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교 학창시절에
예언의 신을 많이도 읽었다.
저녁에 공부하기 전에 한시간씩,
안식일에는 돼지고기 섭취라는
낮잠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읽었다.
(물론 돼지고기를 피해서 예언의 신을 집어 들었지만 결국 돼지고기 섭취한 날도 많았다)
감동도 많이 받고
사명감도 많이 느끼게 되었다.
대부분의 예언의 신을
이 시기에 읽었다.
그런데 이렇게 예언의 신을 많이 읽게 된 계기는
스다라면 누구나 그렇듯
'다른 책'들을 멀리하게 하는
우리들의 교육 탓이 컸다고 생각한다.
모 국어선생님은 '음탕한 춘향전'이라 말씀하셨다.
그런데 어쩌나!, 시험에는 춘향전 지문이 나오는데.....
모 목사님은 소설의 우리의 지적 예민함을 퇴화시킨다 말씀하셨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예언의 신을 많이 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교육의 문제는
아이들을 죄책감을 많이 느끼게 하고 애늙은이로 만든다는 것이다.
티비에 나오는 들국화, 서태지, 소녀시대를 보면서
엉덩이 한번 들썩이지 못하는 그런 아이들로 만든다는 것이다.
삼육대 후문에서 다른 과 친구들이랑 담배피고 술 마셨다해서
인생의 다 끝난 것처럼 생각하는 아이들을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을 좀 놓아주자.
건강하고 밝게 자랄 수 있도록.
열심히 소설 읽으라고 했으면 좋겠다.
양서를 구분할 정도의 상식은
우리 아이들이 갖추고 있다.
아이들에게 쓸데없는 책이라고 말하는
풍토가 개선이 되었으면 좋겠다.
소설을 많이 읽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더 큰 해악인가?
예언의 신을 많이 읽어서 죄책감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더 큰 해악인가?
죄송하지만
내가 대쟁투를 다 읽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잘 아느냐고요?
잘 아는 게 아니고 아는 척 하는 겁니다
제2권에 가서는 질려서 그만 읽었습니다
그럼 다 읽지도 않고 왜 아는 척 하냐고요?
그것 다 읽고서 아는 척 하는 것 보다 나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 읽은 사람보다 내가 더 많이 안다고 자부하거든요................
물론 농담입니다
초기 문집을 읽었습니다
그 황홀한 꿈 이야기에
나도 밤마다 수없이 꾸는 그런 이야기를
예언이라 포장하는 기술에 놀랐습니다
하늘에 가서 예수를 만났다
그런데 어떤 이는 총천연색으로 꿈을 꾸고
재림도 구경하고 하늘에도 간다는데
그 예수는 자기집 벽에 붙은 그림이겠지요
아니면 교회에 걸린 엔더슨의 그림이거나 말입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예언의 신 그리 많이 읽지 않았습니다
왜냐고요?
꼭 에스겔서 읽는 느낌이어서 말입니다
그놈의 영감적인 글에 무슨 잔소리는 그리도 많은지
그렇게 믿지 않으면 하늘 못 간다면
대총회 화잇유산 위원회 직원들이나 갈 것 같습니다
재길헐
그 책 많이 읽어서 교인들의 공동체 생활에 보탬이 되는 일 얼마나 있던가요?
지지고 볶는 일 이외는 없습니다
두들기는 자료로만 존재하던걸요
그리고 꼭 자기가 읽고 해석하는 것만 탈무드라 우기지요
참 지=랄 같은 짓 하면서 평생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 할머니 인간적으로 존경하지만
선지자로 존경하는 것 아닙니다
시대의 선지자로 여깁니다
이런 글 적으면 또 난리 치겠지요
그런데 이건 내 맘이거든요
어디 재미있는 이야기 적어 놓은 홈은 없나 하고
두들겨도 실력이 모자라서 못 구합니다
ㅋㅋㅋ
죄책감은 느끼기에 달린 것 아닌가요?
예수 안에 살면서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아직도 예수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 아닐까요?
참 피곤하게 하는 종교입니다
우리 교단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