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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고 정동심 목사 회고록 연재)#8

 

(북간도의 수도격인 용정으로 전근을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1925 8월경이었다. 연재 #7의 끝 부분입니다.)

 

 

3. 용정 선교- 1

 

산설고 물선 삼도구였지만 2년여를 지나며 정들은 이곳을

떠나게 되니 우리 모두의 섭섭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용정은 수도나 다름없는 곳이지만 우리 교인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보다는 오랫동안 전도를 했어도

교인을 한 명도 얻어내지 못한 곳이 용정이었다.

그나마 용정서 정석영 씨라는 분이 우리 교리를 조금 배워서

알고 있었는데, 이분을 통해 교회를 시작하려고

조선 돈 40원을 맡겨 두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분이 사정이 급했는지 그 돈을 사용을 하고는

내어놓을 수가 없게 되었다. 새로 부임하는 나에게

그분이 빚진 돈 대신에 그분의 집을 차압하여 들어가

살라는 것이었다. 우리교인이 한 명도 없는 용정에서

일을 시작하는 것도 힘든데, 교리를 공부하던

유일한 사람의 집을 차압하는 것으로 일을 시작하라니

너무 마음이 아파 재고해 주기를 간청하였으나 이미

결정이 된 일이라 하여 할 수없이 1925 9월경에

정석영 씨가 있던 집을 차압하는 것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용정으로 전근하던 날이 화요일이었는데, 우리 젊은 부부는

이 마음 아픈 일 때문에 눈물로 기도하며 예배드리던 일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이 집에서 거의 2년을 살았다.

용정은 정말 전도하기가 힘든 지역이었다.

간도에는 이미 공산주의 사상이 들어오면서

반기독교 사상이 충만해서 복음을 들으려 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기도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음을 바꾸어 우선 사람들을 먼저 사귀자는 생각에

다른 교파 사람들이나 다른 기독교 단체들을 심방해 보았다.

그래도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처럼 간도에서도 안식일 교인이라면

아예 상대조차 하지 않으려 해서 사귀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그러니 반기독교 사상이 가득 찬 일반 단체들이야

사귀기가 더욱 힘들었다. 더구나 사회단체 사람들을 방문하면

“아직 청년인데 그래 해먹을 것이 없어서 전도사라고 하는

간판을 가지고 서울서 여기까지 나다니는 거요?”하고

빈정거릴 때는 정말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정하고 듣던지 안 듣던지 겸손히

우리 도리를 계속 증거 하자, 차츰 감동이 되었는지

비방하는 말들이 줄어들고, “안식일교회의 도리도

한번 알아보아야 되겠다.”라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힘이 생겨서 간도 선교지 본부가 있는 투도구에 가서

현재 상황들을 보고하고 우리 진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를 요청 드리곤 했다.

 

 

그러나 사단은 가만있지를 않고 방해를 했다.

기도요청을 위해 제출한 나의 보고(報告)를 간도 지방의 교우들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나와 이 곳 교회 지도자들을 비교하여

정 전도사는 이곳 지도자들 중에 아무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다느니 하면서 지도자들을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형편을 감지(感知)하고는 아주 신중한 태도를 가지고

지도하시는 분과 조금이라도 마찰이 안 생기도록 힘쓰며,

심지어는 투도구 방문도 삼갔다.

그러나 한번 시작된 소문은 계속되어 우리를 괴롭혔다.

나는 용정의 선교를 위해서 지도자들의 도움과 기도가

절실히 필요 되었지만 이러한 문제의 확산을 피하가 위해서는

보고조차 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나의 자녀들은,

교회 일에 있어서, 어떤 지도자는 행정에, 어떤 분은 전도에,

어떤 분은 가르치는 일에 남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기억하고,

지도자들을 비교하여 비난하지 말고 오히려 좋은 점들과

뛰어난 점들을 찾아 칭찬하고

활용하는 지혜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지도자들도 인간인지라 이런 소문을

듣기가 거북하였던지 교회의 장로이던 이준래 씨에게

“아무쪼록 교인들로 하여금 정전도사가 지도자들보다 낫다고 하는

그런 소문과 비난을 퍼뜨리지 않도록 하라”고 부탁을 하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준래 장로는 성격이 급하신 분이라 일언지하에

