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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갈길 다가도록(고 정동심목사 회고록 연재)#10

 

내 아내가 나를 찾아온 것은 병문안을 위한 사적인 일인데 그것을 공금에서

받는다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사양을 했다. #9의 끝부분)


 

4. “재간도 조선인 단체 협의회”


 

1927년 8월경의 일이다.

용정 시내 유력한 인사들의 이름으로 우리교회에 공문이 왔다.

내용은 용정에서 “제2의 허시모 사건”이 일어났는데, 용정에 있는

어떤 조선인 단체든지 모두 두 명의 대표자를 선출하여

지정한 장소로 나오라고 했다. 당시의 용정에 깔린 사상과 분위기로는

이런 모임에 불참하고서 포교한다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우리교회도 김준익 형제와 내가 대표로 참석했다.


 

사건의 설명은 이랬다.

어떤 일본여자가 자기 집 토마토 밭에 들어온 조선인소녀를

붙잡으려다가 놓치게 되자 개를 풀어 그 소녀를 붙잡아

하루 종일 자기 집 기둥에 묶어 체벌(體罰)한 것이었다.

이날 모임의 사회자는 흥분이 되어 “나이 어린 여자아이가

일본인에게 사형(私刑)을 당한 것인데 이런 학대를 받고도

가만 두면 만주에 와 있는 100만 동포의 생명을 어떻게

유지하겠느냐” 하며 호소했다. 이때 100여명의 단체 대표자가

모였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도 어떤 단체협의회를 만들어

동포 중에 어려운 일이 일어날 때마다 조직을 통하여 해결하자”는

의견에 일치를 보아 그 자리에서 “재간도 조선인단체협의회”라는

것을 조직하고 집행위원 15명 정도를 선출하였는데 곤란하게도

내가 그 집행 위원 중 하나로 선출이 되어 버렸다.

하도 입장이 곤란하여 사퇴를 하려고 하는데 사퇴는커녕

이번에는 나를 집행위원장으로 선출을 하는 것이 아닌가?


 

김준익 형제는 내가 위원장이 되면 우리교회 전도에 도움이

될 것이라 하며 오히려 수락하도록 권했다. 나는 그 분이

정치에 관여하고 싶은 핑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어나서 “나는 제칠일안식일 예수재림교회 전도사로서

간도에 포교하러 왔지 우리는 정치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면서

극구 사양했다. 그러자 모든 위원들은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포교도 좋지만 동포의 어려움을 모른 체 하는 포교는

동포를 배반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라고 하며 끝내

나의 사의를 받아주지 않았다. 흥분되어 있는 분위기라

일단 수락했다가 속한 기한 내에 사직하기로 마음에 정하고 수락했다.

집행위원을 구성하고는 매월 1회씩 집행위원회를 모이는데

제1회는 집행위원장의 집에서 모인다고 결정이 났다.

점점 사단의 올무에 빠진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좌우간

제1회 집행위원회는 내 집에서 진행되었다. 막상 모이고 보니

집행위원 15명 외에도 방청인, 신문기자, 경관 등 수 십 명이 되었다.

 

 

나는 회의벽두(劈頭)에 내가 다니는 안식일교회는

음주, 흡연을 아니 하니 이점을 깊이 양해하시고

금주, 금연해 주시면 좋겠다고 했더니 다행히 끝까지

술을 달라거나 담배 피우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이 분들을 대접하기 위해 당시에 매우 귀한

잦을 대두 한 말이나 마련하여 내어놓았더니 문자 그대로

한 알도 남기지 않고 다 까먹고 헤어졌다. 이일 후로는

간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내가 안식일교회의 전도사인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안식일교회는 술이나 담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모든 일을 원칙에 서서 해 나가면

항상 원칙이 승리하는 것을 보고 감사했다.


 

제 1회 집행위원회를 열기 직전, 나는 우리 교회가 아닌 다른 곳에

사무실을 열고 “재간도 조선인 단체협의회”라는 간판을 달았다.

이 조직이 시작 된지 2개월도 안되어 가입한 단체가 400여 개나 되었고

회원수가 수만 명이나 되는 당시 최고의 거대한 조직이 되었다.

