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이하 박근혜)가 '5·16 쿠데타', '인혁당 사건' 등에 대해 내뱉은 발언들을 종합해 보면 그에게 붙은 '독재자의 딸'이란 수식어가 가리키는 의미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하 박정희)과의 생물학적 혈연관계가 아니라 정치·사상적 관계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박근혜는 5·16 쿠데타를 두고 "구국의 혁명"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는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오지 않았느냐"라며 "그 부분에 대해서도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해 논란을 빚고 있다.
박근혜가 박정희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그 자신도 언급했다. 그는 <나의 삶, 나의 아버지>란 책에서“인상에서 가장 중요한 스승을 잘 만나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나의 부모님은 내 삶의 모델이다. 특히 정치인이 된 지금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 같은 존재”라고 했다.
그렇다면 박근혜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박정희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박근혜 바로보기>에서 지적한 박정희의 모습은 만주국 군관에서 광복군으로 변신하는 기회주의자이자 일본의 천황주의를 그대로 계승한 친일파 독재자였다. 또한 모든 자유를 박탈하고 통제했던 ‘폭압적 아버지’ 행세를 했지만 뒤로는 섹스파티를 즐겼던 불우한 이중인격자였다.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가 일본의 꼭두각시 나라인 만주국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이란 혈서를 쓴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도 300명 가운데 3등으로 졸업할 만큼 그는 일본의 충성스런 생도였다. 하지만 일본의 패망 소식을 접하고는 한 달 뒤 대한임시정부의 광복군 북평잠편지대에 들어갔다. 이런 그의 모습은 일본의 강제집징이 싫어서 목숨을 걸고 광복군으로 들어온 장준하 등의 눈에는 보신책으로 광복군을 택한 박정희가 곱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기회주의적 면모는 다른 사건에서도 쉬이 발견된다. 박정희는 여수·순천 반란사건에도 연루됐지만 집행정지로 쉽게 풀려나왔다. 그 이유인즉슨, 자신이 알고 있던 군부 내 남로당원들의 이름을 실토했던 것이다. 박정희의 실토에 근거해 고문 조사가 이뤄진 결과 1000명 안팎의 장교가 숙청당하고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친일 행적은 한국 민주주의를 한순간에 어둠으로 물들였던 폭압적 '5·16 쿠데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박정희가 처음으로 공식 방문한 나라도 일본이었다. 그는 도쿄의 한 고급요정에서 “나는 정치도 경제도 모르는 군인이지만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지사들의, 나라를 위한 정열만큼은 잘 알고 있다. 그들 지사와 같은 기분으로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전 보안사령관이었던 강창성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가죽장화를 신은 점퍼차림에 말채찍을 든 일본군 장교 복장을 종종 즐겼다고 한다.
전 국민을 격분시켰던 1963년 한일회담은 박정희가 친일파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004년 민족문제연구소는 미 CAI 특별보고서를 토대로 이런 내용을 밝힌 바 있다. “당시 박 정권은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1961년부터 한일협정을 체결한 1965까지 5년 동안 6개의 일본 기업으로부터 민주공화당 총예산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6600만 달러를 받아냈다.”
자신의 독재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적’ 혹은 ‘이적’으로 규정했던 박정희 하에서 많은 사람들이 스러져 갔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인혁당 사건,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처형, 민청학련 여정남 처형 등의 ‘사법살인’과 김대중 납치 사건을 비롯해 조작된 간첩사건만 해도 한두 건이 아니었다. 자신의 통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적'으로 규정했다. 언론의 자유가 질식되고, 머리길이와 치마 길이조차 국가의 통제를 받아야 했다.