“목사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간도에 들어오는 전도사가

당신 네 보다 나은 사람들이 오면 안 된단 말씀입니까?”하면서

오히려 면박을 드린 모양이었다. 그래 놓고는 이러한 이야기를

이 장로께서 직접 나에게 말하여 주는데 그때 거북했던 심정은

표현하기가 힘이 들었다. 나는 이 장로님께

“나는 용정지역에만 몰두하여 열심히 전도하다보니

조금씩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신 것이지 결코 다른

지도자들보다 잘하는 것이 아니니 제발 교인들이 사역자를

비교하여 비난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힘써 달라”고 진심으로 부탁했다.

뿐만 아니라 “사역자 사이에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사단의 방해를 받아 전도사업에 타격을 받게 되니

교인들은 기도하는 일 외에는 다른 일로 의논을 해가며

문제를 삼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고 재삼 부탁 드렸다.

 

 

그러나 이 일이 있고 나서, 다른 지역을 방문 다니는 일이나,

다른 곳에서 개최되는 전도 집회에 다른 곳의 사역자를 불러오면

불러왔지 나는 언제나 제외되었다. 물론 용정 전도사업을 위한 도움도

거의 얻을 수가 없었다. 교인들의 엉뚱한 행동과 말로 인해서 생긴

오해 때문에 모든 일에서 나를 제외시키는 지도자들의 태도를

이해는 하면서도 매우 마음이 상했다. 용기가 많이 꺾였지만

우리부부는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눈물로 기도드리면서

더욱 조심해서 나아갔다. 아무리 조심을 해도 이런 일이

생길 수가 있거늘 조심을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힘든 일들이

더 많이 생기겠는가?

간도지방의 수도격인 용정의 선교사업은 이렇게 엉뚱한 방향에서

사단의 방해를 받게 된 것이었다.

 

 

1926년 초 여름이다. 투도구에 계신 최태현 목사님께서

의논하실 일이 있다 하시며 부르시기에 갔다.

최 목사님은 내가 간도 지역에서 처음 사역했던

삼도구 예배소에 나오게 된 성씨라는 분에 관한 일을 설명하셨다.

삼도구 예배소에 성씨 가족이 점점 많이 나와 지금은 예배소의 주요 직분도

성씨 가족이 대부분 맡아 일하고 있기에 예배소가 성씨가족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성씨의 아들과

이 지방의 유지이며 재력가인 영씨라는 분의 무남독녀가

연애를 하게 되었는데 두 사람 다 삼명학교 졸업생이었다.

“남녀가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겠는가?”마는 당시에는

상당히 나이가 많은 남녀가 연애를 해도 큰 문제로 취급을 했는데

성군과 영양은 나이도 별로 많지 않았으니 소문도 크게 나고 그만

이 지역에서 큰 문제로 부각(浮刻)이 되었다.

더구나 반기독교 사상이 만연한 간도지역에서 두 사람이 다

안식일교회 학교인 삼명학교 출신이라 하여 교회의 이름이

연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더구나 처녀의 아버지는 이 지역의 재력가요, 세력가로서

교회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 처녀의 아버지의 요구가 있었는지는 모르나

최 목사님은 우리 교회의 일이 이 지역 재력가요, 시력가인

영씨의 심한 방해를 받을까 걱정이 되셨는지 삼도구에 가서

성군의 부친을 교회의 모든 직분에서 해임하고 책벌(責罰)하에

있게 하였다. 그러자 성선생은 문제를 일으킨 아들의 아버지로써

책벌은 달게 받기는 하되 이제부터 교회에는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을 해 버린 것이었다.

 

 

교회발전에 지장이 될까하여 고심한 끝에 부득이 교회직분을

해임하고 책벌 하에 두었는데 그 문제에 마음이 상하였는지

본인은 물론 그의 많은 가족이 전부 교회출석을 거부하게 되니

잘하려고 한 일이 오히려 난관에 봉착하게 되어 버리고

교회도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교회도 출석하지 않는 성씨와 대화의 길까지 막힌 상태에서

최 목사님은 나른 불러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라고 물으시니

나도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었다. 최 목사님은 나에게

“그 지역에 살면서 성씨와 가까이 지내었을 터이니

그 분을 찾아가 설득해 보라”고 말씀 하셨다.