나는 당시 조선인들의 분위기로 보아, 이 거대한 조직체의 힘을 이용하여

불순 세력이 틀림없이 엄청난 일들을 도모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 이 조직체가 그렇게 정치적인 조직체가 되면 내 자신은 물론

내가 사역하고 있는 우리교단에 어떤 영향이 미칠 것인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이때의 이 생각은 분명히 성령이 내게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느껴졌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서 곧 집행위원장 사임서 두 장을 만들어

한 장은 “재간도 조선인단체 협의회 집행위원회”에 제출하고

한 장은 내가 보관해 두었다.

사표를 낸 후 나는 지방교회에 심방을 떠나서 2-3주 후에 집에 돌아오니

아무 영문도 모르는 아내는 “당신은 복음사업이나 성의껏 하지,

무슨 딴 일을 했기에 그 동안에 간도 총영사관(일본영사관)의 형사가

몇 번이나 당신을 찾아오게 하느냐?”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집사람과 잠깐 몇 마디 하는 사이에

어디에 잠복을 하고 있었는지 일본영사관 형사가 찾아 들어왔다.

그런데 그 형사는 내 고향에서 가까운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거장리 사람으로 안면이 있던 박승호라는 사람인데 지금,

형사가 되어 나를 찾아 온 것이다.

”정 선생은 간도에 전도사로 온 줄로 알았는데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오? 재간도 조선인단체협의회에 대한 정보가 들어와

간사와 기타 관계자들을 검거하는 중에 모든 서류를 압수해보니

정 선생이 집행위원장인 것을 알았소! 이미 체포명령이 내렸지만

전도사이기 때문에 대접상 우선 영사관으로 함께 가서

당신의 의견을 진술하도록 하시오!”

말이 영사관이지 우선 영창(감옥)행 임을 누구라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침착하게 말했다.

“간도사회라는 것이 그렇게 질서 있게 정돈된 사회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협회를 통해 무슨 큰일이 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차피 영사관에 가야하니 할 말이 있으면

영사관에 들어가서 하도록 합시다.”

틀림없는 감옥행이었다. 그 순간 내가 사임서를 작성하여

이미 제출 한 것이 생각이 났다.

“이것 보십시오. 이것이 제가 집행위원장직을 이미 사직한 사임서입니다.

나는 안식일교회 전도사로 집행위원장 직분을 이행할 수 없기에

이미 사임서를 제출했습니다. 아마 정리가 안 된듯한데

압수한 서류를 보시면 분명 이것과 같은 사임서가 있을 것이니

그것을 참작하여 선처해 주십시오.”

“알겠소! 내가 최선을 다해 볼 것이지만 이와 같은 사직서가

협회 서류들 중에 없다면 그때는 나도 어쩔 수가 없음을 명심하시오!”

 

 

며칠 후 그 형사는 다시 나를 찾아와서 “서류들 중에서

정 전도사의 사직서를 찾아내어 일본 영사관에 극구 변명하여

일을 무사히 넘기게 해 주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 “정 선생! 사직서를 못 찾았다면 세상없어도

체포될 뻔했소!”라고 말해주었다.

박 형사는 “재간도 조선인협의회원 중에서 체포된 이가

무려 400명이 넘었고 아직도 체포 중이오. 그리고 모두

제3공산당원이라는 명목으로 체포되고 있소”라고 설명해 주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미리 지혜 주셨음을 감사했다.

이 사건을 계속 주시해 보니 700여명 이상이 체포되었고

그 중에서 중형에 처할 사람을 추린 것이 90여명인데

모두 서대문형무소로 넘겨졌고, 어떤 사람은 취조기간이

10여 년이 걸렸으므로 고문 중에 죽은 사람,

또는 그 사이에 병사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내가 1941년 서대문 형무소에 있을 때에도

간도 제 3 공산당원 중 12명이 사형을 당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나도

사형을 당했을 것은 뻔한 노릇이었다.

나를 이렇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나를 살려낸 그 “재간도 조선인 단체협의회 위원장사임서” 한 통은

해방 후까지 가지고 있다가 분실되었다.


 

1928년경이다.

