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적으로 그리고 평평하게 읽지 말아야 할 두가지 주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죄 와 계명의 문제이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그리고 평평하게 읽게되면
죄는 율법을 범하는것 또는 범법이라는 개념으로만 끝나게 된다.
그래서 율법이 없다면 죄는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한가지 측면으로만 몰고 가게 된다.
유행가에 이런 가사가 하나 생각이 난다.
"용서해 주마 돌아와! 철없는 아내!"
이 여자는 나라의 법으로는 (간통이라는 죄가 성립하지 않거나 고소당하지 않는다면) 죄인이 아니다.
그러나 그 남편에게는 죄인이다. 그래서 남편은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로마서 7장에는
- 결혼한 여자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법으로 남편에게 매여 있으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풀려납니다.
- 그러므로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로 가면, 그 여자는 간음한 여자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해방되는 것이므로, 다른 남자에게로 갈지라도 간음한 여자가 되지 않습니다
전남편이 살아있을 동안에는 대한 다른 남자에게로 가면 죄가 되지만 그가 죽으면 다시 다른 남자에게로 가더라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 교회(여자)와 전남편 (율법) 그리고 새남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간다.
이 7장을 잘 읽어보면 여기서의 나는 육신을 가리키는 몸이다.
몸(육신)의 남편은 율법 조문의 묵은것이라는 계명이다.
비록 그것은 그것자체로는 선하고 의롭고 거룩한것이지만 죄 (전남ㄴ편과 나라는 몸의 관계)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몸)을
속이고 나 (몸)를 죽였다.
전 남편과의 통상적 관계는 죄아래 있는것과 같고 결국은 내가 죽게 되는 관계이다.실제로 육신적 이스라엘이라는 여자(광야교회)는
계명으로 대변되는 모세와 함께 광야에서 다 죽임을 당했다.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분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도 십계명을 포함하는 계명아래서 죽임을 당케되는 똑같은 경험을 하는것이다.
갈라디아 3장 10절에는 전남편 아래에 있는 우리의 육신적인 삶이 이러하다고 말한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전남편이 말하는)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리고 그 몸은 하갈이라는 이름의 여자이고 그 몸에서 난 아들은 저주의 아들이며 종이되는 관계라는 말을 하는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에는 계속해서 그렇게 한 이유가 다 하나님의 계획의 과정이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전남편을 통해서 새로운 남편을 만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리고 새남편과의 관계속에서는 다시는 모든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저주의 관계 는 절대로 아니다.
그리고 새 남편을 만나서 관계를 맺는 우리는 육신 (몸)이 아니다. 그 몸은 이미 죽어버린 것이고 새 남편에게로 가져가는 대상이 아니다.오직 영으로만 그 관계가 가능한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짚고 넘어 가야할 중대한 부분이 하나가 있다.
육신이 전남편아래서 범하는 죄는 율법이 말하는 모든것을 항상 지키고 살지 못하는 죄이지만
새 남편과 우리의 속사람 (영)이 맺는 관계속에서 범하는 죄는 그 율법의 조항이 아니다.
순결이다.
모둔것을 항상 영으로 살게하는 남편과 항상 함께 살아가지 않는것이 새남편 아래의 새로운 죄이다.
육적인 이스라엘에게 말하는 율법아래의 죄와 영적인 이스라엘 (교회)에게 말하는 죄가 같은죄가 아니라는 말이다.
구약이 말하는 죄와 신약이 말하는 죄가 다르다는 말이다.
간음중에 있는 그 여자 (우리 몸을 대표하는)를 고발하는 율법 (전남편)이 말하는 죄와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하는 새남편 (에수)이 의미하는 죄가 같은죄가 아니라는 말이다.
전 남편은 모든것을 항상 행치아니하는 죄를 묻지만 새 남편은 항상 새 남편을 의지하는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그 죄만 묻는다는 말이다.
전남편에게는 온갖죄가 성립하지만
새남편에게는 믿지 아니하는 죄만 성립하는 것이다.
전 남편 아래에서는 온갖것을 항상 자신이 지켜서 하나님과의 관계(믿음)에 이르려 하였지만
새 남편 아래서는 오직 그를 믿는 믿음 하나로 온갖것을 항상 지키게 하는 남편의 능력으로 살게하려 하는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6절에서 말하는 의미가 위와같은 맥락에서 읽어야 하는것이다.
"그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라는 순서가 전남편과 다른것이다. 그 범죄하지 아니함이란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지키고 말고의 이야기가 아닌것이다. 새 남편과의 관계속에는 그래서 죄가 단수이다. 한가지의 죄-남편을 떠나는 죄 뿐이다.
반대로 전 남편과 죽지않고 계속적으로 맺을 수 있는 관계는 "범죄하지 아니하므로 (온갖것을 항상 지키므로) 그안에 거하게 되는" 피곤한 관계일뿐 아니라 그 죄는 복수이고 온갖것이고 항상이라는 죄인 것이다.
전자의 죄는 어린양 (남편의 대속)의 두루마기에 날마다 빨(세탁) 수 있는것이지만
후자의 죄는 자신이 행함으로만 해결해야할 율법의 저주일 뿐이다.
순서와 내용이 다른 두 차원의 것을 믿는다는 이들이 평평하게 그리고 문자즉으로 읽어가지고 영원히 헷갈려 있다는 내 나름의 걱정이 되어서 이글을 쓰게 되었다.
요 아래 누군가 올려놓은 "구원의 모조품" 이라는 동영상을 보면 이렇게 문자적으로 읽고 평평하게 성경을 읽은 결과로 새 남편을 만난 다음에도 우리가 해야 할 거룩이 남아 있다고 하는 참으로 황당한 기별이 담겨있다. 사실 우리가 새남편아래 있다고 함부로 살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결코 하지 않지만 마치 그런것이 주류인것처럼 끌고가서 그들이 하고싶은 이야기를 엮어간다는 속셈을 엿보게 하는 기별이다. 늘하는 수법이다. 완전론의 선구자들!!!
새 남편을 만난 그 자체가 거룩이다.
그 관계가 거룩이다.
만약에 우리속에 그런 거룩이 없다면 우리는 새 남편과의 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증거이다.그럻다고 구약 (모세)이 말하는 그런
계명과 행동의 지침속으로 영혼들을 몰고 가지 않기를 바란다.
새 남편과 맺는 거룩은 이런것이다.
다시는 모세의 죄속으로 돌아가지 말라. 다시는 그 계명의 저주 속으로 들어가지 말라. 그 열매는 사망이다 새 남편의 의 속으로 들어가라 새 남편의 축복속으로 들어가라 그 열매는 영생이다 귀가 있는자는 듣거라 그리고 새 남편을 만났거던 율법 율법 율법 그런 이야기 다시는 하지도 말거라 야고보가 말하는 행함은 새 남편하고 새로운 관계 (영적인)속에서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그런 행함이다. 그것이 나타나지 않으면 관계를 의심해야지 자꾸 행함을 강조해서는 아니되는 법. 용서해 주마 돌아와 철없는 아내들아! 새 남편은 알파와 오메가요 그 분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알파와 오메가라니까. |