이미 벌어진 일이니 난처했지만, 젊은 나를 믿고 보내시는

최 목사님의 말씀이 감사하기도 하고 또 윗사람의 말씀에 항상

순종하자는 것이 나의 결심이었기에 용정서 170리 나 되는

먼 길을 가기로 했다.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이 길은

언제 화적을 만날지 모르는 위험한 길이라 화요일 일찍

기도드리는 마음으로 찾아갔다. 상황은 어색했지만 한 지역에서

사이좋게 살던 사이라 기쁘게 만나, 성선생에게 최 목사님도

고심한 끝에 내린 힘든 결정이었음을 설명 드리고,

기도와 사랑으로 성경 말씀을 펴서 간곡히 권면 했더니

이날 저녁예배에 성선생의 모든 가족이 다 출석하였다.

며칠을 지나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경말씀으로 권면 드렸더니

안식일예배에도 성선생과 그의 온 가족이 다 출석을 했다.

온 가족들이 마음을 돌이켜서 지도자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모두 이렇게 교회에 남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 생각된다.

 

 

그런데 1926 7월경에 일이 생겼다.

성선생의 가족이 교회에는 나왔지만 이 지역 세력가인 영씨가 성군의

연애문제를 받아드리기는커녕 더욱 심하게 반대를 하였다.

심한 반대에 부딪친 두 남녀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두만강을 건너 조선 땅으로 도피해 버렸다.

그러자 처녀의 아버지 영씨는 화가 날대로 나서 성군의 아버지 성선생을

감금해 버린 것이었다. 당시 만주에서는 세력만 있으면 자기가

원한을 품은 자를 감금하는 일이 보통으로 있었다.

일종의 사형(私刑)이었고 법()도 이런 일에 눈을 감곤 했었다.

그런데 이 처녀의 아버지 영씨는 간도 화룡현 현장(弦長)이며

또 화룡현에 있는 “명신사”의 사장이니 재력가이며 세력가이었으니

이 사람들이 성씨를 감금하는 것은 별로 큰일도 아니었다.

일이 이렇게 되니 성씨 가족은 앞으로의 일이 두려워서

산지사방(散之四方)하는 난처한 형편에 이르렀다.

 

 

형편이 이렇게 되자 성선생의 부인이 나를 찾아와서 자기 집을

처분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이곳 현장(弦長)에게

밉게 보인 집을 처분하러 다시 삼도구로 간다는 것은

호랑이의 굴에 들어가는 일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분에게 맡겨 보라고 하기도 난처한 일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돌봐주기로 승낙을 하고 또 기도드리면서

170리나 되는 삼도구를 다시 찾아가기는 했지만

어느 누구와 맘 놓고 의논할 수도 없었다.

또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드리고 나니 마침

이곳에 와서 살고 있는 기명이라는 나의 고향친구가 생각나

그 친구를 찾아가 성선생의 딱함을 설명하고 여러 번 부탁을 하자

자기가 그 집을 사주겠다고 하며 가옥대금도 미루지 않고

그 이튿날로 주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을 돌보려고 힘쓰는 때에

길을 열어 주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보고, 다시 믿고, 감사했다.

그 집 대금을 받아들며 기뻐하던 그 가족들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1926 3월초에 있던 일이다.

투도구 교회에서 연초 사경회를 열었는데 강사로 초빙되어

사경회를 인도하는데 들리는 소식에 용정에 있는 몇 장로교회가

합동으로 당시에 전국적으로 유명하다는 김익두 목사를 초청하여

장로교 중앙교회에서 대 사경회를 열었는데 용정내 사회단체들이

크게 반발하여 방해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아직 젊은 나이라

흥미가 많아 투도구 사경회를 마치자마자 용정으로 와서

장로교 중앙교회를 찾아갔다.

무려 1000여명이 참석했는데 앞줄에는 무수한 환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강단에는 김익두 목사를 보호한다고

중국순경들이 서있는데 그것도 칼을 빼어들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장로교회 책임자들이 너무도 지혜 없이 무모하게 일을

진행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가 폭행을 당할까봐

검을 빼어든 경관을 강단 앞에 세우다니!

