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부자 되세요’라는 인사란다. 일반적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란 말의 의미는 새해에는 남들보다 더 돈 많이 벌어서 부자 되고, 남 못지않게 자녀들 잘 키워서 남부럽지 않게 성공시키고, 아프지 말고 건강해서 남보다 더 오래 오래 잘 먹고 잘 살라는 뜻이다. 사실 이렇게 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을 복이라 하고 새해의 소망이라 한다.
그러나 불확실성의 세상에서 항상 불안을 안고 사는 사람들은 이러한 소망을 이루기 위해 또는 이미 이룬 이런 현세적 행복을 유지하고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보증할 수 없음을 알고 초월적 존재에 의존하고자하는 심리가 생겨 종교를 찾고 초월적 영적 존재의 보증을 얻고자 한다. 그리하여 종교는 인간의 이기적 복을 이루고 유지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면 사람이 이러한 현세적 복을 추구하는 것이 잘못 되었나? 꼭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이다. 문제는 첫째 그 주체에 있다. 내가 남보다 더 남부럽지 않게 잘 살려하는데 문제가 있다. 나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 복을 누려야한다. 내가 우선권을 가지려하고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 더불어 다 같이 잘 살 수 있도록 내가 기여하여 모두의 행복의 평등권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는 그 동기와 방법과 목적의 문제이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 사슴의 목에 빨대를 꼽는 것, 살아 있는 곰의 몸에 호스를 박아 웅담 즙을 채취하여 먹는 이기적 야만성과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는 경우의 비윤리성의 문제 말이다. 이건 나와는 상관이 없는 극단적인 예라고 하겠지만 그러면 당신의 식생활이나 종교생활이 그 동기와 목적에 있어서 무엇이 다른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방법에 문제가 없다고 그 동기와 목적이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동기와 목적에 문제가 없다고 그 과정의 부당함이 정당화 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셋째는 환경의 격차로 인한 기회의 불공정성이다. 불공정에 기반을 둔 열매를 독점하는 것에 대한 정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이기적인 현세적 소망을 추구하는 신앙을 표층신앙이라 부른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터무니없는 거짓은 가장 일반적이며 가장 매력적인 자기중심의 기복신앙이다. 사람은 자기의 에고ego가 세계의 중심이며 실존의 근원이고 목표인 것처럼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다음 단계의 신앙은 현세적 소망을 추구하지 않고 대신 내세적 소망을 추구하는 것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경우에 해당하는데 이들이 천국의 소망을 갖는 것은 현세적 복은 작고 짧지만 내세적 복은 크고 영원토록 길게 이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큰 유익을 위해 작은 유익을 포기하는 것일 뿐이다. 일면 영리한 선택인 듯 보이지만 약삭빠른 선택일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다음 세상에서의 영적 보상을 바라는 신앙은 종교의 가면을 쓴 욕망일 수 있다. 순결한 기독교인은 세속적인 보상에 대한 바람 없이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영적인 보상을 바라는 소망까지도 둔감해야 한다.
신앙의 목적은 "종교적인 실존에서 자기중심주의와 기복신앙을 씻어 내는 것이요. 대가없이 영적인 보상조차 바라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이다. 신앙에 기득권과 이기적 욕망을 끼워 넣음으로써 종교를 '초자연적인 상업주의'로 전락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코츠커의 렙 멘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이익을 계산하는 행실을 버려야한다. 인간의 종교 활동 -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에 선한 행실을 하는 것 - 이 희생과 불이익을 감수한 아가페 사랑의 순수한 동기가 아니라 개인적인 이해관계나 이득을 계산하는 것은 그 이득이 비록 영적인 것이고 내세적인 것일지라도 불순한 자기 사랑인 기복신앙이며 또 다른 형태의 우상 숭배일 뿐이다.
히브리어(하시드 문학)에 “페니야“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불순한 동기로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을 뜻한다. 칭찬을 듣거나 어떤 이익을 얻고자하는, 또는 다른 사람을 의식하거나, 이 세상에서 또는 장차 올 세상에서 당하지 않으려는 동기를 포함한 종교 생활을 말한다. 이런 ’페니야‘신앙은 종교의 탈을 쓴 영적 기복 신앙에 불과하다. 이는 아직 표층 신앙의 허울을 벗지 못한 신앙이다. 만일 누가 부활과 천국의 보상이 없으면 신앙을 포기하고 향락적인 삶을 살겠다하면 그것이야말로 영적 기복주의의 신앙이고 표층신앙이라는 말이다.
심층신앙은 ‘영적 포상과 영광’조차 포기한 ‘비록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다. 성경의 믿음의 선각자들은 다 이런 ‘영적 포상과 영광’조차 포기한 참 소망의 소유자들이었다.
① 다니엘의 세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느브갓네살왕이 그가 만든 금 신상에 절하지 아니하면 풀무불에 던져 죽일 것이라 했을 때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구원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지만 그것을 당연한 기득권이나 포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
② 모세도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의 영적 포상과 영광을 포기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 32:32)
③ 하박국도 그가 처음에는 원수의 형통함과 자신들의 고난을 원망하며 자신들의 포상을 당연한 권리로 항의하였지만 결국에는 그의 소망이 포상과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함을 깨달았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④ 사도 바울은 말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3) 사도 바울의 소망의 우선순위는 이웃의 구원이 먼저이지 자신의 영적 포상과 영광이 아님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이는 참 신앙인이 무엇을 소망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알려준다.
⑤ 예수님은 어떠하셨는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성육신하시고 또한 홀로 세상 죄를 다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창조주로써의 당연한 영광과 포상을 포기하셨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27:46) 예수님께서 두려워하신 것은 육신의 고통이나 죽음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과의 단절이었다.
이들은 신앙의 목적과 소망의 최우선 순위를 부나 건강 영생 또는 천국에 두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은혜의 선물일 뿐이다. 그렇다. 우리의 참 소망은 현세와 다음에 올 세상에서 포상과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곳이 어떤 곳이든지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계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바로 그 곳이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것이 기독교인의 참 소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재림 소망은 미래에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재림 예수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나와 이웃의 마음속으로 오신 숭고한 사랑의 재림 예수를 만나는 것이며 내가 추구하는 소망의 나라는 수정 바다 위에 금.은 보화가 널려 있는 천국Kingdom of Heaven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거할지라도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이다.
그렇다고 구름타고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과 다음 생의 천국을 부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되기를 나도 소망하지만 그것이 내 신앙의 최우선적인 목적은 아니며 그것을 비록 못 이룬다 할지라도 내 신앙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그것은 덤으로 얻으면 좋고 감사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우리 모두 하늘나라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진정으로 소망하는 순결한 신앙인이 되자! 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