영전되어 가신 최태현 목사님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간도지역에 본부가 있는 “참 예수교회”에 관하여 알아보고

보고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최 목사님이 간도에 계실 때

나는 “참 예수교”에 관한 말을 듣고 그 책임자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이제 최 목사님의 부탁을 가급적 속히 알아보기로 하고

그 교회책임자가 있는 간도내의 중국인 수도격인

“국자가”라는 곳으로 달려갔다. 북간도 “참 예수교”의 책임자는

“백득은”이라는 중국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동만에 와서

참 예수교를 선교하는 중 상당한 핍박을 받다가 안식일교회가

자기의 교회처럼 토요일에 안식일을 지키는 등, 같은 점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하며 나에게 매우 호의적이었다.

백득은 씨를 그 교회에서 장로라고 부르고 있기에 나도

그분을 장로라고 불러 주었다. 백 장로의 말에 의하면

“참 예수교” 본부는 중국 천진에 있고 교주는 우바울 이라는

중국 사람인데 본래 양주업을 하던 사람으로 묵시를 받고는

양주업을 전폐하고 전도사업에 전념한다고 했다.

 

 

“참 예수교”에서 전하는 교리는 우리 교회교리와 흡사한 것이

많았으나 다른 것들은 신자들이 모여서 종종 방언을 하고 있었다.

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운명하실 때는 머리를

앞으로 숙이셨으니 그 본을 따라 침례 받는 자는

앞으로 머리를 숙이게 하고는 앞쪽으로 엎어지게 해서

물에 잠기게 하여 침례를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잇부인 같은 선지자를 알지도 못한다 하고

인정도 하려 하지 않았다. 이 교회가 중국에서 시작된 것은

중국에도 우리재림교회 서적이 많이 출판되어서 보급되었는데,

우바울 이라는 양조업자가 우리 재림교회의 서적을 구입하여 보고

감명을 받고 자기 나름대로 “참 예수교회”라는 교회를 시작한 듯 했다.

나는 왜 나에게 “참 예수교"에 대해 알아보라고 하셨는지는 모르나

내가 알아본 그대로 알려 드렸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최 목사께서

우리교회의 명칭이 너무 길다는 생각을 하고 계시다가

간도에서 고국으로 돌아와 합회평의원회의 때에

”참 예수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고 우리교회와 흡사한 이 교회의

이름을 우리교회의 공식 명칭으로 사용하자고 의견을 내셨다 한다.

합회평의원회에서는 그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다가 더 자세히

알아보자고 의논이 되어 최 목사님께서 나에게 자세히 알아보라고

하셨다고 한다. 나는 내가 알아본 내용을 소상히 기록하여 보냈으나

아무 소식이 없었다. 후에 알게 된 것은 합회 평의원회에서

내가 보낸 기록을 가지고 상당한 논의를 했으나

”참 예수교회”의 주장이 우리교회와 대동소이하나 우리교회의

예언의 신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 등을 미루어 볼 때

참 예수교회도 마태복음 24장의 예언대로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재림의 징조 중 한 가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한다.

좌우간 우리 교회 명칭이 너무 길다고 생각이 되어 짧은 이름으로

바꾸어 보려는 긍정적인 시도가 있었다는 것은 알기를 바란다.

 

 

1928년 7월,

함경북도, 회령에서 천막 전도회를 개최했다.

김규혁 목사님은 활동적이신 성격이기보다는 이론과

가르치는 것을 중히 여기시고 장막전도회 같은 것은 별로

흥미가 없으신 선비 같은 분이셨다. 그러나 우리가 요청을 해서

이 장막전도회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함께 활동한 이들은

김규혁 목사, 정붕상 전도사, 정관신 전도사, 전도부인 최마르다 씨,

정동심 등이었다. 장막 전도회라는 것이 설비도 불충분 하지만

무엇보다 다른 교파의 극심한 반대를 막으며 진행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황을 이루었는데

특히 두만강 뗏목인부들이 많이 참여했다.

 

 

하루 저녁집회에는 어떤 정장차림의 손님 한 분이 참석했는데

이 신사와 뗏목일꾼들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이유는

뗏목 꾼 들이 이 신사를 일본 스파이로 잘 못 본 것이다.

뗏목 꾼 중 한 사람이 이 신사에게 “당신 뭐하는 사람이오?”하고 물었다.