 

 

그 유명하다는 김 목사는 설교 중에 자기의 과거 일을 고백하며

어떤 기생집에 다니던 이야기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군중 속에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김 목사에게 퍼부으며

찬송가를 집어던지고 돌을 던져 그 좋은 등들을 깨버리는 등,

방해를 하며 난장판을 만들었다. 그러자 검을 빼어든 경관들이

주동자를 잡으려고 달려드는 바람에 앞에 병자들이

사람들에게 밟혀 뼈가 부러지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간 나는 여러 단체들을 방문했던 관계로 난동을 피운 사람들이

누구인지 대강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집회가 어수선하게 끝난 후에

찬송가를 찢던 사람, 기도를 방해한 사람들을 만나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나는 이 교회와는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한일은 너무 무질서하고 민족적으로도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만약 이런 집회가 좋지 않게 생각되거든 반종교 강연회를

열어서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옳지 않은가” 라고 말했다.

 

 

나는 비록 타 교파에서 하는 일이지만 이런 비합리적인 일들이

기독교 전체에 나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장로교회 책임자를 만나 “검을 빼어 든 경관을 강단에 세운 것은

비 신앙적이며 비난받을 일이라”했더니 그 이튿날부터 시정 되었다.

다음날 거리에는 반종교 대강연회가 있다는 광고가 크게 나붙었다.

그러나 경찰 당국에서 그 강연을 금지했고 장로교 대 사경회도

다소 질서가 잡혀 그럭저럭 끝났다.

다음날 장로교기관지 “기독신보”를 본즉, 이번 난동 중에

병자들이 밟혀 뼈가 부러지는 난리가 있었는데도, 수십 명의 병자가

회복되는 성공적인 사경회라 자찬하는 보도가 실렸다.

나는 기독신보 책임자를 찾아 “그런 허위보도를 하니 당신네

교회위신이 손상되는 것은 물론이고 반기독교 사상이 생기지 않겠는가?

했더니 “그 기사를 취소하는 정정 보도를 하겠다.”했다.

나는 아직은 젊은 기독교인 중 한 사람으로 의분에 차서

그리했던 것인데 다행히 타 교파교인인 내 말을 이해하고

고치는 태도를 보면서, 느낀 점도 많고 감사했다.

나는 이번 일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야지

순경의 칼이 아님을 배웠다.

 

 

용정으로 전근된 지 1년이 되어 오는데 교회는커녕 완전히 개종한

교우 한 명도 제대로 얻지를 못하니 마음만 답답했다.

여러 날을 생각한 후에 투도구로 최태현 목사님을 찾아갔다.

“목사님! 용정은 안식일 교인이라면 상종도 아니 하니

이제는 광고를 크게 내어 대 전도회를 개최해 보는 길이

최선인 듯 합니다. 오랜 기간 생각한 것이니 허락해 주십시오!

“정 전도사! 이곳 용정지역에는 안식일교회만 배척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기독교에 대한 반 기독운동이 심한 곳이니 소용없을 것이오!

“목사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 전도회를 해서

다른 교파 사람이라도 많이 모여야 우리교리를 알리지 않겠습니까?

한번 하도록 해 주십시오!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그러나 장로교회도 전도회를 하다가

사고가 날 뻔 하지 않았소? 큰일이 생길 수 있으니 고려합시다!

“목사님! 저를 생각해 주시는 것은 저도 압니다. 그러나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 않습니까?

“정 전도사! 만약 전도회를 시작했다가 무슨 사고라도 나면

누가 책임 질 수가 있겠소?

이 말씀은 나에게, 사고가 생길 수 있으니 대 전도회를 포기하라는

경험 많으신 분의 말씀이신데 이 때 내 나이 30전후로

피 끓는 시기인지라 다른 길이 보이지를 않았다.

“목사님!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책임을 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그런다고 말씀 드렸다. 다른 길이 없었다.

나를 말릴 길이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억지로 허락을 해 주셨다.