밤에는 술과 향락에 빠져 살았던 게 박정희의 또 다른 모습이도 하다. 중앙정보부 의전과장이었던 박선호와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의 말에 따르면 박정희는 사흘에 한 번꼴로 주연을 열었고 그때마다 연예계 지망생 등이 술시중을 들게 했다. 또한 박정희가 영화나 TV를 보다가 마음에 든 배우나 가수의 이름을 대며 ‘한 번 보고 싶다’고 하면 대개가 반강제적으로 불러 나왔다고 한다.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일이 '정인숙 사건'이다. 정인숙은 1970년 3월17일 승용차에서 총탄을 맞고 숨졌다. 경찰이 조사한 결과 정인숙의 소지품에서는 정관재계 거물들 33명의 명함이 쏟아져나왔고, 수첩과 장부에는 이들의 명단이 적혀 있었다. 이 중에는 박정희의 이름도 있었다.
이런 박정희를 저자는 ‘천황주의자’라고 평가한다. 생물학적으로는 한국인일지 몰라도 모든 생각과 의식이 철저히 일본화한, 그것도 천황주의자·군국주의자가 된 만큼 ‘소프트웨어’는 일본인 중에서도 가장 극렬한 일본인이라는 것.
최상천 대구가톨릭대 교수도 “유신체제는 박정희가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해 구축한 억압적 통치시스템인 동시에 천황주의를 한국에서 실현한 것”이라며 “박정희의 유신체제는 일본의 천황처럼 한 개인이 국가 위에 올라타서 모든 사람을 자기 의도대로 움직이는 시스템”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박정희의 행적을 미화시키는 3인방이 조갑제, 조중동 수구언론, 그리고 박근혜다. 월간조선은 1997년 박근혜가 한나라당에 입당할 때까지를 ‘잃어버린 18년’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과연 ‘실존적 진공 상태’에 살고 있었을까.
박근혜는 1979년 박정희 피살 뒤 1980년 ‘서울의 봄’이 오기 직전 대구 영남대 재단 이사로 부임, 한 달 만에 28세의 나이로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일 년 뒤 박근혜는 학교법인 정관 1조를 “이 법인은 대한민국의 교육이념과 교주 박정희 선생의 창학 정신에 입각해…”라고 고친다. 1982년에는 육영재단 이사장을 맡았다.
또한 노태우가 정권을 잡자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여성지를 비롯해 신문 방송의 인터뷰에 적극 나서 눈물을 흘리며 '비운의 퍼스트레이디'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아버지를 주제로 한 영화 <조국의 등불>을 제작했고 월간신문 <근화보>를 발행하기도 했다. 1990년 육영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수필집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 <결국 한 줌, 결국 한 줌>을 펴냈다.
1994년에는 박정희가 강탈한 정수장학회 이사장으로 취임해 12년간 그 자리에 있었다. 정수장학회는 부산일보 지분 100%, MBC 지분 30%, 경향신문 사옥 부지 등을 소유하고 있다. 종합해보면, 18년 세월은 아버지 박정희를 미화하고 일신의 안락과 권력의 재창출을 위해 유신의 잔재에 의탁했던 시기였던 셈이다.
박근혜는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일어날 때마다 “민생 챙길 것도 많은데 계속 역사 논쟁을 하느냐”고 반박한다. 박근혜는 그러면서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정치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과연 이는 박근혜의 말대로 ‘과거사에 대한 딴지 걸기’일 뿐일까. 다음은 저자의 말.
“민생은 역사와 현실을 넘어 추상적 세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박근혜 후보가 재래시장을 찾아가서 악수를 하는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고달픈 삶도 민생이지만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데 온 힘을 쏟는 운동가들, 1000 번이 넘게 매주 일본대사관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어온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도 민생이다.…그릇된 역사와 정치를 바로잡지 못하는 정치세력이 주장하는 ‘내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는 백일몽에 그칠 수밖에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행적이 처음부터 잘 못 꼬였고, 장벽이 있을 때마다 힘의 논리를 따랐습니다. 그것이 박정희의 삶입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었다면 권력을 잡으려면,잡고 나서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알았을 테니까요. 박정희는 자신의 종말을 알았을 것입니다. 언제쯤부터 알았을까요?
이제야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잘 한 점, 못 한 점 모두 뭇 백성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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