이 신사가 좀 공손한 태도로 대답을 했으면 좋았을 터인데

내가 보기에도 좀 불손한 태도로 “나 이런 사람이요!” 하며

명함 한 장을 휙 내던져 주었다. 명함을 본 일꾼이

“침례교 전도사네” 하고 소리치자 군중들은

“전도사면 전도사지, 왜 이리 건방져!” 하며 이 전도사를

이리 밀고 저리 밀고하는 바람에 갑자기 전도회장은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어느새 지도자들은 다 피하고

전도회를 도우러 왔던 청진교회 평신도인 한필진 형제가 나서서

싸움을 말리느라고 이리저리 밀리고 있었다. 그 사이에

밖에 있던 사람들까지 싸움 구경하려 수 백 명이 몰려와

서로 밀치다가 뗏목 꾼 중 한사람이 철망에 걸려 뱃가죽이 찢어져

유혈이 낭자하게 되었다. 피를 보자 군중들이 흥분이 되어

“전도회 책임자 나오라!”하며 소리를 질러댔다.

더 소란해 지기 전에 나는 나서서 “내가 전도회 주최자중 한 사람인데

우선 이 분을 모시고 곧 병원으로 가서 치료합시다!” 하고 큰소리로 제의했다.

그러나 군중은 ”당신은 책임자가 아닌 것을 우리가 다 아는데 무슨 소리냐?

책임자를 찾아내어 해결하자!”라고 소리들을 쳤다.

그사이, 침례교 전도사는 봉변을 피해 달아났다.

나는 “우선 사람부터 치료 합시다!” 말하고 다친 사람을 끌고

병원으로 가는데 군중은 그냥 “책임자를 찾아내라!”고 아우성이었다.

나는 선비 같으신 우리목사님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실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하도록 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다친 사람을 데리고

병원 가는 길에 우리가 묵고 있는 여관을 지나며 큰 목소리로

“긴상(김 선생) 계십니까? 함께 병원으로 갑시다.”하고 크게 물으니

안에서는 벌써 알아채고 “긴상은 시내로 들어갔다”고 하는

대답이 들렸다. 그러자 군중은 병원은 그만두고 경찰서로 가자고

난리를 쳤다. 나는 우선 병원으로 가자고 큰소리로 말했으나

군중은 기어이 경찰서로 가자고 난리를 치며, 흥분한 군중은

나까지 놓칠세라 나를 단단히 붙잡고 경찰서 문 밖까지 당도하니

따르던 군중은 겁이 났는지 떨어져 나가고 뗏목 일꾼들만 몇 백 명쯤

경찰서 주위에서 서성거렸다.


 

그 다친 사람과 뗏목 일꾼들과 같이 경찰서 문으로 들어가니

밤 11시가 지난 시간인지라 숙직 순사(巡査)만 몇 명 있었다.

뗏목 일꾼들은 자기들이 경찰서로 가자고 아우성들을 쳤지만

막상 경찰서까지 오니 순사에게 말을 시작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도 당황한 기분이었지만 곧 사태를 알았다.

누군가 군중심리에 불을 질러놓고는 뒤로 빠져 버린 것이었다.

틀림없는 공산분자들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내가 경관에게 “여기 온 사람들을 너그러이 처분해 달라”고 말을

시작했다. 예상 한 대로 순경은 “왜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와놓고는

너그러이 처분해 달라는 것이냐? 하며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나는 “내가 이들을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이들이

나를 데리고 온 것”이라고 말하자 뗏목군들은 신사복 입은 사람과의

다툼에서 일어난 이야기를 했다. 이 순경은 “의복 입는 것은

자유인데 이유 없이 소동을 일으켰다”하면서 뗏목 일꾼 중 몇 명을

그 자리에서 가두어 버리고는 우리를 나가라고 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뗏목 일꾼들은 나에게 갇힌 사람들을

속히 풀려나도록 해 달라고 호소하며 신신부탁을 했다.

일꾼들이라 미욱하면서도 순진한 데가 있었다.

 

 

이튿날 아침에 김 목사님께 “전도회 하다가 사람이 이렇게 갇혔으니

경찰서에 가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렸더니

”정 전도사가 전도회 하자고 의견을 내었으니 정전도사가

해결하러 가보라“고 하셨다. 문제는 벌어졌지만

목사님이 가시기만 하면 쉽게 해결이 될 것이기에 말씀을 드렸지만

”역시 선비 같으신 우리 목사님은 이론과 이상은 높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는 잘 모르시는구나!”하고 생각이 혼자 갔다.

경찰서에서 하는 말이 ”이렇게 찾아주니 감사합니다.