“그럼 정 전도사가 집회장소와, 중국, 일본 당국의

집회허가까지 책임지고 얻으시오!

젊은 전도사의 무모한 요청을 들어주신 것이 너무도 감사했다.

당시에 큰 건물도 없거니와 작은 건물도 기독교 행사를 위해

빌릴 수가 없어 대부분 장막 전도회를 주로 했다.

그 때부터 나는 장소와 경비를 위해 눈물로 기도드렸다.

얼마 후에 용정 중앙지역에 넓은 곳을 찾아내어

관리인을 만나보니 일본인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겸손하게 했더니

그 분은 “그렇게 공공을 위한 일을 계획하는데 무임으로 빌려주었으면

좋겠지만 지주가 무엇이라 할 듯하니 1개월 사용료로

4 50전을 내라”고했다. 그야말로 거저였다.

얼마나 감사한지 용기백배 되었다.

 

 

일본과 중국, 양 경찰 당국에 집회계(集會計)를 제출했더니

일본 측에서는 “요즘 민중의 사상이 반기독교 적으로 나가고 있으니

매우 조심하라!”는 조건으로 양해가 되고 중국 측에서는 장로교집회를

거론하며 전도회 기간동안 정복경관을 임석 시키겠다면 허락을 한다했다.

겸손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역설하여

결국 허락을 받았다. 불가능 해 보이던 일들이 해결됨을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하심을 감사했다.

장막은 대, , 소 세 가지 크기가 있는데 900명에서

1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대 천막을 가설했다.

이번 전도회에 최태현 목사를 위시하여, 청진의 전도사 정붕상 씨,

함북 길주의 전도사 정관신 씨, 간도주재 임시전도부인 최마르다 씨,

용정주재 전도사 정동심 제씨등이 활동하게 되었다.

정붕상, 정관신 두 분은 전도회 10여일 전부터 용정에 와서

천막 치는 일에 수고를 많이 했다.

천막 안에 임시 강단과 900여명이 앉을 의자를 만들었다.

 

 

1926 8, 전도회가 시작되었다.

집회 시작이 저녁 8시라고 광고를 했는데 한 시간 전인

7시경에 집회장소는 이미 초만원이 되었다. 그것도 여자나 노인은

거의 없고 청장년만 가득 들어앉았다.

나는 우리교회의 전도 집회에서 청장년만 이렇게 많이 모인 것은

이 전에는 물론 이 후에도 본 적이 없다.

나의 사회로 전도회는 시작이 되었고 첫날에

최태현 목사께서 “오늘의 기독교 현상” 이라는 문제로

전도강연을 시작하셨는데 시작한지 5분도 안되어

젊은이들이 일어나 야유를 하면서 좌석을 발로 밟아

부수는 것이 아닌가? 형편이 이렇게 되자 최 목사님은

설교를 아예 포기하시고는 사회자인 나를 돌아다보시는 것이었다.

이 순간 책임을 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가 느껴졌다.

 

 

장로교단에서 하던 전도회가 난장판이 될 때는 내가 사리판단이

되었는데 막상 내가 주장해서 하는 전도회가 이 지경이 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앞으로 나가 청중을 향해

“오늘 전도회는 이렇게 소란스러우니 이것으로 폐회한다.”고 선언했다.

최 목사님을 뵈올 면목도 없고 다른 전도사들은 보기도 민망했다.

그렇다고 하루 만에 전도회를 중단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더구나 최 목사님은 이튿날 설교는 나보고 하라고 하시니

정말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밤새 기도를 드리고 나는 당시에 예언에 관한 내용을 많이 다루기에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고 “세계의 역사와 예언” 이라는 문제로

설교를 시작했다. 역시 전날과 같이 설교를 시작하자

곧 야유가 일어나며 청년들이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찔했다.

 

 

바로 그때 무엇인가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간도에 있는 청년들이 처음 듣는 강연회에 와서는,

아무리 훌륭한 연사가 강연을 해도 그 연사를 시험해 보느라고

야유를 하며 발을 구르는 폐풍(弊風)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이

생각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청중의 야유나 발을 구르는 것을

불문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더 열을 내서 성심 성의껏 설교를 했다.

