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도 언제나 빛이 스며드는 새벽과 그 빛이 빠져나가는 저녁의
교차속에서 시작과 끝을 반복하듯이 살아있는 모든것에서 우리는
끝이 났다가 다시 시작하는 반복의 리듬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내어쉬고 들이쉬는 숨도 그러하고 살아있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심장의 박동도 그러하다.
거대한 바다의 살아있음도 밀물과 썰물이 갖는 리듬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인간의 역사도 전쟁와 평화라는 리듬을 가졌다고
보고 그 유명한 소설을 소개했다.
계절이 숨쉬는 방법도 비슷한 것인지 봄과 가을은 생명을 내어 뿜는
계절의 시작이고 가을과 겨울은 그 생명을 거두어 들이는 마침의
계절이다. 그 마침의 계절에 역력하게 나타나는 두가지 현상이
색갈의 사라짐이고 또 온도가 내려가는 현상이다. 하루의 마침이
가장 크게 나타나는 시간을 칠흑같은 어둠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이렇듯이 모든 살아있는것 그리고 그 생명을 유지해 주는 땅의 리듬도
그러하다고 일러준 전도서의 리듬이 생각이 난다.
그러나 이런 하루의 마침이 불분명한곳이 앵크리지같은 북극가까이의
현상이고 또한 반면에 계절의 마침도 불분명한곳이 남쪽에 있는 열대의 나라들이다.
청년시절에 잠깐 살았던 남가주에선 봄이 시간적으로 느껴질 뿐
계절적으로 느끼긴 참 어려웠다. 크리스마스는 눈과 썰매가 등장하는
겨울이 제격인데 남쪽에선 그런맛을 느낄 수 없는 아쉬운 점이 있다.
추운곳일수록 사업이 더 쉽다라고 알려진 내 직업의 속성때문에 이삼십년전에
이사와서 그런 추운지역만 떠돌다가 말년에 드디어 가장 춥기로 소문난
시카고에 와서 거지반 십년째 살고 있다. 처음 몇년은 이사온것을 얼마나 후회하고
살았는지 모른다.
시카고의 아주 추운 겨울에 차를 운전하기 위해서 거라지 (garage) 의 문을 열면 마치
냉동실에 안치되어있던 뼈만 앙상한 노파가 바지 가랭이 사이로 발목을 잡는듯한
냉하고 어시시한 날들이 있기도 하다.
그러나 한번씩 겨울에 아들들을 만나기 위해서 서부의 따뜻한 지역으로 날아가서
배행기에서 내리면 마치 천국에나 온것같은 온화함을 뼈속같이 깊게 느낄 수 있다.
그런 의미로 보면 열대의 리듬은 강력한것이 아니고 미온적이나 사계절이 분명한 곳의
리듬은 참으로 강력하다. 발목을 잡는 냉동실의 그 노파의 앙상한 손아귀도 녹아서
그 자리에 연두색 그리고 노랑의 색갈이 피어날때는 언제나 황홀하고 눈부신 날이 된다.
그래서 겨울의 꿈속에는 벌써 연두색 찬란하고 철쭉이 요란하게 피는 이른봄의 꿈과 기대가
철쭉이상의 색갈로 꿈틀거리게 된다.
마치 공중에서 떨어지는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서 더 놓은곳으로 올라가야 하는 스키와
번지점프같이 봄의 황홀하고 찬란한 기분을 만끽하기 원한다면 이런 시카고의 겨울은
참으로 제격이다.
지금은 춘삼월 경칩도 지난 시간이다.
이미 다른곳에는 봄의 기운이 완연하지만 시카고는 아직 끄떡도 하지 않는다.
늘 그러하듯이 동장군의 꼬리와 봄기운이 엎치락 뒤치락 몇번을 더 반복한 후에 그런날이 올 것이다.
지금 시카고의 사람들은 겨울의 정상에서 봄을 향하여 내리막을 달릴 스키를 타기 위하여
리프트같은 꿈을 꾸며 조용히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지난겨울의 강추위속에서 내게 물었다.
얼마나 추우냐고.
나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이보다 더 추운 겨울이 앞으로 내게 주어진 예상하는 수명의 겨울보다 더 많이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 추위를 행복하게 맞을 수 있다고.
봄을 가장 황홀하게 느낄 수 있는 이 시카고의 겨울이여!
나는 그런 겨울이 백개나 남아있다고 해도 결코 추위에 떨지 않을 것이다.
눈이 부시는 봄날을 기다리며 버펄로 그로브에 사는 시카고의 한 시민이...
자연과 어울리는 삶의 모습이 멋져뵈유
추울떈 추운맛에
아플때 아파하면서 사는게 순리인데
조금만 견디면 따뜻한 본날은 온다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