역시 선교인들이 다르십니다. 어젯밤 몰려왔던 사람들을 조사해 보니

술에 많이 취하여 그렇게 된 듯해서 이미 다 석방했으니

이해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순경들에게서 이 말을 들을 때에

얼마나 상쾌했던지!” 우리 목사님이 사람사이에서 생기는

이런 재미난 일들을 경험해 보시면 선교하는 방법도

많이 달라지실 터인데....”하는 생각이 났다.

이 날 이후로 전도 집회는 그야말로 순풍에 돛을 단 기분이었다.

설교 끝날 때마다 ”믿기로 작정한 분은 거수해 달라“고 하면

수 백 명의 뗏목 일꾼들은 거의 모두 다 거수하곤 했다.

하나님의 사업도 결국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시하여 진행하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도와주심을 나는 더욱 믿게 되었다.

이렇게 2주 동안의 회령 전도회는, 성황리에 잊지 못할 전도회로

무사히 끝나게 된 것을 감사드렸다.


 

1928년 여름,

내 아내는 여섯 번째 아기를 임신했다.

약한 체질의 아내를 돕느라 몇 달간 가정부를 두어 집안일을 돕고

영양분 있는 음식을 만들어 아내에게 섭취하도록 했더니 다행히

임신 중인 아내의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아내의 해산에 대해 걱정을 하자 이 가정부는 자기가 경험이 많아

잘 돌볼 터이니 염려 말라 해서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막상 아내가 해산하게 되자 이 가정부는

“자기는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하며 뒷걸음질을 치니 난감했다.

1929년 4월 10일.

나는 할 수 없이 “하나님이 도우시면 할 수 있습니다.”라고

기도드리면서 아이를 손수 받았다. 다행히도 나의 아내는

“이번처럼 순산하기는 처음이라.”하여 나의 마음은 너무 후련했고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러나 해산한지 3일 만에 산모의 수족을

깨끗이 씻어 준 것이 잘못 된 일인지 그날 밤부터 산모는

전신에 열이 나면서 몸을 가누지도 못했다.

그래서 전부터 사귀어 오던 정창성 의사를 청하니

산욕열(産褥熱)과 난소염의 합병이라 하며 얼음찜질을

계속 해 주라 했다. 얼음이 귀한 때이지만 열 한 살 된 태혁이와

여덟 살 된 태영이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머니를 위하여

얼음을 구하러 사방으로 다니다가 소문에 용정 뒷산에

얼음이 있다하자 그곳에 가서 땅을 파 본즉 얼음이 나오기 시작하자

얼음을 얼마나 파 왔던지 곡간에 있는 독에 잔뜩 채우도록 구해 왔다.

산모에게 얼음찜질을 한 일주일 했더니 산모의 우편에서 나던 열이

좌편으로 옮겨갔다. 다시 정창성 의사를 부르니 이제는 자기가

할 수 없다며 용정에서 제일 유명한 제창 병원으로 찾아가라 했다.

 

 

이 병원은 캐나다에 있는 장로교회에서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제창병원은 모든 부서가 얼마나 친절한지 아직도 인상에 남아있다.

심지어 서양인원장은 나의 설명을 듣고 친히 우리 집까지 와서

내 아내의 병을 진찰하더니 난소절제수술을 해야 된다며

입원을 시키라 했다. 내 방을 보더니 “그리스도인이냐”고 묻기에

“안식일교회 전도사”라고 말하니, 교파가 다른데도 반가와 하면서

“병원에 당까(환자 이동용 침대)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교회 교인만

빌려주는 것”이지만 병원 서무계에 가서 원장의 지시라고 하고

사용하라고 했다. 이 당까 덕분에 나는 내 아내를 병원까지

쉽게 운반하여 입원을 시키었다. 교파를 초월한 그 분들의 친절은

배울 점이 많았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에 크게 감사했다.

아내의 수술경과는 매우 좋았고 열흘 가량 병원에 입원했었다.

수술 후 너무나 감사해서 병원직원들에게 점심을 대접하겠다는

제의를 했더니 병원총무는 원장에게 문의해 보더니 나의 제의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유는 “감사하지만 만약 그것이 전례가 되면,

후에 가난한 사람들이 대접 못하는 것을 너무 미안해 할 것”이기

때문이라 해서 나는 다시 감동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퇴원을 하는데

원장의 말씀이 “당신의 형편을 생각하면 입원비는 전부 면제하여 주고

싶지만 그 또한 전례가 되면 아니 되니 이십 원정도만 내라.”고 했다.