그러자 청중 중에서 “그놈 꽤 비위가 좋은 놈이네!”라고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나는 마치 청년들의 시험에

통과된 듯 용기가 나서 당시 신문에 실린 세계정세를 예를 들어가며

열심히 예언의 설교를 끝내가고 있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나기 전에 천막위로 돌들이 날라 왔다.

설교가 끝나자 내 뒤로 어떤 이가 와서 나의 옷자락을

잡아 다니며 자기 집으로 피신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단에서 내려가 몇몇 아는 청중에게 인사를 드렸는데

그 중에는 반기독교 운동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오히려 이 사람들이 내게 “참 수고 많이 했소!”라고 인사를 했다.

곧 나는 “자기 집으로 피신하라”고 하던 그 분의 집으로 갔다.

그 사람은 감리교에 다니는 분으로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한

김하선 선생이었는데 내 설교 자체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여

나를 자기 집으로 피신을 시키려 했던 것이다.

 

 

당시 용정에 있는 기독교 교인이나 지도자들 중에 건전한 자들은

“이 험악한 지방에서 전도회를 하는데 부디 좋은 결과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는 초 교파적인 귀하고도 감사한 일들이 있었는데,

이 분도 우리교단의 전도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분 중에

한 분이었다. 사실 일본의 탄압과 공산주의 이념으로 어려운 그때에,

생각이 있는 신앙인들은 교파를 초월해서 서로 도우려 애썼고

서로를 위해 기도했다. 이런 귀한 일들은 간과되고,

그 당시에 어려웠던 일들을 가지고 같은 교단 안에서

서로 헐뜯는 우를 범하고 있음은 마음 앞은 일이라 하겠다.

내가 이날 설교한 요지는 “세상 사람들이 자기의 힘과 지식으로

이상적 국가를 설계하려고 힘쓰지만 그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현재 여러분에게 가장 이상적인 국가로 알려진 소비에트를 보시오.

정말 이상적인 나라라면 왜 그 나라의 최고 지도자로 있는 도로츠키를

추방하는 추태를 보이고 있습니까?

성경에는 때가 이르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한 나라를

건설해 주시기 전에는 이 세상에서 도저히 아름다운 평화국가,

이상국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라고 역설했다.

처음에는 이 지방 관습대로 나를 시험해 보려고 방해를 했으나,

나중에는 사회주의 사상에 젖은 수백 명의 군중이 실제로

나의 설교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돌들을 던졌다는 사실을

김하선 선생이 알고 나를 피신시킨 것이었다.

 

 

군중들은 내가 피신한 김 선생의 집을 알아내어 찾아 와서는

“오늘 저녁에 강연한 놈 내 놓으라!”고 아우성을 쳤다.

집주인인 김씨는 ”그 손님은 내 집에 있소. 하지만 내 집에

온 손님이니 내놓지 못합니다!”라며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한참동안 ”그놈! 내 놓아라!, “못 내 놓는다!”하며 옥신각신 하더니

급기야는 ”당신이 그 놈을 안내어놓으면 당장 이집을 부순다!”는

위협까지 나왔다.

 

 

나는 더 험악하게 되면 안 되겠다고 생각되어 주인을 끌어들이고

“내가 바로 저녁에 전도 강연한 사람”이라고 밝혔다.

그랬더니 군중들은 “네가 전도하면 전도했지 왜 이상적인

사회주의 나라 소비에트를 비방하느냐?”라고 소리치는 것이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그놈 죽여라!”하는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공손히 말하기를 “여러분이 나의 말을

자세히 들은 후에 나를 죽이겠으면 죽이고 마음대로 하라!”고 했더니

군중이 약간 조용해 졌다. 그래서 나는 천천히, 명확하게 말을 했다.

“여러분! 나의 말을 자세히 들으시오. 저녁에 전도회를 시작할 때에

여러분에게 전도설교에 관해서 물을 말이 있거든 강사들이 이런

주소에 있으니 그리 오셔서 물으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오늘저녁 설교 중에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시사에 대한 것은

바로 여러분이 직접 만드신 요즘의 신문에 연일 보도되는 것을

그대로 말한 것 아닙니까? 제가 여러분이 쓰신 글을 이용한 것이

잘 못 한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신문이 잘못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군중이 더욱 잠잠해졌다. 나는 용기가 생겨 더 힘차게 말했다.

