 없습니까.”

“내가 죽은 뒤 일반인들이 하는 장례를 치루지 말라고 저의 가족에게 전해주면 고맙겠습니다.” 

“마음 놓으세요. 내가 꼭 당신의 말을 양 큰 부인(楊老 太太)께 전해 드리겠습니다. 세 아이들도 집으로 돌려보내 부양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양카이후이는 고개를 끄떡였다. 사형감독관은 서류를 확인한 뒤 “공산당 중요 범인에게 판결한다. 마오쩌둥의 처 양카이후이를 사형에 처한다. 지금 곧 쓰즈링(識子嶺) 형장에서 총살형을 집행한다”고 큰 소리로 선포했다.

그날 오후 1시 창사성 류양먼(瀏陽門) 바깥 쓰즈링 형장에서 한 발의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양카이후이의 그때 나이 29살이었다. (주석 68)

   
앙카이후이와 두 자녀.


양카이후이의 총살 소식은 신문을 통해 마오에게 전달됐다. 이날 마오는 지안 사령부에서 문서 초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허쯔전은 홍군이 적들에게서 빼앗아 온 신문을 마오에게 건네주었다. 그 당시 홍군은 무전기가 없어서 상하이 중앙과 연락을 할 수 없었다.

마오는 징강산에 있을 때부터 백구(장제스 군 통치구역)에서 빼앗아 온 신문을 보고 국내외 정세를 파악했다. 마오가 신문을 뒤적이다가 창사 ‘민궈르바오’에 실린 깜짝 놀랄 만한 기사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공산당 주요범죄자 마오쩌둥의 처 양카이후이 어제 사형’ 표제의 기사였다.

마오는 기사를 보는 순간 현기증으로 비틀했고 허쯔전이 화급히 부축했다. 마오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대성통곡했다. 허쯔전은 영문몰라 얼떨떨해하다 신문을 읽고 모든 사실을 알았다. 큰 눈망울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오는 울음을 그친 뒤 허쯔전에게 부의금을 준비시키는 한편, 처가에 보내는 편지를 썼다. 양카이후이 살아생전에 허쯔전과 부부의 연을 맺은 마오는 이 편지에서 ‘카이후이의 죽음은 백번을 죽더라도 속죄를 할 수 없다(開慧之死, 百身莫贖)’고 썼다.

양카이후이의 어머니와 오빠는 마오가 보낸 부의로 양카이후이의 뫼를 만들고 마오의 편지를 묏터에 받쳤다. 저우언라이는 이때 소련에서 상하이로 돌아왔는데, 그는 장제스 쪽에서 마오의 아이들을 해칠까봐 지하당에 밀명을 띄워 상하이로 데려와 보살폈다. 막내 안룽(岸龍)은 요절했고, 안칭(岸靑)은 옮겨 다니다가 뇌부상을 당했다. 중공중앙은 마오의 큰 아들 안잉과 안칭을 소련에 보내 국제보육원에서 양육하고 가르치도록 했다. 항일전쟁이 끝난 뒤 이들 형제는 옌안에 돌아와 아버지 마오와 상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