내가 대강 계산해도 수백 원이 될 것이 확실한데 교파도 다른 전도사에게

정말 교파를 초월한 친절과 사랑이었다.

너무도 의외의 일이어서 나를 크게 감동시켰다.

당시 건강보험 같은 것도 없던 때에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도우심임을 알고 나는 온 가족과 함께 감사했다.

 

 

그러나 산모는 수술후유증인지 갓난아이를 먹일 모유가 나지를 않아

근심하다가 “라꾸도갱”이라는 분유를 사서 모유대신 만들어 주었으나

잘 먹지를 않아 우리 속을 태웠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이의 생명은 부지하였으니 이 또한 감사했다.

이 아이의 이름을 태중(泰中)이라 한 것은 중국에서 났으니

중국이라는 “중”자를 떼어서 태중이라고 지었다.

산모의 건강과 새로 출생한 아이를 키우기가 너무 힘이 들어

생각다 못해 합회에 사정을 설명하고는 그래도 고향이 가까운

“서선대회 지역으로 전근시켜 달라”는 청원을 제출했다.

나는 교회당국의 결정을 따르는 것을 내 사역의 신조로 삼았으나

이런 청원을 한 것은 내 사역 중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닌가 한다.

합회 당국에서는 서선대회가 아닌 중선대회로 전근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가족을 살리고 싶은 내 의향과는 동떨어진 일이었지만

교회 상부의 명령을 따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1929년 5월 초,

곧 있을 조선합회총회를 계기로 나는 약한 아내와 올망졸망한

여섯 자녀를 거느리고 그간 정든 간도 용정을 하직하고

고국을 향해 떠났다. 남들이 가지 말라고 충고했고

또 거절할 만한 사유도 있었지만 젊은 혈기 하나로

막중한 책임을 느끼면서 5년 전에 이 간도에 왔던 내가

이제 스스로 청원하여 떠나게 되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더구나 사랑하는 아내는 건강도 회복 못한 초췌한 모습에다

제대로 먹이지를 못해 파리한 모양의 갓난아기를 거느리고

귀국하자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러나 비록 간도에서

할 일을 다 못하고 오는 느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무한한 복을 주시어 세 자녀를 더 얻어

귀한 자녀 여섯을 데리고 귀국하게 된 것이 무척 감사했다.

용정에서 청진을 거쳐 서울까지, 그 먼 길을 몸이 약한 아내와

갓난아기를 데리고 무사히 와서 총회에 참석하고 우리는 다시

500리 길을 여행하여 고향집에 도착했다. 만 5년 만에 상봉하는

그 기쁨이란 형언할 수 없었다.

그 동안 많이 늙으신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잘 모시지를 못한

죄송한 생각이 사무쳤으나 우리를 보는 어머니는 너무 기뻐하셨다.

이것이 어머니의 사랑임을 다시 깨달았다.

모든 가족들은 이제 출생한 지 3개월 남짓 된 태중이가

지금까지 젖 한 방울을 못 먹고 지낸 것을 몹시도

애처롭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마침 나의 작은 형님 댁에

출생했던 아기가 난지 몇 날 안 되어 죽어서 슬픔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작은 형수님께 여쭈어 보니 아직도

젖이 충분히 나온다기에 이 날부터 태중이는 나의

작은 형수님의 젖을 먹고 자라게 되었다.

형님부부도 아이 잃은 것을 무척 섭섭해 하시다가

조카를 돌보게 된 것을 오히려 감사히 생각하시기에

우리 모두 감사했다. 불행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협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고

길을 열어 주셨으니 감사를 드리었다. 

 

  • ?
    명지원 2012.02.14 20:08

    '재간도 조선인단체협의회'. 사퇴서 사본이 아니었으면 목사님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십 수 년 후, 처형되었겠지요. 수장으로서 그들의 올무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후 전도회에서의 리더십, 캐나다 의사와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정동심 목사님의 자세는 21세기 사역자들의 기준으로 봐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몸을 사리지 않는 정신, 그 자세를 통해 그때의 역사를 회의와 비판만이 아니라 긍지를 가지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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