“금방 그놈 죽여라! 소리 치셨는데 여러분 냉정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눈물을 흘리며 두만강을 건너왔는데 여기서

동족이 동족을 죽이는 일이 있다면 누가 기뻐하겠습니까?

그러자 군중 속에서 “옳소! 그렇소!”하는 말도 터져 나왔다.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은 정동심이오! 나를 죽인다 해도 제 2,

3의 정동심이 나와서 이 기별을 전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군중 속에서 “돌아가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기회를 타서 나는 “여러분 중에 학생들도 많은데

안녕히 가셔서 공부하고 내일 다시 뵙시다.”했더니

“고만 갑시다!”하는 말이 들리더니 풀려서 돌아갔다.

당시 용정지역 내 조선인 사회는 대개가 중학생들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사회주의를 배경으로 하는 동우중학교,

유교를 배경으로 하는 대성중학교, 예수교선교회를 배경으로 하는

은진중학교, 한인예수교인이 경영하는 영신중학교,

일반인이 경영하는 광명중학교 등이 있었는데 그 중에

동흥중학교 학생들이 반 기독교운동의 선봉자(先鋒者)들이었다.

 

 

두 번이나 밤 집회에 난리를 겪고 나니, 이 전도회를

중학생들이 참석할 수 있는 밤에 계속한다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최태현 목사님께 의논을 드리니

최 목사님도 첫날 고생을 하신 지라 나의 의견을 들으신 후에는

시간변경신청을 하라 하셨다. 일단 문제가 생긴 후에 변경신청을 하면

이왕 주었던 허가까지도 취소되기가 십상이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변경신청을 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빌립보 4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의 말씀에서 용기를 얻곤 했다.

혼자서 중국과 일본경찰 당국을 찾아갔다.

중국경찰에 가서는 처음에 사고를 대비하여

경관을 임석(臨席)하게 한다는 것을 사양했던 차라

다소 미안하고 어색했지만 시간변경의 허락을 받았다.

일본경찰은 우리가 시간을 변경하지 않고 계속 밀고 나가다가

셋째날 밤에도 무리한 난동이 생겼다면 지난 이틀 동안

소란을 피운 사람들까지 다 체포하려던 차에 이렇게

시간 변경을 하니 참 잘한 일이라 하며 허락해 주었다.

 

 

전도회 시간을 낮으로 변경하니 참석하는 학생들이 없어서

조용했다. 비록 낮 시간으로 시간을 변경하여 집회를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매일 삼사백 명이 참석해서 성황을 이루었다.

전도회가 중반에 들어서면서 장, 감리교인, 천주교인

및 성결교인등도 많이 참석해서 우리집회를 위하여

격려의 말과 기도를 해 주다가 우리진리에 공감하여

십여 명 가량이 개종을 했다. 그 중에 용정에서 동북쪽으로

120리가량 떨어진 “훈출라자”라는 곳에 사는

김한웅 씨라는 분이 참석하여 개종한 후에 자기 집으로 돌아가

우리 진리를 전한 결과 약 70여명의 교인이 우리교회로

개종을 하여 교회가 생기는 아름다운 결과를 보았다.

용정 장막전도회를 통하여 사람의 생각으로는

어려워 보이는 일도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일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또 다시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전도회를 끝내고 방문하는 일로 매우 바빴다.

 

 

한 금요일에는 우리교회 전도사로 다년간 수고하다가 사직하고

만주에 오신 김성재 씨가 방문 와서 “정 선생 얼굴이 역시

환 하구만!”하고 말을 하기에 “그것이 무슨 말씀이냐”고 물은즉

“자기가 시내 어떤 잡화상에 갔더니 그 주인이 내일 안식일에

우리 예배당에 오겠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김성재 씨는 만주 땅에서 우리교회로 한 사람 인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기에 그런 말을 듣고는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시면서 나에게 말씀을 전해 주신 것이다.

그 이튿날 안식일에 과연 그 잡화상 주인이 일찍 우리 예배당을

찾아 왔는데 얼마나 기쁘고 흥분되었던지

아직도 말로 표현하기가 힘 든다.

우리는 기쁨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 분은 감리교인으로

당시 훌륭한 애국자이신 남궁억 선생의 지도를 받은 청년으로

사리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잡화상을 한다면 매우 바쁘실 텐데 이렇게

토요일에 저희교회를 나오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감리교회 교인이랍니다.

“아! 그랬군요. 그런데 이렇게 나오시면 감리교 목사님도

많이 말리셨을 것 같은데...

“아. 사실은 당신 교회의 전도회를 참석해 보고

예언에 관심이 생겨서 우리 교회 목사님에게

묵시록 공부 좀 하자고 하니까 묵시록은

안식교에서 잘 가르친다고 하셔서 이렇게 나왔답니다.

참 정직한 감리교 목사님도 계시는 구나 생각되었다.

“그러시면 저하고 묵시록 공부를 하셔도 되겠습니까?

“아. 물론이지요. 우리 목사님과도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토요일에 여길 나와야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 왔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라니요?

“만일 묵시록 공부를 하다가 안식일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나는 다시는 안 올 것입니다”

“아. 약속하지요. 그럼 언제부터 공부 시작하시겠습니까?

“내일부터 매 일요일 오후마다 시작합시다.

그 후 매 일요일 오후에 묵시록을 공부하였다.

묵시록 2장까지 공부할 때는 내가 시작기도를 드렸는데,

3장을 끝내는 날은 그 분의 안색이 아주 딴 빛이 나기에

그분에게 기도를 드리라고 했다. 그러자 그분은

얼마나 감동적으로 울면서 기도를 드리는지 우리 두 사람은

한참동안 함께 울었다. 정말 안식일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해 준 것이 없이 이 분은 이날 우리 교회로 개종하였고

일요일에 감리교회 나가는 것을 중단했다.

 

 

그 다음 안식일, "이분이 다니던 교회에서 틀림없이

방문 왔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오후에 그분 댁을 심방 하니

정말 감리교회 목사 두 분과 전도부인이 와 있었다.

이 세 분은 개종한 이 교인에게 안식일교회를 다니지 말라고

열심히 권면 하고 있는데 내가 들어섰다.

감리교 목사는 나에게 "왜 남의 교인을 도적질해 갔느냐"

따지고 들었다. 나는 논쟁도 피할 겸 간단한 대답을 했다.

“도적질을 했다니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분이 무슨 보리자루나 호박덩어리입니까?

이분이 도적질 당해 끌려 왔다 하시면 이분의 인권을

너무 무시하시는 말씀이십니다. 우리는 목사로써 성경을 가지고

참된 진리를 전해서 이분들이 선택하시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하고

말을 했더니 그 세분은 대답대신 "그만 가자!"하고 떠났다.

이 분이 개종을 했다 하지만 적당한 시간에 뒤처리를 위해

방문을 하지 않았다면 일이 다르게 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때 개종하신 분이 김완식 선생이신데 정말 안식일에 관하여

말 한마디 아니하고 묵시록만을 공부하여 진리를 깨닫고 개종하였다.

이 분은 이후에 문서전도로 활동하다가 우리 신학을 전공한 후에

훌륭한 사역자로 활동하다가 목사가 되어 일하셨다. 이 분은 내가

남선 대회장이 된 후에 다시 극적으로 만나서 함께 일하게 되었다.

 

*용정 선교 제 2부는 다음에 계속 됩니다.

 

 

 

  • ?
    명지원 2012.02.14 19:59

    신자들을 이끄는 데 중요한 원리 몇 개를 발견하였습니다. 정동심 목사님, ‘개척자의 신앙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말에 위험과 능력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장막전도회를 읽으면서 화잇 부인이 신자들을 찾아 미 전국을 여행하면서 이끄시던 장막집회가 생각납니다.

     

    애국지사 남궁억 선생의 지도를 받은 학생들은 역시 다르군요. 그분이 나중에 목사님이 되셨다니, 그 역사가 얼마가 감사한지요.

     

    저는 글을 읽으면서 정동심 목사님의 마음의 길을 따라 가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우리 교회의 역사가 새롭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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